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철소를 성공시키지 못하면 우리는 모두 죽음을 각오해야 한다. 실패하면 현장 사무소에서 나가 바로 우향우해서 다 같이 영일만 바다에 빠져 죽자.”

포스코 설립자인 고 박태준 회장은 1968년 포항 영일만의 바닷가 황무지에 제철소를 세우던 당시 죽을 각오를 피력했다. 그는 국내외 거의 모든 관계자에게서 비웃음을 사고 있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사실상 농업국가에다 돈도 기술도 자원도 없는 한국에서 당시 최첨단 산업 중 하나인 철강업을 키우겠다고 설쳤으니 말이다. 심지어 후진국에 개발자금을 대주는 세계은행이 ‘저개발국인 한국은 철강산업보다 경공업과 농업을 키우라’고 권고할 정도였다. 국내 여론도 ‘철강은 그냥 수입해서 쓰자’는 쪽이었다. 이때 박태준이 쓰러졌다면 초국적 철강기업 포스코는 존재할 수 없었을 터이다. 포스코가 저렴하게 공급한 양질의 철강으로 국제경쟁력을 강화한 자동차·조선·가전 산업도 어떻게 되었을지 모른다. 다행히 박태준과 임직원들은 포기하지 않았다. 5년여 뒤인 1973년 6월 포항의 1호 고로는 쇳물을 쏟아낸다. 이후 포스코는 승승장구했다. 창업 30주년인 1998년에는 조강 생산 기준 세계 1위인 글로벌 기업으로 등극했다.
 

ⓒPOSCO 제공1970년 4월1일 포항제철 설비 착공식에 박태준, 박정희, 김학렬(당시 부총리·왼쪽부터)이 참석했다.


박태준은 본능적으로 ‘기업의 복잡한 사회적 지위’를 감지했던 듯하다. 포스코를 공사(公社)가 아닌 주식회사로 설립한 것을 보면 그렇다. 포스코의 공식 회사명은 ‘포항종합제철주식회사’였다. 당시의 ‘공사(公社)’는 정부 부처와 다름없었다. 이런 측면에서 포스코를 주식회사 형태로 출범시킨 것은 정치권력의 경영 개입을 일정 정도 차단하겠다는 일종의 신호였다. 정부가 절대적인 대주주였지만(포스코는 대일청구권 자금으로 설립됐다), 주식회사라면 경영 자율성을 어느 정도라도 보장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기업은 이해관계자들이 자신의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격렬하게 충돌하는 투쟁의 공간이다. 예컨대 노동자는 높은 임금과 안정된 일자리를 원한다. 주주는 기업에 투자한 자금을 가급적 단기간 내에 큰 수익을 붙여서 돌려받고 싶어 한다. 그래서 연구개발 등 수익으로 돌아오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는 대규모 투자를 꺼리는 경향이 있다. 소비자들은 해당 기업이 질 높은 제품을 싼 가격에 많이 공급해주기를 원한다. 포스코 같은 철강기업의 소비자는 자동차·조선·가전 업체 등이다. 정치권력은 자신들의 임기 내에 기업이 사업을 크게 확장해서 고용과 경기를 활성화시키기 바란다. 그래야 정권 지지율을 높일 수 있기 때문이다. 해당 기업의 보수 높은 고위직에 ‘공신’을 박거나 각종 거래를 이용해 뒷돈을 챙기기도 한다.

 

 


이 같은 이해관계자들의 틈바구니 속에서 경영자는 중심을 잡아야 한다. 주주에게 맹종해 배당금을 대폭 올리면 연구개발 등 기업의 장기적 발전에 필요한 투자에 차질을 빚을 수 있다. 정부나 소비자(포스코에게는 예컨대 조선업체)의 요구에 따라 제품(철강) 공급을 대폭 증가시켰는데(설비를 증설했는데), 갑자기 불황이 닥쳐서 설비투자 비용을 회수하지 못하면 재무구조만 크게 악화된다. 경영자가 책임져야 하는 대상은 이해관계자들이 아니라 해당 기업 법인 그 자체다. 기업의 장기적 발전과 번영이라는 목표를 중심으로 이해관계자들의 어떤 요구는 수용하고 다른 요구는 뿌리쳐야 하는 존재가 경영자다.

경영자로서 박태준의 성공은 정부 등 이해관계자로부터 비교적 자율적인 자세를 유지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박태준이 1968년부터 1992년까지 무려 24년 동안 최고경영자 자리를 유지했다는 사실 자체가 그의 안정적 지위를 입증해준다. 자리가 보장된 만큼 포스코의 장기 발전 전략을 구상하고 실행할 수 있었다.

민영화 이후 크게 훼손된 포스코의 경영 자율성

이랬던 포스코가 최근 절체절명의 위기에 직면했다. 손익구조를 나타내는 각종 재무지표가 창사 이래 최악의 수준으로 떨어졌다. 국제 신용등급이 하락해 자금 조달에 훨씬 많은 비용이 필요하게 되었다. 이는 포스코의 경영 자율성이 민영화(2000년) 이후 오히려 크게 훼손된 것과 무관하지 않다. 박태준 이후의 포스코 CEO 중에는 임기를 채운 사람이 한 명도 없다. 경영 안정성도 따라서 무너졌다.

 

 

 

 


외환위기 직전인 1996년까지만 해도 포스코의 사실상 ‘오너(owner)’는 정부였다. 정부와 국책 금융기관인 산업은행의 지분이 34%에 달했다. ‘오너’는 책임을 져야 한다. 그래서 함부로 주물러 망치지도 못한다. 외환위기 직후 집권한 김대중 정부는 포스코, KT 등 당시 주요 공기업의 민영화를 개시한다. 매각대금으로 외채를 갚아야 했고, 한국 정부가 본격적 시장개혁에 들어갔다는 점을 해외에 과시할 필요도 있었다. 당시 포스코는 이미 조강 생산 기준 세계 1위에 영업이익 1조원을 넘긴 알짜 기업이었다. 모두가 군침을 삼키고 있었다. 그래서 민영화의 방법이 논란거리로 떠오른다. 방법은 두 가지였다. 첫째는 정부 지분을 통째로 재벌기업에 넘기는 것이다. 이 경우, 재벌이 오너로서 포스코를 지배하게 된다. 둘째는, 포스코를 ‘오너 없는 기업’으로 만드는 것이다. 그 누구도 포스코를 지배할 만큼의 주식을 갖지 못하게 하면 된다. 두 번째 방안이 채택되었다. 정부 지분을 팔되, 특정 개인이나 기관이 보유할 수 있는 지분을 3% 이하로 제한했다. 이른바 ‘소유 분산’이다.

이론적으로는 포스코 같은 ‘오너 없는 기업’이야말로 이상적인 지배구조를 갖출 수 있다. 이른바 ‘소유와 경영의 분리’다. 3% 이하 지분의 수많은 소액주주들이 자신들의 이익을 가장 잘 보장할 전문 경영인을 CEO로 선출해서 기업 경영을 맡기면 된다. 이 전문 경영인은 가문의 이익에 휘둘리는 재벌 오너와는 달리 기업의 진정한 주인인 주주들의 권리를 잘 대변해줄 것이다. 다만 전문 경영인도 사람이므로 기업 운영을 통해 자기 욕심을 채우려 들지도 모른다. 이를 차단하기 위해 해당 기업 밖에서 활동해온 각종 전문가들을 이사회에 들여보낸다(사외이사). 이사회의 의사 결정은 다수결 원칙에 따른다. 그러므로 사외이사가 상임이사(CEO를 포함한 기업 내 임원으로 실질적 경영자)보다 많아야 한다. 이사회 의장도 사외이사가 맡는다. 이렇게 되면 사외이사들이 경영진을 효율적으로 견제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실제는 이론과 다르다. 오너와 달리 전문 경영인은 해당 기업의 장기적 존속과 번영에 사활을 걸고 매달릴 필요가 없다. 높은 보수와 권력을 가급적 오래 누린다면 좋겠지만, 수년 동안만 유지할 수 있어도 크게 나쁘지 않다.

이처럼 ‘오너가 없는’ 빈 공간으로 슬며시 잠입한 존재가 있었다. 바로 정치권력이다. 정부가 지배주주라면 CEO를 교체하는 것 역시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민영화 이후 포스코에 대한 정부 지분은 0%다. 정부에는 포스코의 경영에 영향을 미칠 권한이 조금도 없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정부가 포스코 CEO를 선택한다는 것이 공공연한 사실로 통한다. 박태준 회장 이후 정권의 교체는 포스코 경영진의 교체를 의미했다. 물론 지금까지 어떤 정부기관도 포스코 CEO의 사퇴를 압박했다고 자인한 적이 없다. 그러나 새 정권의 검찰은 CEO의 부정비리 수사에 나서고 국세청은 세무조사를 벌인다. 박종훈 서강대 교수는 최근 논문 ‘민영화 기업의 장기 경영과 CEO 승계:포스코 CEO 승계제도를 중심으로’에서 “포스코 관계자는 물론 상당수의 사회 인사들은 ‘정부가 민영화 기업의 경영자 교체에 영향을 미친다’고 보고 있다”라고 썼다. 포스코에 한국 정부는 ‘실재(實在)하지 않는 실재(實在)’다. 영향을 미치지만 그 결과에 대한 책임은 지지 않는다.

 

 

 

 

 

ⓒ연합뉴스3월13일 포스코 사옥 앞에서 포스코 사내하청지회 조합원들이 소액주주의 주총 참여를 요구했다.

 


이로 인한 CEO 지위의 추락(경영 자율성의 상실)은 기업에 치명적이다. CEO들은 자리를 유지하려면 정치권력의 눈치를 봐야 한다는 것을 체감한다. 정권이 교체되면 자신도 밀려날 것이기 때문에 장기적 전망에 기반한 경영을 포기할 수밖에 없다. 이런 CEO들이 이해관계자들의 요구에 속절없이 떠밀리다 보면 기업 자체의 이익은 다음다음 순위로 넘어간다.

대표적 사례로 이명박 정부가 출범한 2008년 이후 포스코가 감행한 ‘자산 확대’를 들 수 있을 것이다. 2007년 36조3000억원이었던 포스코의 총자산은 두 차례 보수 정권을 거치고 있는 2014년 말 현재 85조3000억원으로 늘었다(위 표 참조). 7년 사이에 2.3배로 확대된 것이다. 여기서 ‘자산’은 ‘재산’과 다른 개념이다. 기업은 자사 소유의 밑천(자본금)과 부채를 동원해 설비 증설, 인수합병, 증권 매입 등 각종 용도에 투자한다. 이 같은 투자의 합계를 자산이라고 부른다. 그러므로 자산이 증가하면 부채 역시 늘어나는 경향이 있다. 포스코의 2014년 말 총부채는 2007년(11조1000억원)의 3.6배인 40조원이다. 7년 사이에 29조원 정도 증가했다.

7년 동안 총부채 3.6배 증가, 영업이익률 급락

이처럼 총자산으로 표시된 각종 투자들이 괜찮은 수익을 거두면 부채 상환에도 문제가 없다. 해당 기업은 그럭저럭 순조롭게 경영되는 중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지난 몇 년 동안 포스코의 경영 상황은 그렇지 않았다. 총자산이 2.3배, 총부채가 3.6배로 증가한 7년 사이에 매출액은 2배(31조6000억원에서 65조원으로) 정도 증가하는 데 그쳤다. 그러나 정말 심각한 문제는 매출액이 아니라 영업이익(금융거래를 통한 비용이나 수익을 제외한, 순전히 영업만을 통해 거둔 수익)이다. 포스코의 영업이익은 2007년 4조9000억원에서 2014년 3조2000억원으로 오히려 1조7000억원 줄었다. 엄청난 돈을 빌려 사업을 확장했는데(자산 확대와 부채 증가), 정작 영업으로 벌어들인 수익은 크게 축소된 것이다.

이에 따라 포스코의 사업 전망과 신용도를 측정하는 각종 재무지표가 극도로 악화되었다. 부채비율은 2007년 44.2%에서 2014년에는 88.3%로 불었다. 영업이익률은 15.5%에서 4.9%로 급락했다. 당기순이익(영업이익에서 금융비용과 법인세 등을 뺀, 기업의 순수한 이익)을 고려하면 사태는 더욱 심각해진다. 부채 증가로 2011년 이후에는 금융비용만 매년 3조원(2007년의 금융비용은 4000억원) 내외를 기록하게 되면서 당기순이익이 대폭 줄어들었다. 특히 기관투자자들이 중시하는 ‘총자산 대비 당기순이익(총자산순이익률)’은 2007년 10.2%에서 2014년에는 0.65%까지 추락했다.

전형적인 경영 실패다. 얼토당토않은 부문에 지나치게 많은 돈을 빌려 투자하는 바람에 재무 상태가 극도로 악화되었다는 의미다. 특히 중국과 인도의 대형 철강기업들이 덤핑에 나서면서 세계시장이 포화상태에 이르렀는데도 포스코는 증설로 생산능력을 확대했다. 자동차·조선 등 철강 수요 업체들의 요구를 대변한 이명박 정부의 증설 압력이 상당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는 가운데 세계 금융위기가 터져 철강 수요가 급락했고, 포스코는 설비투자 증가로 인한 짐을 떠안게 되었다. 포스코가 대대적인 인수합병을 벌인 것도 이명박 정부 들어서다. 포스코 그룹의 계열사는 2007년의 25개사에서 2011년에는 68개사로 늘어났다. 이렇게 인수한 기업 중 상당수가 계속 대규모 적자를 내면서 포스코 그룹의 재무구조를 더욱 악화시키고 있다. 2010년 인수한 성진지오텍(현재 포스코플랜텍)이 대표적인 경우다. 성진지오텍은 2009년 말 당시 부채비율 1614%에 당기순손실이 63억원에 달하는 부실기업이었다. 포스코는 이런 기업의 경영권을 일반적인 수준보다 훨씬 높은 가격으로 매입했다. 그러나 인수 이후에도 성진지오텍의 경영 실적은 계속 악화되어 2014년 말 현재 당기순손실이 2796억원에 이른다.

 

 

 


다른 민간 기업이었다면 사외이사들이나 혹은 주주들이 직접 나서서 최고경영자를 끌어내렸을 것이다. 그러나 포스코는 비교적 잠잠했다. 이론과 달리, 사외이사들은 경영진의 거수기에 불과했다. 경영진이 이사회에 제출하는 안건들은 사실상 100% 통과되었다. 포스코는 윤리적 경영인이며 전문가로 이름 높았던 안철수 당시 ‘안철수연구소’ 소장(현 국회의원)을 사외이사로 영입해서 이사회 의장을 맡겼다. 그러나 포스코 경영진의 터무니없는 증설과 인수합병, 부채 확대는 이사회에서 저지되지 않았다. 주주들의 입을 막은 무기는 배당금이었다. 주주들은 연구개발 같은 장기 투자보다 당장의 고배당을 추구하는 경향이 짙다. 서강대 박종훈 교수는 최근 논문에서 포스코와 현대제철(재벌 대기업으로 국내 2위 철강업체)의 배당비율 및 연구개발비를 비교한 뒤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렸다. “(포스코가 현대제철보다) 순이익 대비 높은 배당금을 지급하는 것으로 나타나며, 지속적으로 연구개발비 비중을 높이는 현대제철과는 대조적으로 민영화 이후 2004년을 제외하고는 계속해서 연구개발비 비중이 감소하는 형태로 의사 결정이 이루어진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기자가 금융감독원 전자공시 시스템에 게재된 포스코와 현대제철의 사업보고서를 통해 2000년 이후 양 기업의 배당비율(당기순이익 대비 총배당금)을 계산해보니 같은 결론이 나왔다(아래 표 참조). 포스코의 배당비율은 완전히 민영화된 2001년부터 3년 동안 이전 연도(민영화가 개시된 1998~2000년에는 10~12%)의 2배 이상인 20% 초·중반대로 올라갔다가 다시 10%대 중반 수준으로 떨어진다. 그러나 포스코의 재무지표들이 크게 악화되기 시작한 2008년 이후에 오히려 상승 경향을 나타내더니 2013년에는 46.7%를 기록한다. 당기순이익의 절반 가까이를 배당금으로 소진한 것이다. 이는 당기순이익이 급락하는 가운데서도 총배당금은 6000억~7000억원 수준으로 유지하려 했기 때문이다. 그래야 경영실적 악화에 대한 주주들의 반발을 차단할 수 있다. 이에 비해 재벌 계열사인 현대제철의 배당비율은, 2000년을 제외하면 포스코의 4분의 1에서 5분의 1에 불과했다.

정치권력에 취약한 CEO는 주주에게도 취약할 수밖에 없다. 조선·자동차 등 철강 수요기업의 요구에 굴복해 전망 없는 시설 투자로 부담을 가중시키기도 한다. 이렇게 정치권력과 주주가 거침없이 ‘자기 이익’을 추구하고 사외이사들은 적잖은 수고비와 명예를 챙기며, CEO는 자리보전에 급급해하는 가운데 정작 포스코 법인은 추락을 거듭해온 것이다.

 

 

기자명 이종태 기자 다른기사 보기 peeker@sisain.co.kr
저작권자 © 시사IN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