ⓒ시사IN 안희태6월6일 밤 서울 광화문 네거리에서 열린 촛불문화제에 참석한 소울드레서 동호회원.
촛불시위를 통해 우리는 현명하고 당당한 여성을 수없이 만났다. 교복 입은 어린 소녀에서 유모차를 끄는 젊은 주부에 이르기까지 우리가 본 여성은 현 정부에 결여된 소통과 참여의식을 지닌, 진정 의식 있는 시민사회 세력이었으며, 그로 인해 새로운 공동체의 실천적 가능성에 잠시 젖어드는 기쁨을 누릴 수 있었다. 이제 여성의 목소리가 생활 정치를 넘어 다양한 정치 의제에 등장하리라는 희망찬 전망을 어떻게 부정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과연 그러한가. 오히려 제도권 내 여성의 공백이 촛불을 든 여성을 더 도드라져 보이게 하는 것은 아닐까.

한국이 OECD 국가 중 대졸 이상 고용률에서 거의 최하위라는 불명예는 여성 대졸자의 노동시장 참여 부진 때문이다. 남성 대졸자의 경우 오히려 OECD 평균을 상회한다. 물론 문제는 총체적이다. 저렴한 공보육 시설이 부족하니 일하는 여성의 기회비용은 높아만 간다. 살인적 사교육 전쟁 역시 이 전투에서 밀릴 수밖에 없는, 일하는 여성의 고민을 깊게 한다. 여성에 대한 차별도 법 제도의 발달에 따라 미세한 진화를 거듭한다. 여성이라서 채용하거나 승진시키지 않는 것이 아니라, 여성을 경력 개발과 승진이 제한된 특수한 직무와 직군에 제한시킨다. 기회비용 같은 것은 고려할 여지도 없이 숨 막히는 생계 압박에 쫓겨 저임금과 고용 불안에 시달리는 비정규직 일자리를 전전하는 것도 대부분 여성 몫이다.

오직 객관적 시험성적만이 주된 진입 장벽이 되는 각종 국가고시에서 여성이 약진하는 것은 딱히 집어낼 수 없는, 보이지 않는 장벽에 막혀 다른 분야로 진출하기가 여의치 않기 때문이기도 하다. 진입에 성공한 이들이 시간이 흐른 후 채용된 성비만큼 고위직에 오를 가능성은 불행하게도 희박하다. 여성이 너무 많아 남성 할당제를 고려하는 교육계에서도 결정권을 가진 중요한 지위는 거의 남성이 차지한다는 사실이 이를 증명한다. 정부의 ‘머슴’은 그들이 대표하는 국민의 다양한 특성을 반영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봉건적 표현인 이 말조차 지배적인 한 성(g- ender)만을 지칭하고 있다는 사실에는 뒷맛이 씁쓸할 수밖에 없다. ‘알파걸’에 대한 과도한 찬탄과 견제 대신 이들이 도대체 왜 ‘알파우먼’은 못되는지 진지하게 고민해야 할 때이다.

국가가 법·제도·관행·의식 변화 주도해야

문제가 총체적이라면 대안도 광범위하게 찾아야 한다. 여성만 밥을 먹지 않는 한, 거리에서 밥상을 걱정해야 하는 것도 그들만의 몫이 아니다. 정당한 대가를 받고 일할 권리와 의무도 남녀 공히 공평하게 주어져야 할 기회이며, 국가는 이러한 환경을 조성하기 위해 법과 제도는 물론이고 관행과 의식의 변화 역시 주도할 필요가 있다.

촛불의 힘은 감동적이었다. 그러나 촛불 정치가 보여준 가능성이 자동으로 제도권에 이전되지는 않는다. 촛불을 통해 만났던 여성이 좀더 넓은 세상에서 그들이 보여준 자유로움과 거침없음으로 소통하고 실천할 수 있기를 희망한다. 획일성과 권위주의가 일터와 가정에서 지속되는 한, 소수자의 권리와 목소리가 다수자의 무관심과 횡포로 묻히는 한, 평등과 정의 그리고 다양성의 실천을 향한 촛불은 아마도 우리 가슴속에서 계속 타올라야 할 것이다.

기자명 이주희 (이화여대 교수·사회학과)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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