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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TX 승무원 해고의 본질은 코레일의 ‘취업 사기’

오랜 기다림은 ‘파기환송’으로 돌아왔다. 1·2심에서 승소한 판결이 대법원에서 뒤집혔다. KTX 해고 승무원들이 직접 고용을 요구하며 싸운 시간이 물거품이 되었다. 각자 1억원 가까운 빚까지 떠안게 됐다.

김은지 기자 smile@sisain.co.kr 2015년 03월 14일 토요일 제39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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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한국 도착했어. 어디야?”

“미안, 회의 중.”

해외 파견 근무를 하다 막 한국에 들어온 남자는 인천공항 텔레비전 뉴스에서 여자친구를 보았다. 서울역 조명탑 30m 부근에서 고공농성을 벌이는 모습이었다. KTX 해고 승무원이었던 그녀가 관련 일을 하는 것은 알았지만 앞장서는 줄은 몰랐다. 고공농성 이야기를 꺼낸 적도 없었다. 먼저 아는 척하면 여자친구가 당황할까 봐 그냥 어디냐고만 묻고 말았다. 회의 중이라고 둘러대며 서둘러 전화를 끊은 오미선 KTX 열차승무지부장(당시 29세)은 그날 참 많이 울었다.

2008년 여름 시작한 고공농성은 KTX 해고 승무원의 마지막 승부수였다. 2006년 해고 이후 점거·삭발·쇠사슬·단식농성 등을 이어왔지만 회사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KTX 승무원들은 한국철도공사(코레일·옛 철도청)의 교육과 감독을 받았지만 소속은 홍익회(퇴직자와 순직자 유가족을 돌보는 목적으로 만든 코레일 유관단체)였다. 코레일은 이들을 직접 고용하지 않은 채 계속해서 계약 회사를 옮기라고만 요구했다. KTX 승무원들은 코레일에 위장도급을 그만두고 직접 고용하라는 주장을 하다 모두 해고되었다.

  <div align = right><font color=blue>ⓒ시사IN 신선영</font></div>오미선 전 KTX 열차승무지부장이 3월5일 자택에서 근무 당시 입었던 유니폼을 살펴보고 있다.  
ⓒ시사IN 신선영
오미선 전 KTX 열차승무지부장이 3월5일 자택에서 근무 당시 입었던 유니폼을 살펴보고 있다.

사실 오씨는 고공농성을 하고 싶지 않았다. 무섭고 힘들 거라는 점을 잘 알았다. 그만큼 절박했기에 지부장인 그녀가 나설 수밖에 없었다. 대신 남자친구에게는 굳이 말하지 않았다. 좀 더 당당했어도 될 텐데 그때는 그러지 못했다고 너털웃음을 짓는 오씨는 그 남자와 결혼해서 지금은 다섯 살, 세 살 된 두 아이의 엄마다.

당시 3주일 가까이 고공농성을 했지만 회사는 끝내 응답이 없었다. 패배감만 안고 땅으로 내려왔다. 오씨 인생에서 가장 힘든 순간으로 남았다. 350여 명이 시작한 농성은 10분의 1가량으로 줄었다. 원래 지부장을 하던 동료조차 미안하다며 떠나갔다. 그 자리를 묵묵히 계속 지키다 보니, ‘철의 노동자’ ‘단결투쟁가’ 같은 민중가요가 낯설고 무서웠던 스물여섯 살 새내기 승무원은 어느새 노조 지부장까지 맡게 되었다.

남은 선택지는 소송이었다. 문제를 법정으로 끌고 가면 시간이 오래 걸린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모두 지친 상태였기에 다른 방법을 찾기 힘들었다. 지나온 850여 일을 마무리 지을 필요가 있었다.

2008년 11월, 마지막까지 남은 해고 승무원 34명이 ‘근로자 지위보전 및 임금지급’ 소장을 냈다. 오씨는 원고 목록 1번에 이름을 올렸다. 2006년 파업 당시부터 서울 용산역사 철도노조 서울본부 사무실 한쪽에서 2년 넘게 하던 합숙 생활도 끝냈다. 각자 일상으로 돌아가 소송을 돕고 재판에 참석하며 결과를 기다리기로 했다.

날짜조차 잊을 수 없다. 2010년 8월26일. 1심은 해고 승무원의 완승이었다. 서울중앙지방법원 민사 41부(부장판사 최승욱)는 해고된 KTX 승무원이 코레일 직원이라고 판결했다. 위장도급을 인정한 것이다. 이들이 속해 있던 홍익회(이후 철도유통으로 변경)가 코레일의 일부 부서라고 판단한 재판부의 근거는 다음과 같다. △코레일이 KTX 승무원 채용에 직접 참여해 수습교육 및 이후 교육을 수시로 했고 △코레일이 우수 승무원을 선발해 해외 연수를 보냈으며 △코레일 소속 열차팀장이 승무원 업무평가를 해 그 평가가 승무원 인센티브에 반영되었고 △코레일이 승무원의 4대 보험료를 직접 부담하면서 피복비 지급은 물론 새해 선물을 주기도 했다는 등이다.

재판부는 또 코레일이 승무원별로 그동안 지급하지 않은 30개월치 임금을 주고, 복직할 때까지 월급 150만~180만원을 지급하라고 판시했다. 당시 임신 5개월이었던 오씨는 얼떨떨한 기분으로 법정을 빠져나와서야 판결을 실감했다. 마른 줄 알았던 눈물이 감격 속에서 터져 나왔다. 무엇보다 그간의 행동이 옳았다는 판단을 받았다는 사실이 기뻤다.

승무원 해고의 본질은 코레일의 ‘취업 사기’


파업은 외로운 싸움이었다. ‘남들 힘들게 노력해서 되는 공무원을 떼써서 되려고 하면 안 된다’는 코레일의 주장을 그대로 체화한 힐난을 마주할 때마다 답답했다. ‘떼쓰기’가 아닌 ‘취업 사기’가 사건의 본질이라고 KTX 승무원들은 지적해왔다. 이들만의 주장이 아니었다.

500여 명이 참가한 ‘KTX 승무원 직접고용을 촉구하는 교수 모임’은 2006년 자체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코레일의 취업 사기에서부터 문제가 시작되었다고 기자회견을 열었다. 교수 모임은 “코레일이 1년 뒤 정규직화 그리고 항공사 스튜어디스보다 나은 대우와 공무원 수준 대우를 약속해 항공사 승무원에 지원 중이거나 합격했던 승무원 지원자들이 KTX를 선택했다”라고 밝혔다(이런 주장을 신문 칼럼 등에 내보냈던 연세대 나임윤경 교수는 코레일의 명예훼손 고소로 검찰 조사까지 받았지만 사건은 무혐의로 종결됐다).

  <div align = right><font color=blue>ⓒ시사IN 신선영</font></div>KTX 승무원 조합원과 철도노조 관계자들이 3월4일 서울역 앞에서 1·2심 판결을 뒤엎은 대법원을 규탄하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시사IN 신선영
KTX 승무원 조합원과 철도노조 관계자들이 3월4일 서울역 앞에서 1·2심 판결을 뒤엎은 대법원을 규탄하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오미선씨 역시 항공사에 합격하고도 KTX를 선택한 경우다. 13대1의 경쟁률을 뚫고 KTX 1기 승무원으로 합격하자 주변에서도 ‘공사가 낫다’며 코레일을 추천했다. 어른들 말을 따라 코레일 마크가 달린 짙은 회색 유니폼과 배지를 달고 KTX에 올랐다. 당시 노무현 정부가 공무원 정원이 늘어나는 걸 막기 위해 ‘비핵심 업무’ 외주화를 추진한다는 사실은 까마득히 몰랐다.

2006년 당시 국회 환경노동위원회, 감사원, 국가인권위, 교수 집단 등이 해고된 KTX 승무원을 지지하며 직접고용을 요구했다. 심지어 2003년 노동부가 코레일에 “열차 승무원 중 안내원의 업무는 파견법이 규정한 파견 대상 업무에 해당하지 않고, 도급은 독립적 업무 수행이 가능한 업무에 한해 추진해야 하는데 요청한 업무는 독립적으로 업무 수행이 어려운 것으로 보인다”라는 의견을 냈다는 사실이 뒤늦게 밝혀졌지만, 코레일은 묵묵부답이었다.

코레일은 즉시 항소했다. 오씨는 “승무원들에게 무리하지 말고 법대로 하자던 공사가 1심 판결이 나오면 따르겠다고 해놓고 항소했다”라고 지적했다. 코레일은 임금 관련 부분만 가집행했다. 그다음 해에 열린 2심(서울고등법원 민사15부·부장판사 김용빈) 선고에서도 결과는 똑같았다. KTX 승무원이 이겼다.

대법원 선고는 빨리 나지 않았다. 일터로 돌아갈 날만 기다리던 시간은 4년 가까이 흘렀다. 그사이 결혼을 하고 아이 엄마가 된 이들이 늘어났다. 오씨는 아이를 낳기 전까지 서비스 관련 강의를 했다. 오씨의 처지는 그나마 낫다. 파업 경력 때문에 번번이 면접에서 미끄러진 이들은 아르바이트를 하거나 그조차도 하지 못해 쉰다고 했다.

지난 2월26일 대법원 선고가 있기 사흘 전, KTX 승무원 쪽 변론을 맡았던 최성호 변호사가 기일이 잡혔다고 연락했다. 괜스레 불안한 마음에 선고 당일 대법원 가는 길을 미적거렸다. 34명(1차 소송)의 1심 승소 결과를 보고 뒤늦게 소송을 제기한 해고 승무원 119명(2차 소송)의 2심 결과가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1차 소송은 1·2심 모두 이겼지만, 2차 소송은 1심 승소 2심 패소였다. 2차 소송을 맡았던 서울고법 민사1부(부장판사 정종관)는 “제출된 사실만으로는 KTX 승무원과 코레일 사이 직접 근로계약 관계가 성립됐다고 보기 어렵다”라며 코레일의 손을 들어줬다. 1차·2차 소송은 나란히 대법원으로 올라가 결과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결국 오씨는 제시간에 대법원에 도착하지 못했다. 지하철 3호선 종로3가역에서 ‘파기환송’이라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상고 기각’이라는 단어만 기다리던 이들에게 파기환송은 감이 잘 오지 않았다. ‘그냥 좀 더 시간이 필요한가 보다’라며 애써 좋은 쪽으로 생각하자고 카카오톡 단체창에서 동료들을 다독이고 있을 때, 최 변호사가 휴대전화로 “졌습니다”라고 알려줬다. 다리에 힘이 쫙 풀렸다. 지난 10년간 버텨온 긴 싸움의 정당성이 단 몇 초 만에 무너졌다고 느꼈다. 허망하고 분했다.

   
 
대법원 1부(주심 고영한)는 코레일과 KTX 승무원 사이 직접 근로관계가 있다고 보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재판부는 “KTX 승무원과 코레일 소속 열차팀장의 업무가 구분돼 있고, 홍익회 등이 독립적으로 승객 서비스업을 경영하면서 승무원을 직접 채용하고 인사권까지 행사해왔다”라고 밝혔다(오른쪽 상자 기사 참조).

오씨는 재판부가 현장 상황을 너무 모른다고 생각했다. 일을 하다 보면 무 자르듯 코레일 정규직인 열차팀장은 안전 업무를 맡고, 비정규직인 승무원은 서비스 업무를 맡게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섞여서 같은 업무를 했다. 게다가 열차 서비스의 최우선이 승객 안전인 까닭에 두 업무를 분리해서 보는 건 비현실적이라고 지적했다.

당장 현실적인 문제도 있다. 대법원 판결에 따르면, 각자 1억원 가까운 빚이 생긴다. 1심 승소 이후 지난 4년간 코레일에서 받은 돈을 모두 내놓아야 하는 상황이다. 심지어 제때 갚지 못하면 법정 이자 20%까지 내야 한다는 이야기를 변호사를 통해 들었다. 다달이 180만원씩 받던 돈은 생활비로 이미 다 나가버린 처지라 당장 1억원이라는 거액을 갚을 길이 막막했다.

차라리 1심부터 지는 게 나았을까


해고 승무원들 사이에서는 이혼이라도 해야 하느냐는 말이 나온다. 이럴 바에 차라리 1심부터 지는 게 나았을 것이라는 생각까지 들었다. 오씨는 “34명 중에는 파업 중에 유산을 두 번이나 해 난임으로 고생하다 생활지원비 180만원을 들여 병원에 다니며 힘들게 임신해서 아이를 낳은 동료가 있다. 이제 와서 그 돈을 내놓으라니, 소중한 것을 겨우 찾았는데 다시 빼앗긴 채 지난 인생을 부정당한 느낌이다”라고 말했다.

  <div align = right><font color=blue>ⓒ연합뉴스</font></div>2006년 9월28일 해고된 KTX 승무원들이 몸을 쇠사슬로 묶고 국회 진입을 시도하다가 경찰에 저지당하고 있다.  
ⓒ연합뉴스
2006년 9월28일 해고된 KTX 승무원들이 몸을 쇠사슬로 묶고 국회 진입을 시도하다가 경찰에 저지당하고 있다.

이들은 7년 만인 지난 3월4일 다시 서울역에 모였다. 대법원 판결을 규탄하는 기자회견에 참가하기 위해서였다. 반가운 인사도 잠시였다. 철도노조 관계자들과 “이렇게 다시 보지 말았어야 한다”라는 말을 주고받았다. 승무원의 추억이 쌓여야 할 곳곳이 투쟁의 추억으로만 남겨져 있다는 사실을 씁쓸히 확인했다. 한동안 오씨를 힘들게 했던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나’라는 질문이 다시 시작되었다. 고민이 많다. 이렇게 ‘실패’로 끝맺고 싶지 않지만 쉽게 답이 떠오르지 않는다. 묵묵히 자신을 지켜봐주던 남편이 요즘 그녀에게 ‘이민’이라는 단어를 꺼낸다. “정말 이 나라에서는 희망이 없는 걸까?” 기자회견 후 승무원들끼리 둘러앉은 자리에서 오미선씨가 질문을 던졌다. 무거운 침묵만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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