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합뉴스여성이 법조계에서 ‘머릿수’로 남성에게 밀리던 시대는 지났다. 그러나 법조계에도 ‘유리 절벽’은 존재한다. 위는 사법연수원 수료식.
야근과 휴일 근무도 괜찮다면 법조계만큼 일하기 좋은 곳도 드물다. 사회에서 대우받는 직업인 데다 보수도 세다. 법원과 검찰은 안정적인 직장이기도 하다. 특히 ‘여성’에게는 이보다 좋을 수 없다. 법조계에서 일하는 여성은 대부분 “적어도 나는 남녀 차별을 느끼지 못한다”라고 말한다. ‘어디에서 어떤 차별이 있다더라’는 소리는 들어봤지만 2008년 현재 자신에게 해당하는 이야기는 아니라는 것이다.

이런 답이 나올 만도 하다. 일단 여성은 법조계에서 ‘수’로 남성에게 밀리지 않는다. 2005년부터 사법고시 합격자 중 여성이 차지하는 비율은 30%를 넘어섰다. 사법연수원 수료 이후 판검사로 임용되는 여성 비율은 50% 이상이다. 2007년 예비 판검사로 임용된 전체 190명 중 102명이 여성이었다. 검사들은 “10년 전만 해도 검찰에 여성이 돌아다니는 것이 생경했는데 이제는 자연스럽다”라고 말한다. 재판정에 들어서면 배석판사 한두 명은 보통 여성이다. 다른 공무원 조직도 여성의 진출이 활발하다. 지난해 행정고시 합격자 251명 중 123명(49%)이 여성이었다.

여성이 국가고시에 합격하는 비율이 높아지자 일각에서는 진입은 쉬워도 내부 생존이 어렵지는 않을까 염려한다. 그러나 현직 판검사는 “여성이라서 승진에 불이익이 있는 것은 아니다”라고 입을 모은다. 과거에는 사법고시에 합격하는 여성이 워낙 적었기 때문에 고위직에 여성이 드문 것일 뿐이라고 말한다. 행정부의 5급 이상 여성 공무원 비율 역시  9.6%(2006년 말)로 상대적으로 낮은 수준이었으나 여성의 공무원 진입이 활발해 앞으로는 크게 늘어날 전망이다. 

여성 법조인에게만 주어지던 혜택이 사라진 것을 두고 법조계에 남녀평등이 이루어진 증거가 아니냐는 목소리도 있다. 여성 변호사가 적을 때는 수요와 공급의 시장원리에 따라 오히려 사건을 쉽게 맡을 수 있었다. 또 과거에는 여성이 판사나 검사로 임관하면 첫 발령 지역을 우선 배정하는 관례도 있었다. 소수자를 배려하는 차원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임신한 여성을 제외하고는 이런 혜택을 받을 수 없다.

여성이 늘자 법조계 문화도 변했다. 참여정부에서 참여혁신 수석비서관을 지낸 박주현 변호사는 “집안에 딸이 생기면 아버지가 변하듯이 과거 ‘암행어사’같이 딱딱하던 법조계가 한결 부드러워졌다”라고 표현했다. 한 현직 여성 검사는 “상명하복식이었던 의사전달 구조가 ‘소통’하는 방식으로 바뀐 것은 분명하다”라고 말했다. 단, 여성이 늘어나서 바뀐 것인지 시대가 변한 것인지는 분명치 않다고 덧붙였다. 회식에서 술이 줄고 농담 수위가 낮아진 것도 변화다. 한 남성 검사는 “회식에 여검사 한 명이 낄 때만 해도 접대 여성이 나오는 술집에 가기도 했다. 요즘은 회식에 여검사 3~4명은 기본이라 꿈도 못 꾼다”라고 말했다.

남성의 눈으로 보면 차별 못 느낀다

그런데 차별을 느끼지 못한다는 여성 법조인의 주장에 이의를 제기하는 목소리가 있다. 이화여대 김선욱 교수(법학)는 “여성 법조인이라고 해서 전부 의식이 깨어 있는 것은 아니다”라고 잘라 말했다. 예민하게 생각하지 않으면 차별을 느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는 “남자하고 똑같이 (권위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면 당연히 차별을 느낄 수 없을 것이다”라고 덧붙였다. 한 여성 검사는 “솔직히 남성 중심의 기존 문화에 획을 내는 것보다 융합하는 것이 효율적 선택이다”라고 말했다. 성차별을 느끼지 않았다고 말하는 여성 법조인도 대부분 법조계 내부에 ‘남성 중심 문화’가 여전하다는 것에는 동의했다.
법조계가 남성 중심으로 짜여 있다는 것은 ‘인맥’에서 가장 크게 나타난다. 변호사는 아는 사람이 많을수록 사건을 수임하는 데 유리하다. 검사는 정보를 수집하기 위해 다양한 사람을 사귀는 것이 중요하다. 그런데 법조계뿐 아니라 사회 전반에 요직을 차지하고 있는 사람은 대부분 남성이다. 이들 사이의 네트워크에 여성이 끼어들기는 아직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한 여성 변호사는 “남성은 학연·지연을 바탕으로 인맥을 쌓고, 술자리와 골프로 이를 유지한다. 반면 여성은 학연·지연을 들먹이는 자체에 결벽증이 있다”라고 말했다.

인맥 못 만들면 자연스럽게 밀려나

‘인맥’은 법조계 내부에서 여성을 자연스럽게 변방으로 모는 구실을 한다. 대형 로펌에 소속된 여성 변호사는 사건을 회사를 통해 배정받을 수 있기에 그나마 사정이 나은 편이다. 문제는 개업 변호사다. 한 전직 여성 변호사는 “여성 변호사는 성범죄, 가정 문제 등 주로 맡는 몇 가지 사건 유형이 있다”라고 말했다. 이런 문제 때문에 여성 변호사는 ‘개업’에 대한 불안감을 호소한다. 한 여성 사법연수

 
원생은 “여성 연수생끼리 모이면 혹시 임관하지 못하거나 대형 로펌에 취직하지 못하면 어떻게 하나 걱정들을 털어놓는다. 반면 30대 중반 이상 남성은 임관에 크게 목매지 않는다”라며 여성 판검사 비율이 높을 수밖에 없는 이유를 설명했다.

검찰 쪽도 사정은 비슷하다. 한 여성 검사는 “여성 검사는 시키는 일은 잘하지만 일의 영역을 넓힐 줄 모른다”라고 말했다. 사조직을 통해 정보를 얻고 이를 바탕으로 기획수사를 벌이는 일에 여성이 취약하다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특수·공안·기획수사 등 몇몇 분야에서는 팀을 꾸릴 때 여성이 포함되는 것 자체가 아직도 특별한 일로 여겨진다. 한 여성 검사는 “주요 사건에 여성 검사를 포함시키는 것은 주로 정치 분위기에 좌우된다. 강금실 법무부장관 시절이 제일 활발했다”라고 회상했다.

출산과 육아 역시 남성화한 법조계에서 여성이 견뎌내기 힘든 요소다. 물론 법적으로 출산휴가와 육아휴직이 보장된다. 그러나 현실은 다르다. 3개월의 출산휴가를 다 쓰는 경우가 드물다. 법조계가 전문영역이다 보니 대체인력을 구할 수 없기 때문이다. 특히 판사나 검사는 여성이 출산휴가를 떠나면 돌아올 때까지 남아 있는 인력이 그 일을 고스란히 떠안아야 한다. 한 남성 검사는 “그러면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업무가 많아지면 출산휴가로 자리를 비운 여성 검사를 원망하게 된다”라고 털어놓았다. 이러다 보니 여성 판검사는 출산 뒤 웬만큼 몸이 추슬러지면 남은 휴가일수에 관계없이 출근하는 것이 관례가 되었다. 육아휴직을 쓰는 여성 법조인은 거의 없다. 한 여성 판사는 “자리를 비운 기간만큼 일에서 도태되는 현실에서 누가 맘 편히 휴직할 수 있겠느냐?”라고 되물었다. 한 변호사는 “일부 소규모 로펌에 들어가는 여성 변호사는 몇 년간 임신을 하지 않는다거나 육아휴직을 하지 않는다는 계약서를 쓰기도 한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이런 분위기가 ‘불편’은 하지만 ‘불만’은 아니라고 말하는 여성 법조인이 많다. 이들은 “여자라서 일에서 특별대우를 받겠다는 생각은 없다”라고 말한다. 남성과 같은 대우를 받으려면 똑같이 일하는 게 당연하다는 것이다. 인맥 쌓기와 출산의 어려움에 대해서도 “어느 직업에서나 겪을 수 있는 문제다”라고 치부한다.

따라서 여성 법조인은 이런 문제를 ‘사회문제’로 인식하지 않고 개인적으로 해결한다. 남성과 똑같이 일하기 위해 육아는 어머니에게 맡기거나 아기를 돌봐줄 사람을 구하는 식이다. 김선옥 교수는 “여성 법조인이 ‘특권층 여성’이기에 남성 문화에 편승하기가 오히려 쉽다”라고 말했다. 딸이 법조인으로 성공할 수 있게 부모가 온갖 수발을 들고, 고학력 전문직 여성이라고 사회에서 우대하는 현실에서는 여성이라서 발생하는 문제가 아주 사소하게 여겨질 수 있다는 것이다. 박주현 변호사는 “차별받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은 여성 법조인의 자존심 문제이기도 하다. 열심히 공부했고 이만큼 성취를 이룬 자신이 차별받는다는 사실을 용납할 수 없는 것이다”라고 해석했다.

‘여풍’으로 사법개혁? 아직은…

여성 법조인이 늘어나면서 바뀔 것으로 기대를 모았던 사법계 전반의 문제도 아직은 큰 변화가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 여성이 많아지면 사법계 로비 문화가 투명해질 것이라던 예상은 오히려 빗나갔다. 변호사 출신인 민주노동당 이정희 의원은 “아직도 변론서를 열심히 써주는 것보다 담당 부장판사 한번 만나줄 수 있는 변호사를 찾는 의뢰인이 많다. 여자가 그 일을 어떻게 하겠느냐고 생각한다”라고 말했다. 로비 문화도 인맥과 연결돼 여성 법조인을 소외시키고 남성들의 결속력을 강화하는 구실을 하는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여성 판사들이 로비 문제에서 자유롭다는 것은 사법계의 중론이다. 

남성 시각이 지배적으로 반영되던 재판 결과에 변화가 생기리라던 기대도 아직은 시작에 불과하다는 평가다. 그러나 우리나라 여성 검사 1호인 조배숙 의원(민주당)은 “과거에는 고부갈등이 이혼 사유가 되지 못했다. 남자 판사들이 고부갈등 문제가 얼마나 심각한지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지금은 다르다”라며 남성 중심 판례에 적잖은 변화가 있을 것임을 낙관했다.

기자명 박근영 기자 다른기사 보기 young@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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