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은 외신 기자들에게도 만만치 않았다. 수많은 피해자 가족과 한국 공무원, 기자들로 북적였다. 고성과 울음소리가 난무했다. 카메라만 들면 잡아채거나 촬영을 막아 몸싸움을 벌이기도 했다. 한 미국 기자는 당시의 고충을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현장에 늦게 도착했다. 아는 영국 기자가 있어서 다가갔더니 손으로 내 얼굴을 밀었다. 왜 그러느냐고 물었더니, ‘사람들에게 공격을 많이 당해서 반사적으로 손이 나갔다’고 사과했다.”
실제로 외신들은 세월호 참사와 수습 기간 내내 한국 정부의 부실 대응을 국내 언론보다 훨씬 강한 어조로 보도했다. 영국 일간지 〈가디언〉은 “서방국가에서라면, 국가 지도자가 (세월호 사건 같은) 국가적 비극에 이토록 늑장 대응을 하고도 지지도와 자리를 온전히 보전하는 경우가 절대 있을 수 없다”라고 질타했다(2014년 4월21일). 프랑스 일간지 〈르몽드〉도 “시민 보호를 최우선의 임무로 삼아야 하는 행정부와 관리 능력이 침몰한 것”라고 논평했다(2014년 4월23일). 영국 BBC 방송은 “가족 수십명이 거대한 경찰 차단선을 뚫고자 하는 시도에서 슬픔과 분노 그리고 절망의 감정들이 느껴졌다”라고 보도했다. 알자지라 카타르 본사 관계자는 “전 세계 언론이 구조 작업을 주목하면서 한국 정부의 무능함에 탄식했다”라고 말했다.
외신들은 지난해 4월 이후에도 한국 언론보다 더 적극적으로 세월호 참사 보도를 이어갔다. 일본 후지TV 시사 프로그램 〈미스터 선데이〉는 지난해 9월21일, 세월호 침몰 순간의 선내 영상 11개와 사진 275장, 72인의 증언 등을 바탕으로 당시 상황을 1시간에 걸쳐 재현하는 다큐멘터리를 방송했다. 이 프로그램에는 단원고 학생도 다수 등장해 세세하게 증언했다.
새로 부임한 ‘산케이’ 지국장은 기자증 못 받아
일본 〈산케이 신문〉은 세월호 참사 당시 ‘박근혜 대통령의 7시간 행적’에 대한 의혹을 제기했다. 〈조선일보〉 칼럼과 김기춘 청와대 비서실장의 발언을 바탕으로 한 보도였지만, 그 결과는 외신 기자에 대한 전무후무한 정부 측의 소송 제기였다. 검찰이 〈산케이 신문〉 서울지국장인 가토 다쓰야 기자를 박근혜 대통령 명예훼손 혐의로 수사하면서 외신들의 분위기는 전반적으로 급격히 냉각되었다.
외신 기자들은 허심탄회하게 세월호 취재기를 털어놓았지만 공통적으로 머뭇거리는 부분이 있었다. ‘당신이 근무하는 언론사와 실명을 밝혀도 되느냐’는 질문에서다. 그들은 한결같이 “한국 정부에 찍히고 싶지 않다”라고 답했다.
세월호 참사 취재에서 외신 기자들이 겪은 또 다른 고충은 ‘여론의 격한 양분화’였다. 주재 기자들은 보통 해당 국가의 유수 언론을 통해 기본적 ‘팩트’를 확인하고 추가 취재에 나선다. 그러나 한국처럼 여론이 양분되어 있는 경우 사실관계 확인은 물론 ‘일반적 여론의 추이’에 대해서도 서술하기가 쉽지 않다. 이런 고충이 세월호 사건에서는 극에 달했다는 게 외신 기자들의 중론이다.
한 미국 기자는 세월호 사건을 계기로 한국 사회의 분열상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고 했다. “수많은 어린 학생들이 비극적으로 희생된 사건인데도, 보수·진보가 격렬하게 다투며 상반된 의견을 쏟아냈다. 어느 의견을 ‘한국의 여론’이라고 해야 할지 확신할 수 없었다.” 또 다른 기자는 “보수 쪽의 의견을 보도하면 그다음부터는 진보 측을 취재하기 힘들었다. 진보 측에 힘을 실어주는 기사를 쓰고 나면 보수 측의 취재가 어려워졌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외신 기자 대다수는 한국이 여전히 ‘뉴스 메이커’이며 세월호 취재 역시 현재진행형이라고 말한다. 미국 언론사의 한 특파원은 기자인 동시에 부모로서 세월호의 진실을 끝까지 ‘팔로(follow)’하겠다고 말했다. “한국 사람에게만 세월호의 진실을 알 권리가 있는 것이 아니다. 미국뿐 아니라 세계의 모든 사람들이, 희생된 단원고 학생들의 부모와 같은 심정으로 진실을 알고 싶어 한다.”
세월호 참사가 터진 지난해 4월16일부터 지금까지의 1년은 한국의 외신 기자들에게도 고통과 숙고의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