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이다. 새 학년, 새 교실, 새 친구…. 그러나 개학을 앞두고도 몇몇 교사는 설레지 못했다. 안산의 교사든 안산 밖의 교사든 마찬가지였다. 1년 전 이맘때 세월호 참사로 희생된 학생의 유가족은 교사를 원망했다. 당시 홀로 구조된 데 죄책감을 느낀 단원고 교감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교사들은 ‘교사이기 때문에’ 슬픔을 적극적으로 표현하거나 어루만지는 데 한계가 있었다. 술렁이는 학교와 학생들을 안정시켜 나가야 할 주체 또한 이들이었다.

안산 지역의 중학교 교사 정태연씨(43), 고등학교 교사 임수연씨(가명·39)와 광화문 농성장 지킴이를 자처하는 경기 지역 초등교사 김희정씨(39), 정보람씨(27)를 〈시사IN〉 편집국에서 만났다. 이들은 개학 후 만난 학생들에 대해 “존재만으로 감사하다, 예쁘다”라고 입을 모았다.


ⓒ시사IN 윤무영‘세월호를 기억하는 교사’ 모임에 참여하고 있는 김희정·정보람·정태연 교사(왼쪽부터)와 임수연 교사(가명·맨 오른쪽)가 한자리에 모였다.
4월16일, 그때를 기억하나?

임수연(임):4월16일, 우리 반의 한 학생이 굉장히 불안해했다. ‘괜찮을 거야. 나쁜 일은 일어나지 않을 거야’라고 다독였지만 소용없었다. 참사가 일어난 다음 날 한 학생은 SNS를 보여주면서 ‘아직 내 친구가 메시지를 보내고 있다’고 말했다. 할 말이 없었다. 복도에서 여학생들이 쉬는 시간마다 울면서 지나갔다. 나도 같이 울음이 올라왔지만 수업할 때마다 울 수는 없었다. 실제로 엄청난 사건이 일어났다는 사실을 믿기까지 사나흘이 걸렸다.

김희정(김):교직 생활 14년차 연구년 기회가 생겼지만 연구를 할 수가 없었다. 뭐라도 해야 할 것 같아서 옆 학교 교사라고 밝히면서 병원 조문을 다녔다. “여기는 왜 왔느냐”라는 반응이 있는가 하면, “와줘서 고맙다”라고 인사하는 유가족도 있었다. 새벽에는 단원고에 가서 희생 학생이 학교를 마지막으로 들르는 길을 배웅했다. 학생 영정사진을 안은 어머니가 교사가 서 있는 쪽을 향해 90°로 고개를 숙이며 “마지막 가는 길이다. 선생님께 인사드리자”라고 말했다. 그때 충격이 아직까지 가시지 않는다. 우리 사회에서 ‘어머니’는, ‘선생님’은 무엇일까. 교사라는 이름이 주는 무게가 컸다.

정보람(보):교사로 첫발을 내디딘 직후 세월호 참사가 벌어졌다. 선생님이라는 정체성조차 없는 상태였다. 당시 맡았던 초등학교 4학년 교실의 컴퓨터를 통해 세월호가 침몰하는 장면을 보았다. 영상 너머로 학생들이 교실에서 뛰어노는 모습이 보였다. ‘내가 거기 있었다면… 절대 이 아이들을 놓을 수 없다’는 생각이 스쳤다. 그 주 주말에 무작정 팽목항에 갔다.

슬픔을 보내는 가장 좋은 치유법은 본인의 감정을 표현하고 나누는 것이라는데, 교사로서 쉽지 않았을 것 같다.

정태연(정):안산 지역의 교사로서 처신이 굉장히 조심스러웠다. 배 안에 동료 교사들이 있었지만 숨어서 눈물을 흘려야 했다. 교사도 피해자이지만, 학생 유가족 입장에서 보면 내 아이가 죽었을 때 당장은 담임 선생님 책임이 먼저 느껴지지 정부 당국에 책임이 있다고 느껴지지 않기 때문이다. 교장이나 교육청의 ‘아무 말 하지 마라’는 지침을 일정 부분 내면화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단원고 교사는 특히 본인의 슬픔을 감내하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학부모와 정부 당국의 이야기를 다 들어야 했기 때문에 괴로웠을 거다.

:여름이 지날 때까지 매일 울 정도로 괴로웠지만 어느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었다. 무엇 때문에 우는지 나 스스로 설명할 수 없고,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교사를 돌봐줄 시스템도 전혀 없었다. 무엇보다 학생들이 뭍으로 전부 나오지 않았는데, 교사가 상담을 받거나 돌봄을 받아선 안 된다고 생각했다. 학생 유가족이 교사를 향해 욕을 해서 분한 마음이 누그러진다면 어떤 교사라도 그리하라고 할 것이다. 책임을 제대로 지지 못한 사람이기 때문에 당연히 감내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여전히 죄송하다. 동료들과 ‘우리가 만약 그 배에 탄 상황이었다면 어땠을까…’ 하는 이야기를 나눈다. 우리도 학생들이 나오기 전까지는 나올 수 없었을 거라고 말한다. 체험학습 때 사고가 나면 어떻게 해야 할까 생각하는 일도 잦다. 거기에 이입되면 다시 상처를 받는다. ‘학생들 어떻게 됐는지 파악하려다가 함께 죽겠지…’ 이런 말이 흔하다.

ⓒ시사IN 이명익‘세월호를 기억하는 교사’ 모임은 지난 2월부터 퇴근 후에 피케팅을 하고 노란 리본을 만들고 있다.
:단원고 교감 선생님의 죽음이 보여주듯, 살아도 산목숨이 아니었을 거다. 과장하면 대한민국의 모든 교사가 ‘죄송하다’고 생각할 거다. 그런 마음에서 희생된 교사 분들을 잘 보내드리고 싶은 마음이 든다. 지난해 안산 지역 ‘촛불’에서 교사가 나와서 발언하면 좋겠다는 제안이 있었다. 아무도 나서는 사람이 없길래 내가 먼저 나서서 2학년 5반 이해봉 선생님에게 쓴 편지를 읽었다. 5월5일, 이 선생님이 나왔을 때 빈소도 지키고 추모식도 성의껏 하고 싶었다. 하지만 일부 학생과 교사의 생사를 알 수 없는 상황이라 외부에서 어떻게 볼지 불안했다. ‘우리가 안 챙기면 누가 선생님을 챙길까’ 하는 마음도 있었고.

교사로서 할 수 있었던 일은 무엇인가?

:초등학생들은 ‘죽음’에 대한 경험이나 인식이 거의 없었다. 무엇보다 교사로서 경력이 짧아서 이 상황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막막했다. 고심 끝에, 참사 다음 날 반 학생들과 편지를 썼다. ‘언니 오빠, 빨리 구조돼서 돌아오라’ ‘에어포켓이 있으니 곧 구조될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 노란 리본을 함께 만들어 팽목항에 갖다 놓았다.

:뭐라도 하고 싶은데, 하지 못해 발만 동동거리는 선생님들의 마음을 확인한 일이 있다. 단원고 교사들이 진도로 내려가자, 학교가 텅텅 비었다. 그때 연구년 교사들이 빈 학교를 채우면서 체계를 만들었다. 그래도 인원이 모자라서 교사 200여 명에게 문자를 돌렸다. 그때 문자를 받은 인원수를 훨씬 넘는 선생님들이 모였다. 한 교사는 ‘아이를 재우고 참가하겠다. 새벽에 참가할 수 있어서 다행이다’라고 답했다. 당시 선생님들의 마음이었다.

세월호 참사 이후 학교 분위기에 변화가 있었나?

:교문 앞에서 등교하는 학생들을 보며 ‘너 넥타이는, 명찰은?’ ‘화장했냐?’ 이런 감시 위주의 말이 아니라 “잘 잤어?” “기분 어때?” “어제 무슨 일 있었어?”처럼 정서를 살피는 질문을 했다. ‘살아만 있어줘도 고맙다’ ‘존재 자체가 감사하다’는 마음이 일어났다. 처음 몇 달간은 안산의 모든 어른들이 그랬던 것 같다. 교문 앞에서 선생님을 만났을 때 학생들이 안도감을 느끼는 분위기가 굳혀지면 좋겠다.

:학교 현장과 달리, 교육 당국은 세월호 이후의 변화를 ‘행정’으로만 바라본다. 유가족을 위로하기 위해 팽목항에 갔지만, 교육 당국의 첫 지시 사항은 “누구와도 대화하지 마라”였다. 학교와 교육청이 현장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 교사를 불러 모은 것에 불과하다. 누가 울어도 다가가지 못했다. 비참했다.

:사건 초반에 단원고 교사는 사진을 통해 시신을 확인하고 부모님께 알리는 일을 했다. 교사를 행정의 말단으로 취급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행정가는 교사의 마음을 모른다. 담임을 맡으면 ‘내 아이’는 다른 아이와 다르다. 담임이 아니라 동아리 담당 선생님이라도 마찬가지다. 그건 부모에게 아이의 죽음을 확인시키는 일과 같다. 감수성이 예민한 선생님도 있는데, 어떤 분에게 어떤 영향이 갔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교육 당국은 세월호 참사 이후 ‘안전교육 지침 공문’으로 변화를 꾀한다. ‘교과과정에 안전교육 50시간을 추가해라’는 식이다. 뜬금없이 안전교육을 어디서 하나. 내려온 시수를 채우기 위해 학생을 쳐다보는 게 아니라 컴퓨터만 본다.

:교육청은 ‘매뉴얼과 공문을 짜서 학교에 내려보냈다’는 식으로 책임을 회피한다. 어느 교과목에 ‘안전’을 추가해야 할지 생각하느라 머리가 아프다. 결국 체육시간에 뜀틀을 할 때 ‘안전교육’을 추가하는 식이다.

:경기도에서는 ‘나침반 5분 안전교육’을 수립해 매일 5분씩 안전에 대해 상황별 지식을 전달하고 대처법을 소개한다. 따로 안전교육 시간을 빼는 게 아니라 교과 수업 중에 진행한다. 체험학습 때는 안전요원 한 명이 무조건 따라가도록 지침을 내렸다. 하지만 안전요원 인력을 제공받지는 못한다. 소방서와 보건소에 문의했지만 교육청과 협약이 안 된 상황이었다. 결국 학부모가 동행했다. 한 번에 100명 넘게 갈 수 없도록 만든 지침을 지키기 위해서는 시간차를 두고 조금씩 떨어져서 이동한다. 주먹구구식이다.

학내에서 ‘잊지 말자’는 분위기는 있는지?

:교사가 되자마자 교사의 민낯을 보았다. 무력감이었다. 학교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어서 광화문 지킴이를 자청했다. 하지만 1주기가 다가오는 만큼 선생님들이 모여서 무언가를 해보자고 한다. 개학 후 일주일에 한 번 도덕 시간에는 학생들이 봐도 거부감이 없을 추모 영상을 찾아서 함께 보고, ‘노란 리본’의 의미를 공부한다. 학생들은 “왜 죽었는데 기다려요?” 질문한다. 그 물음에 대해 함께 이야기해본다. 그때 교사로서 자신감을 가졌다. 수업을 하면서야 선생님으로서 정체성을 찾아가게 되었다.

:안산 지역 학생들은 여전히 괜찮지 않다. 슬픔을 받아들이면서 회복해야 하는데, 이 과정 자체가 없었다. 고등학생은 너무 바쁘다. 생활기록부 관리, 대외 활동, 봉사 활동 같은 걸 하느라 쫓기면서 자신의 상처를 돌아볼 기회는 있었을까. 언젠가 상처가 되돌아올 텐데 어떤 후유증을 남길지 걱정된다.

:케네디 대통령이 죽었을 때 시 차원의 추모 활동 덕분에 회복이 빨랐다고 하더라. 안산은 학생들도, 교사들도 그럴 기회가 없었다. 교사 입장에서 보면, 단체를 만들어 뭔가 할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든다. 교사들이 나서서 가족의 원망도 듣고, 유가족 대신 영정사진을 들고 청와대 앞에서 한뎃잠도 자고…. 지금은 안산 당국의 ‘횡포’가 전보다 더 심한 것 같다. 시나 교육청이 나서서 추모하는 게 당연한데, 이상하게도 용기를 내야만 추모를 할 수 있는 분위기다.

:개학을 앞두고, 학교로 돌아가려니 마음이 불편했다. 일종의 책임감이 생긴 거다. 교사라는 이름을 걸고 ‘세월호를 기억하겠습니다’라는 피켓을 만들어 1인 시위를 했다. 일주일 전에는 미술 수업 시간에 노란 리본을 만들 수 있도록 재료 신청을 받았는데, 전국 각지에서 500 세트(세트당 40개)를 주문했다. ‘교사’로서 사회적 책임을 느낀다. 교사라는 이름이 왜 이렇게 무거울까, 교사로서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정체성이 생겼다. 교사로서 이 의문을 해결해 나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기자명 송지혜 기자 다른기사 보기 song@sisain.co.kr
저작권자 © 시사IN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