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기 위해 망각하고자 하는 사람들의 지나간 아우성을 다시 확인하는 작업은 힘겨웠다. 분석을 진행하면서, 잊었던 기억 두 가지가 자연스레 떠올랐다. 첫째는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였다. 백화점의 갑작스러운 붕괴도 충격적이었지만, 사고 후 재난 대처 시스템이 부재했던 것도 공분을 불러일으켰다. “이래서 우리는 여전히 후진국이다” “이건 국가가 아니다.” 이구동성의 목소리는 정치 노선을 가리지 않았다. 분노의 저변에 더 나은 국가를 만들 수 있다는 믿음을 공유했다.

둘째는 2002년 월드컵 때다. 언론과 국민은 외국인 눈에 부끄럽지 않은 질서의식을 보여주고자 했다. 선진 국가의 시민성이 질서로만 규정되지는 않겠지만, 더 나은 국민이 되고자 하는 욕망이 충만했던 것은 분명하다. 국가적 자부심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새로운 공동체를 향한 에너지와 연대감이 분출했다.

외환위기 이후 공포와 불안이 ‘더 나아지는 국가’라는 믿음에 그림자를 드리웠고, 물질은 윤택해져도 일상은 더 힘들어졌다. 사람을 힘들게 하는 구조는 따로 있는데, 엉뚱하게도 눈앞에서 힘들다는 사실을 확인시켜주는 사람에게 짜증을 낸다. 특히 시스템이 스스로의 작동 원리에 결함이 있음을 인정하길 거부할 때, 그 안에서 사람들이 숙명처럼 삐걱거리며 살 수밖에 없을 때 구성원끼리의 폭력성은 배가된다.
 

ⓒ연합뉴스1995년 6월29일 발생한 서울 서초동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 현장.

1월에 타계한 독일 사회학자 울리히 벡은 국가의 ‘조직화된 무책임(organized irres-ponsibility)’이라는 새로운 경향을 지적한다. 새로 나온 과학기술과 지식의 복잡성이 판단을 어렵게 하고, 권력은 자기에게 유리한 지식을 입맛대로 골라 연결해 책임을 비켜 간다. 그러나 세월호 사고에서 관찰되는 무책임은 서구의 그것과 또 다르다. 감히 정부를 비판하는 ‘선동’을 하지 말라고 겁주면서, 상징적 차원에서마저 국가의 책임을 거부한다.

온라인의 세월호 담론 추이는, 하나의 불행한 해상사고가 국가에 대한 불신과 구성원 간의 갈등으로 환원되는 궤적을 보여준다. ‘확대’가 아닌 ‘환원’이라는 표현을 쓴 이유는, 과거와 달리 시스템 비판을 통해 활성화되는 발전적인 담론이 관찰되지 않아서다.

세월호 사고 이후 국가의 역할에 대한 의문이 급증했지만, 그런 국가의 ‘국민’으로 공론장에서 어떤 문제 제기를 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논의가 빠져 있다. 대다수 국민은 유가족이 겪게 된 고통에 대해 단지 ‘가족’이라는 경험적 공통분모로부터 우울한 동병상련을 느낄 뿐이다. “국가가 내게 해준 게 뭐 있어?”라는 질문은 “내 돈이나 건드리지 마!”라는 외마디로 퇴행한다.

‘구출’해야 할 공공 의식의 개념과 원칙

일부 세력의 정치 공세와 정부의 고압적 대응이 여론 변화 궤적에 한몫을 했지만, 그게 다는 아니다. 사회적 불행에 대한 공적인 문제 제기를 온전히 공적인 이슈(public issue)로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 누적된 불신이 바탕에 깔렸다. 보통 사람의 관점에서는 정부도 야권도 유가족도 모두 공동체의 불행한 사건으로부터 자신의 권력과 가족의 이익을 극대화하려고 게임을 하는 것으로 비친다. 그래서 정부의 대응은 책임 회피로, 야권의 추궁은 정치 공세로, 유가족의 항변은 특혜의 극대화 노력으로 받아들여버린다. 이런 왜곡된 소통 환경에서 공적인 문제 제기의 내용과 함의 자체에 대해 숙고하는 사람은 갈수록 드물어진다.

발전하는 공동체에 대한 믿음이 해체된 21세기 대한민국에서, 공적인 이슈는 단지 가족적이고 개인적인 이해관계로 파편화되어간다. 사회적 행위에 전제되어야 할 퍼블릭 마인드(public mind·공공 의식)의 개념과 원칙을 구출해내지 않으면, 한국 사회가 이대로 더 깊이 가라앉게 되지 않을까 우려스럽다.

기자명 김도훈 (아르스 프락시아 대표)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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