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IN 윤무영남녀노소 할 것 없이 수많은 사람이 촛불집회를 통해 소통과 토론, 그리고 민주주의를 배웠다. 그 힘은 우리 사회를 긍정적인 방향으로 이끌 가능성이 높다.

6월10일 밤 서울 광화문 촛불집회 현장에서 만난 이진영씨(24·프리랜서)는 “5월 이후로는 시간이 지날수록 별로 알고 싶지 않았던 문제도 점점 알아진다”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무엇보다 그녀는 지난 대통령 선거에서의 선택을 후회했다.

“아버지가 찍으래서 그냥 이명박 후보를 찍었다. 하지만 촛불집회에 나오고 난 뒤 많은 걸 깨닫게 됐다. 뉴스를 보는데 아버지가 집회에 나온 사람은 다 빨갱이라며 잡아 가둬야 한다고 해서 대들었다가 멱살을 잡히기도 했다. 내일 다시 대선을 한다면 좀더 깨끗한 사람을 찍겠다. 도덕성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겠다.”

서울시 마포구 한 동사무소에서 임시직으로 일하는 정유진씨(24). 최근 그녀의 삶도 ‘불과 한두 달 전까지만 해도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일들로 일렁인다. 난생처음 시위에 참여한 것부터가 그렇다. 이전에는 정치·사회 문제에 큰 관심이 없었던 정씨다. 하지만 자신이 가입한 인터넷 카페(소울드레서) 회원의 목소리가 심상치 않았고, 이를 계기로 게시판과 신문·방송 보도를 유심히 보게 됐다. ‘정말 이건 아니다’ 싶었다.

촛불집회는 생생한 ‘민주주의 교육 현장’

그러나 그녀의 고민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한 번, 두 번, 세 번…. 촛불을 들면 들수록 관심은 쇠고기를 넘어 좀더 근본적인 문제로 향했다. “단순히 쇠고기 협상만 걸고 넘어갈 일이 아니더라. 이명박 정부의 이념과 정책 방향 자체에 문제가 있었다. 결국 지난 대선에서 우리가 잘못 뽑은 죄가 컸다. ‘지지할 사람이 없다’ 자포자기하지 말고 국민이 흔쾌히 뽑을 만한 사람을 직접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고민의 결론은 정당 가입이었다. 지난 5월 말, 정씨는 진보 성향의 한 정당에 입당원서를 냈다. 역시 ‘난생처음’ 해본 선택이었다.

‘파업은 노동자의 학교’라는 말이 있다. 노동운동가가 자주 쓰는 말인데, 파업을 통해 ‘온몸으로’ 노동자의 권리를 배우고 자본과 국가의 본질을 깨닫게 된다는 의미가 담겼다. 그렇다면 최근 촛불집회는 어떨까. 물론 심각하기 그지없는 파업과는 분위기가 딴판이지만, 민주주의와 사회연대 의식을 고취시키는 ‘생생한 교육 현장’이라는 데 이론을 달 사람이 있을까?

조현연 성공회대 교수(정치학)는 “촛불집회는 많은 사람에게 ‘기억의 흔적’으로 남아 언젠가 우리 사회의 큰 변화를 이끌어내는 힘이 될 것이다”라고 전망한다. “재협상이 됐든 미국산 쇠고기 수입 전면 금지가 됐든 실질 성과가 남으면 더욱 좋겠지만, 꼭 그렇지 않더라도 좌절하거나 패배감에 휩싸일 촛불 같지는 않다. 사람들은 온갖 거짓과 잘못, 몰상식에 대해 거침없이 자기 목소리를 냈고, 일정한 변화를 이끌어내기도 했다. 상대를 존중하며 토론과 소통을 중시하는 등 민주주의의 중요한 덕목도 체화했다. 이러한 경험은 훗날 또 다른 모순이 터지거나 혹은 선거가 있을 때 아주 긍정적인 방향으로 작용할 가능성이 높다.”

경기도 고양시 한 중학교의 이수진 교사(38)는 “요즘 학생의 모습에 깜짝깜짝 놀란다”라고 말했다. 과거에는 사회 이슈와 관련한 이야기를 꺼내면 대부분 소 닭 보듯 했으나 이제는 호응이 크다고 한다. 광우병 문제뿐만이 아니다. 교육·정치 등 각종 사회 현안에 많은 관심을 보이고 직접 토론을 하기도 한다. “그 전에는 ‘혼자서 뭘 할 수 있겠느냐’ ‘나만 잘살면 되지’ 하는 냉소와 이기심이 지배적이었지만 토론하는 걸 보면 변화가 확연히 느껴진다. ‘함께하면 바꿀 수 있다’는 목소리가 많아졌다. 촛불집회에 참석해본 아이들이 특히 그렇다.”

집회에 가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느낀 것이겠지만, 그들에게는 다른 무엇보다도 자부심과 자존감이 넘쳐난다. 부산진여고 2학년 이은지양은 블로그에 이런 글을 남기기도 했다. “처음에 촛불집회를 한다는 소리를 여기저기서 들었을 때는 집회를 한다고 수입이 취소되겠느냐는, 사람이 죽어도 눈 하나 깜짝 안 할 사람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한 번, 두 번 집회에 참여해보니까 어리석은 생각인 것 같았다. 이렇게 잘못을 고치려는 사람들이 나서서 그 뜻을 세상에 내비치는 것만으로도 큰 의미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스스로 광우병을 공부해, 스스로 문제 제기를 시작한 10대에 의해 거대한 시위가 촉발됐듯, 현장에서는 저마다 지식과 논리로 무장한 또 다른 ‘학생’을 수없이 만날 수 있다. 음악 활동을 하는 박 아무개씨(22)는 사람들이 경찰에 폭행당하는 모습을 보고 ‘집회및시위에관한법률’(집시법)에 대한 자료를 꼼꼼히 살펴보게 됐다고 한다. 그랬더니 현행법은 웬만해서는 ‘불법집회’의 굴레를 벗어날 수 없는 조항으로 가득했다. 박씨는 그 즉시 ‘집시법 반대’ 손팻말을 들고 집회에 참석하기 시작했다.

조선·중앙·동아는 거의 ‘패닉’ 상태

대학원생 김 아무개씨(36)는 쇠고기 문제가 비단 한·미 간 협상에 국한한 사안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역시 또 자료를 뒤졌고, 미국 정부 뒤에는 타이슨푸드 같은 초국적 식품회사가 버티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쇠고기만이 아니었다. 그 회사들은 유전자조작 곡물 따위에 대한 개방 압력으로 우리 식탁에 올라오는 모든 먹을거리를 오염시키려 한다. 촛불집회가 이들에 대한 직접 문제 제기로 이어졌으면 좋겠다.”

십수년간 아무리 노력을 해도 결코 풀릴 기미가 안 보이던, 여러 사회 의제도 모처럼 새로운 반전의 기회를 잡은 분위기다. 대표 사례가 ‘안티 조·중·동’ 운동이다. 유통업계에 종사하는 회사원 박 아무개씨(36)는 “이번 촛불집회 참여를 계기로 조·중·동이 얼마나 왜곡 보도를 일삼는 언론인지 알게 되었다”라고 말한다. 장 아무개양(18·학생) 역시 “집에서 조선일보를 보는데 일부 시민이 그런 것 갖고 ‘폭력 시위’라고 크게 보도하더라. 경향·한겨레와 너무 비교가 됐다”라며 오빠와 함께 구독을 끊자고 부모에게 조르는 중이라고 전했다.
 

ⓒ시사IN 윤무영촛불시위에 참석한 사람들은 따로 공부를 하지 않아도 조·중·동의 ‘참모습’을 깨닫을 수 있었다.

〈미디어오늘〉 보도에 따르면, 최근 조·중·동 광고국은 네티즌의 광고주 압박 운동으로 거의 ‘패닉’ 상태에 빠졌다고 알려진다. 언론계 안팎에서는 이들 신문의 광고 매출이 10% 가까이 하락했다는 말도 나온다. 구독 부수 역시 마찬가지다. 6월4일 언론·시민단체가 발족한 ‘신문 불법경품 공동신고센터’에는 “조선·중앙·동아일보를 끊고 싶은데 방법을 알려달라”는 문의 전화가 폭주한다고 한다. 반면 경향신문과 한겨레는 지난 5월 한 달 동안만 6700여 부(경향신문)의 자진 구독자가 늘어나는 등 정반대의 문의 전화가 잇따른다.

1997년 외환위기 이후 대중으로부터 고립에 고립을 거듭해왔던 노동운동과 파업에 대한 인식에도 변화 조짐이 보인다. 6월10일 오후, 서울 광화문 본집회에 앞서 열린 민주노총 사전 집회를 멀찌감치에서 바라보던 성북구 한 여고 김 아무개양(18)은 “솔직히 파업에 대한 인상이 그리 좋지는 않았다. 경제에 위협이 된다고 하니까. 하지만 지금은 다 먹고살자고 저러는 것이구나, 최대한 이해하려 한다”라고 말했다.

특히 6월13일부터 시작된 화물연대의 파업에는 폭발적인 지지가 쏟아진다. 화물연대는 “운송료 인상·경유가 인하 등 우리의 요구 사항이 관철되더라도 미국산 쇠고기 운송을 강요하거나 한반도 대운하 사업을 강행한다면 다시금 강력한 투쟁으로 일어설 것이다”라고 밝힌 상태다. 화물연대 홈페이지에는 지지 댓글이 넘친다. 한 포털 사이트에서는 ‘파업 응원 서명’까지 등장했다. 민주노총 측은 ‘전국민 지지파업 1호’라는 이름을 붙이기도 했다.

나상윤 공공연맹 정책위원장은 최근 분위기를 이렇게 설명한다. “화물연대에 대한 반응이 가장 뜨겁기는 하지만 사회 공공성 의제에도 많은 관심을 보인다. 이전에는 유인물을 받아갈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하지만 요즘은 시민이 줄을 서서 서명에 참여할 정도다. 의료보험·가스·전기 민영화 문제 등이 큰 공감대를 이룬다고 생각한다.”

화물연대 파업 지지 폭발적

물론 하루아침에 모든 것이 달라질 수는 없다. “노동조합이나 운동권 조직 자체에는 여전히 거부감이 많은 듯하다. 대부분 개인으로 와서 그런가, 우리가 가져온 깃발 등을 안 좋게 보는 사람이 적지 않다. 어떻게 하면 접점을 만들 수 있을지 고민이 크다.”

6월7일, 포털 사이트 다음의 토론방 ‘아고라’에는 ‘촛불집회가 우리 모두에게 던지는 질문’이라는 제목의 매우 논란이 될 만한 글 한 편이 올라왔다. ‘히치콕’이라는 아이디의 네티즌은 이 글에서 “이번 싸움이 끝난 다음에도 우리 사회에 건강한 민주주의가 지속되기 위해서는 촛불을 든 개인이 자기 삶에 닿아 있는 다양한 조직에 자발적으로 가입해 일상적인 참여, 일상적인 정치를 해나가야 한다”라고 제안했다.

최근 너도 나도 ‘조직되지 않은 개인’에 대한 찬양 일색이라 이런 ‘전통적인 관점’의 문제 제기는 많은 비판을 받겠거니 했다. 하지만 결과는 전혀 딴판이었다. 6월13일 오전 2시 현재 찬성 5374, 반대 313으로 지지가 압도적이었던 것이다. 내친김에 이번 촛불 정국에서 진중권 중앙대 겸임교수를 앞세워 맹활약을 펼친 진보신당의 당원 수 증감 현황을 확인해봤다. 5월 중순께까지만 해도 하루 20~30명 정도가 증가했으나 촛불시위가 본격화한 5월 말, 6월 초를 지나면서는 하루 100~200명씩 당원이 늘어났다. 촛불은 작지만 중요한 변화를 소리 없이 그렇게 만들어나가고 있었다.

기자명 고동우·천관율 기자 다른기사 보기 intereds@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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