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일자리 독점하지 말아주세요.’ 2월26일 오후 2시 서울 정동 민주노총 앞. 대한민국청년대학생연합 회원 10여 명이 이런 피켓을 들고 기자회견을 열었다. 청년 취업난의 원인은 경직된 노동시장이며, 그 주범인 정규직 ‘철밥통’을 개혁해야 청년 일자리가 생긴다는 게 이들의 주장이다.

이 단체의 대표인 김동근씨(25)의 이력이 예사롭지 않다. 그는 양성평등연대 대표를 겸하고 있다. 양성평등연대는 남성이 역차별당한다고 주장하던 성재기씨가 2008년 설립한 남성연대의 후신이다. 성재기씨는 2013년 7월 서울 마포대교에서 투신 퍼포먼스를 벌이다 사망했다. 김동근 대표는 성재기씨의 삶을 다룬 평전 〈대한민국 최초의 남성인권운동가 성재기〉를 썼다.

1990년 경기도 의정부에서 태어나 경희대 포스트모던음악학과에 2008년 입학한 김씨는 원래 작곡가 지망생이었다. SM, YG, JYP 같은 대형 기획사를 운영하고 싶었다. 하지만 전역 후 사회운동을 하기로 결심했다. 김씨는 어떤 사회문제를 해결할 것인지 고민하다 성재기 남성연대 대표를 알게 됐다. “그의 생각을 이해하기까지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한국 여성계에서 정치적인 힘을 가지고, 자신들의 기득권을 유지하려는 세력에 의한 국가적 피해는 상상을 초월했다.”(책 머리말, 6쪽)
 

ⓒ연합뉴스2013년 6월 성재기 당시 남성연대 대표(맨 왼쪽)가 여성가족부 앞에서 ‘여성부 해체’를 주장했다.


성재기식 역차별론은 아래와 같은 주장을 설파한다. 여성은 각종 할당제, 여성 전용 시설, 생리휴가 등의 제도를 통해 과도한 특혜와 배려를 누린다. 반면 군 복무와 같은 의무는 다하지 않는다. 남성에게 유일한 보상인 군 가산점제는 폐지됐다. 사정이 이런데도 여성가족부와 지자체들은 여성 우대 정책을 쏟아내며 세금을 낭비한다. 성재기 대표는 군 가산점 폐지를 계기로 ‘남성인권운동’에 뛰어들었다. 정부 지원금을 받으려다 여성가족부의 관리감독을 받아야 한다는 얘기에 포기한 적도 있다.

김동근씨는 친구 1명과 함께 “유방을 찾아온 한신의 심정으로”(책 114쪽) 남성연대 사무실을 찾아가 성 대표를 만났다. “한 1~2년 쓰레기 치우고 설거지하면서 이등병 생활을 할 각오로, 이야기해보고 괜찮다 싶으면 바로 음악을 그만둘 생각으로” 갔다. 성재기 대표는 그들을 반갑게 맞았다. 데이트·결혼 비용, 군 복무 보상 등 남성 역차별에 관한 긴 이야기를 나눴다. 이후 김씨는 남성연대에서 활동했다.

여성부 홈페이지 접속 폭주해 다운된 ‘그날’

단체는 자금난에 시달렸다. 파산이 코앞이었다. 2013년 7월25일. 성 대표는 남성연대 홈페이지에 ‘성재기, 내일 한강에 투신하겠습니다’라는 제목의 글을 올린다. “존경하는 시민 여러분. 이제 저는 한강으로 투신하려 합니다. 시민 여러분의 십시일반으로 저희에게 1억을 빌려주십시오. 만약 제가 무사하다면, 다시 얻은 목숨으로 죽을힘을 다해보겠습니다. 그리고 빌려주신 돈은 반드시 갚겠습니다. 부디 엎드려 간청합니다.”

 

 

 

ⓒ연합뉴스민주노총 앞에서 ‘정규직이 일자리를 독점한다’는 기자회견을 한 대한민국청년대학생연합. 이 단체의 김동근 대표는 양성평등연대 대표를 겸하고 있다.

 


다음 날인 7월26일, 그는 동료들이 찍는 카메라를 향해 “감사합니다”라는 말을 남긴 채 마포대교 위에서 한강으로 뛰어내렸다. 사설 구조요원을 섭외해둔 일종의 ‘기획 퍼포먼스’였다. 남성연대는 그날 저녁 지지자들과 ‘불고기 파티’를 열 예정이었다. 하지만 성재기 대표는 강물에 빠진 후 돌아오지 못했다. 투신 나흘째인 7월29일 시신으로 발견됐다. 어처구니없는 죽음이었다. 여성가족부 홈페이지는 접속자가 폭주해 다운됐다.

김씨가 본 성재기 대표는 ‘성역화된 여성계에 처음으로 당당히 문제를 제기했던 사람’이자 ‘자신이 그토록 대변하려던 남성들에게조차 손가락질을 받으며 세상의 조롱과 멸시에 맞서야 했던 사람’이었다. “신념을 위해 목숨을 바친 그의 삶은 결코 헛된 것이 아니었음을, 훗날 우리는 분명히 알게 될 것이다.”(책 234쪽) 성재기 대표의 삶과 죽음은, 어떤 청년들에게는 그렇게 숭고한 영웅 서사가 되었다.

양성평등연대 김동근 대표는 〈시사IN〉과의 이메일 인터뷰에서 “결혼 비용, 사회적 책임, 군복무, 산업재해 비율, 그 외 일상 영역의 작은 부분까지 남성이 부담하는 책임과 의무가 여성보다 많은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런데도 유리천장이나 임금 격차가 없다면 그게 더 부당하지 않을까?”라고 말했다. “여성운동계는 임금, 취업 등 권리를 주장할 땐 성 평등을 외치지만 책임과 의무를 져야 할 땐 침묵하거나 남성을 앞세운다.”

특정 세대·특정 성향 남성들에게 ‘성재기 영웅 서사’의 위력은 상상 이상이다. 지난해 12월 황선·신은미씨의 토크 콘서트 현장에서 인화물질을 터뜨린 오민준군(19·가명)도 ‘성재기 키드’다. 오군과 반에서 가장 친했던 친구 이 아무개군은 “(오군이) 성재기가 누군지 아느냐고 물었던 기억이 난다”라고 말했다.

오군은 현실 세계보다 온라인에 소속감을 훨씬 강하게 느꼈다. 오군이 온라인 커뮤니티에 남긴 글을 보면 ‘김치년’ ‘삼일한’ ‘빌어먹을 페미니즘’ ‘보빨’ 등 여성 혐오 표현이 여럿 등장한다. 오군은 ‘명불허전 김치년’이라는 제목의 글에서 “빌어먹을 페미니즘 어쩌다 이 지경까지 간 건지”라고 쓴다. 2013년 5월에는 “여성부 같은 곳에 가끔 택배로 폭발물을 보내기도 하고 정의의 테러리즘을 시행하는 폭탄마가 되고 싶다”라고 썼다. 성재기 대표의 한강 투신 당시에는 “너무 안타깝다. 얼마나 답답하면 저러겠냐” “진짜 존경하던 사람이라 그런지 너무 심한 드립은 좀 슬퍼진다”라고 남기는 등 강하게 감정이입했다.

 

 

 

 

IS에 가담한 10대는 트위터에 ‘안티 페미니즘’ 메시지를 남겼다.

 


‘남성이 역차별당한다’는 정서나 페미니즘에 대한 반감은 10대·20대 남성 사이에서 적잖은 영향력을 확보했다. IS(이슬람국가)에 가담한 김진수군(17·가명)은 중학교에 입학하자마자 자퇴했다. 친구도 없었고 바깥출입도 드물었던 김군이 IS에 들어가고 싶다는 의사 외에 세상에 남긴 유일한 메시지는 안티 페미니즘이었다. “the current era is the era that male are being discriminated against and i hate feminist So I like the isis(이 시대는 남성이 역차별을 받는 시대이고 나는 페미니스트를 싫어한다. 그래서 IS를 좋아한다).”

동시 접속자가 2만명 안팎에 이르는 대형 커뮤니티 사이트 ‘일간 베스트 저장소(일베)’는 여성 혐오 담론을 생산하는 본진이다(〈시사IN〉 제367호 ‘이제 국가 앞에 당당히 선 일베의 청년들’ 기사 참조). 서울대 사회학과에서 일베 연구로 석사학위를 받은 김학준씨는 연구 과정에서 일베 이용자 10명과 심층 인터뷰를 했다. 김학준씨 논문에 나오는, 일베 이용자가 말하는 여성관을 날것 그대로 소개한다.

군 전역 직후 첫 연애를 한 20대 중반의 대학생 A씨는 이렇게 회상한다. “나이트클럽 가서 만났는데, 걔(전 여자친구)가 남자의 재력을 많이 봤어요. 제가 복학 준비하려고 옷 장사를 했는데, 그 돈 그냥 홀라당 걔한테 썼죠. 한 달 남짓 잘 만나다가, 제 수중에 돈이 얼마 없잖아요. 아, 나는 사실 좀 재력 있는 오빠가 좋다는 거야. 동갑내기였거든요. 그러면서 저랑 헤어지고 결국 차 있는 놈을 사귀더라고요.”

A씨는 자신이 ‘돈이 없어서’ 여자친구를 ‘차 있는 놈’에게 빼앗겼다고 생각한다. “아 진짜, X 같아서 성공해야겠다 그런 생각도 들고, 결정적으로 ‘X혐’(여성 혐오의 일베식 속어)이 그때 생겼죠. 아 진짜, 여자들 왜 이렇게 세상 남자들을 돈으로만 볼까. 나는 첫 연애니까 잘해주려고 좀 순수한 마음으로 했는데, 거기서 상처를 받은 거죠.”

생활 세계에서 느끼는 불만은 ‘사회 구조적 분노’로 이어진다. 이때 여성가족부(여성부)는 맞춤한 분노의 대상이다. 김학준씨의 인터뷰에 응한 일베 이용자들은 “모든 여성을 혐오하지는 않는다”라고 강조하면서도 여성부에 대해서는 예외 없이 적대적인 인식을 보인다. “여성부 같은 쓸데없는 부서가 국민 혈세 낭비해가면서 지네들 명품백 사고 여성을 위한 쓸모없는 정책들을 많이 내놓고 있다는 거죠. 여성부의 만행이라고 인터넷에 치면 쫘르륵 나올 텐데, 아마 많이 보실 거예요.” ‘여성부 만행’ 괴담은 일베를 넘어 한국 온라인 공간에서 오랫동안 살아남은 생명력 질긴 ‘떡밥’이다.

“한국 페미니즘은 이상하다”라는 비난은 실명으로 글을 싣는 매체에도 등장한다. 팝칼럼니스트 김태훈씨는 패션지 〈그라치아〉에 실은 칼럼 ‘IS보다 무뇌아적 페미니즘이 더 위험해요’에서 이렇게 썼다. “현재의 페미니즘은 뭔가 이상하다. 아니, 무뇌아적인 남성들보다 더 무뇌아적이다. 남성을 공격해 현재의 위치에서 끌어내리면 그 자리를 여성이 차지할 거라고 생각한다. 군 가산점제에 반대하는 여성들의 이데올로기가 그렇다.” 이 칼럼이 알려진 이후 트위터 등 SNS에서는 거센 반발이 일었고, 김태훈씨는 매년 맡아오던 아카데미상 시상식 중계방송 진행자에서 하차했다.

 

 

 

 

ⓒ연합뉴스황선·신은미씨의 토크 콘서트 현장에서 인화물질을 터트린 10대는 성재기씨의 주장에 강하게 공감했다.

 


여성 혐오의 역사는 군 문제를 빼고 논할 수 없다. 네이버는 2월15일부터 웹툰 〈뷰티풀 군바리〉를 정식 연재했다. ‘본격 여자도 군대 가는 만화’를 내건 이 웹툰은 여자도 병역 의무를 져야 한다는 법안이 통과된 가상의 한국 사회를 배경으로 한다.

웹툰에 등장하는 군대에 가게 된 여성은 이제 남북관계 뉴스를 냉정히 받아들이고, 웬만한 군대 용어와 상황에 대해 알게 됐으며, 연예인의 병역 회피를 더는 옹호하지 않는다. 신체검사에서 1급 현역 판정을 받고, 머리카락을 짧게 자르고, 가족·친구와 떨어져야 하는 괴로움을 여성이 겪는다. ‘남자만 당하는 부당함’을 여성이 이해하게 되는 장면에서 독자의 공감을 얻어낸다. 네이버와 같은 접근성 높은 채널에서, 여성 입대를 소재로 젊은 남성의 열광을 이끌어내는 콘텐츠가 정식 연재되는 것은 상징적이다.

자신의 분노를 ‘약자의 저항’으로 정의하는 그들

웹툰에 달린 댓글이 추천을 많이 받으면 ‘베스트 댓글’이 된다. 〈뷰티풀 군바리〉에 달린 베스트 댓글을 훑어보면 독자의 공감이 어느 대목에서 이뤄지고 있는지 금세 드러난다. “남자로서 진짜로 여자가 군대 가길 바라진 않는다. 하지만 적어도 나라 지키는 군인들 노고를 무시하지는 않았으면 좋겠다.”(3화) “군내 부조리까지 상세하게 묘사해주신다면 여자들이 군인의 노고를 업신여기진 않을 거라 생각합니다.”(3화) “모든 여자들의 사고방식이 여성부와 같다고 생각하지 말아주셨으면 해요.”(3화) “군 가산점 폐지 원인은 여성부였습니다.”(2화)

온라인 여성 혐오를 연구해온 윤보라씨(서울대 여성학협동과정 박사과정)는 여성 혐오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과 맥락을 봐야 한다고 지적한다. “남성이 처자식을 먹여 살리는 대신 여성이 출산과 육아·가사를 담당하던 기존의 성 역할이 붕괴됐다. 결혼과 출산을 하지 않는, 과거와 다른 전략을 여성이 추구하면서 나타나는 ‘남성성의 위기’가 본질이다.”

온라인에서 여성 혐오 담론에 공감하는 이들은 자신이 ‘약자를 짓누르는 쾌감’을 추구한다고 느끼지 않는다. 그보다는 ‘이미 여성 상위 시대가 왔는데도, 군 복무와 같은 의무를 남자만 지는 현실’이 부당하다고 느끼는 분노다. 강자의 짓누르기가 아니라 약자의 저항으로 자신의 분노를 정의한다. 부당한 대접을 받는다고 느낄 때, 분노는 에너지를 얻고 공감대는 폭넓게 쌓인다. 목숨까지 ‘희생’한 성재기라는 아이콘은 극단적이어서 더 선명한 사례다.

‘성재기 키즈’의 등장은 몇몇 젊고 모험주의적인 남성의 돌출 사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런 돌출 행동을 생산해내는 바탕 정서는 뿌리가 깊고 공감의 폭이 넓다. 특히 청년 남성들이 제 삶의 전망을 부정적으로 평가할수록 모험주의와 극단주의의 토양은 비옥해진다. 앞으로도 더 많은 ‘성재기 키즈’를 만날 각오를 해야 할지 모른다.

 

기자명 전혜원·천관율 기자 다른기사 보기 woni@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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