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 신뢰 프로세스, 동북아 평화협력 구상, 유라시아 이니셔티브, 드레스덴 구상을 포함한 모든 주요 외교안보 정책은 대통령님께서 취임하시기 오래전부터 치밀하게 전략적인 토론을 거쳐 설계된 비전이자 국가 대전략입니다. 외교부가 그 중심에 서 있다는 자부심을 가져주기 바랍니다.” 지난 3월30일 윤병세 외교부 장관이 서울에서 열린 해외공관장회의에서 한 말이다. 다음 날 박근혜 대통령도 특보단과의 오찬에서 중국 주도의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AIIB), 미국의 고고도미사일 방어체계(사드·THAAD)에 대해 언급하면서 “언론 같은 데서 우리가 강대국 사이에 끼었다고 ‘어이쿠 큰일났네’ 하는데 너무 그럴 필요 없다. 우리는 의연하게 여러 정보를 종합적으로 판단해서 하는 것”이라는 취지의 발언을 했다고 한다. 그러나 현실은 사뭇 달라 보인다.

남북한 관계가 경색 국면에서 벗어나지 못하면서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는 개점휴업 상태다. 동북아 평화협력 구상도 구체적 진전이 없어 보인다. 드레스덴 구상만 해도 우리만의 구호로 끝나는 것 아닌가 하는 우려가 앞선다. 유라시아 이니셔티브와 신(新)실크로드 구상 역시 말만 무성하지 이루어놓은 것이 없다. 이게 치밀하게 준비해온 대전략의 현주소라면 문제가 있다.

박 대통령 말대로 AIIB 가입 결정이 정녕 미·중 구도에 개의치 않고 “여러 정보를 갖고 종합적으로 판단”해서 결정한 것일까? 윤병세 장관은 한 술 더 떠 이를 ‘고난도 외교력이 발휘된 대표 사례’로 규정하고 있다. 동의하기 어렵다. 지난해 7월 초 시진핑 주석의 방한 과정을 복기해보자. 당시 박근혜 정부는 AIIB 가입을 기정사실화했다. 그러다 미국 정부가 반대 시각을 표명하자 막판에 가입 결정을 유보한 것으로 알려진다.

이는 박근혜 정부의 외교 철학과 전략 부재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AIIB는 세력 균형 논리와 무관한 아시아 지역의 공공재를 마련하기 위한 제안이다. 게다가 우리 정부가 추진 중인 동북아 평화협력 구상, 신실크로드 구상, 유라시아 이니셔티브, 드레스덴 구상의 실천은 물론이고 한국 건설업계의 활성화를 위해서도 가입 결정은 필수적인 것이었다. 명분과 국익 양쪽에서 모두 AIIB 가입이 충분히 정당화될 수 있는데도 미국의 눈치를 보다 실기하고 만 것이다. 지난해 7월에 가입 의사를 밝히고 10월의 베이징 창립모임에 참석했더라면 AIIB의 지배구조나 지분 확보를 고심할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분명한 전략적 패착이다.

사드 문제는 어떤가? “미국이 요청하지 않았기 때문에 협의하지도 않았고 결정한 바도 없다”라는 사드 문제가 왜 이렇게 불거져 나왔는지 알 수 없다. 미국이 공식 요청하면 군사적 효용성과 국가 안보 이익을 고려해서 정부가 공론화한 다음 여론을 감안해 결정하면 될 일 아닌가. 정부가 왜 논란을 방치하고 심지어 키웠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급기야는 이러한 모호한 태도가 중국의 공식적인 우려 표명으로 이어지고 사드와 AIIB가 양자택일이라도 해야 할 사안처럼 비춰졌던 것이다.

‘방패’ 구실밖에 못하는 사드는 최선이 아닌 차차선의 선택

전략적 우선순위에서 보이는 혼선은 더 큰 문제다. 기본적으로 사드는 최선이 아닌 차차선의 선택이다. 최선은 예방 외교를 통해 북한 핵, 미사일 위협을 제거하거나 축소시키는 것이며, 외교적 노력이 실패할 때에 대비해 공격용 자산을 확보해서 억지력을 증강하는 게 차선이다. 적의 미사일 공격을 종말 단계에서 요격한다는 사드는 그다음 순서이다. 이처럼 수동적 ‘방패’ 구실밖에 못하는 사드가 마치 최선의 대안처럼 부각되는 것을 묵인하는 정부의 태도를 이해하기 어렵다.

우선순위가 혼란스럽기는 대북 정책도 마찬가지다. 북한의 핵과 미사일이 우리 안보에서 최대 위협이라고 한다면 모든 외교적 노력을 이 사안에 집중하는 것이 순리다. 그런데도 정부는 북한 인권법을 제정하고 유엔 북한인권사무소를 한국에 유치하는 등 북한 인권 문제에 적극 나서고 있다. 게다가 북한의 사이버 위협에 확고히 대응하는 동시에 북한을 개방·개혁의 길로 유도하겠다고 한다.

미국 같은 초강대국마저도 북한의 핵, 인권, 사이버, 개방개혁 문제를 동시에 해결하기는 어렵다. 그런데 한국 정부가 이를 동시다발로 해결할 수 있을까? 다분히 회의적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북한의 핵, 미사일 무장력은 증강 일로에 있고 인권 개선이나 개방·개혁의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이제는 우선순위를 확실히 정하고 ‘선택과 집중’ 전략을 통해 급박한 사안부터 하나씩 풀어나가야 한다. 그래야 다른 사안에도 긍정적 파급효과를 가져올 수 있다.

기자명 문정인 (연세대 교수·정치외교학)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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