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IN 한향란고교생·대학생·주부·직장인 등 아고라 깃발 아래 모여 드는 이들도 깃발만큼이나 각양각색이다.

기묘한 풍경이었다. 서로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이들 네댓 명이 한데 뭉쳐서 소리쳤다. 누군가 하나, 둘, 셋 박자를 넣으면 다들 “아고라 모여라!”를 외쳤다. 그러기를 10분쯤, 어느새 시민 100여 명이 목소리를 합쳤다. 그럴듯한 ‘대오’가 만들어졌다. 미국산 쇠고기 수입 관련 장관 고시가 발표되던 5월29일 밤, 닭장차에 가로막힌 서울 광화문우체국과 교보빌딩 사이 거리에서였다.

5월31일에는 최초의 ‘아고라 깃발’이 등장했다. 누군가 사비를 들여 뚝딱 만들어 왔다. 거부감은 없었다. 종류를 불문하고 깃발만 보면 “깃발 내려!”를 외치던 2004년 촛불집회 때의 시민과는 영 딴판이었다. 그저 필요하니 깃발을 만들고, 모이고 싶으면 깃발 보고 모이는 “당나라 조직” 오프라인 아고라는 그렇게 생겨났다.

200명 ‘별동대’로 가두시위 돌파구 뚫다

아고라는 포털 사이트 다음의 토론방이다. 같은 취향과 사고를 공유하는 커뮤니티보다도 로열티(충성도)가 떨어질 수밖에 없는 한계가 있다. 그럼에도 요즘 ‘아고라 깃발’ 아래는 시위대가 많게는 수천 명씩 모인다. 포털 사이트 토론 게시판이 이 정도의 충성도를 오프라인에서 가질 수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적어도 열정과 충성도만은 인정해줘야 했던 ‘아이러브 황우석’의 전성기를 넘어서는 규모다.

이유가 뭘까. 우선은 ‘아고라’가 최근의 흐름을 선도한다는 자부심이 크다. 실제로 청계광장의 ‘얌전한’ 촛불문화제가 정체기를 맞을 때쯤인 5월24일 가두시위로 돌파구를 연 것부터가 아고라다. 아고라 ID ‘권태로운창’은 “청계광장 안에 안주하려는 광우병국민대책회의(대책회의)를 답답해하던 ‘아고리언’ 200여 명이 먼저 가두시위에 나섰다. 시민이 호응해주어서 2000명 이상의 대오가 됐다”라고 가두시위 첫날 상황을 설명했다. 가두시위라는 새 돌파구는 그 후 경찰의 자충수와 맞물려 6월10일의 수십만 시위 인파로까지 발전했다. 아고리언의 자부심을 짐작할 만하다.

기존 사회조직과는 전혀 다른 자유로움도 강점이다. 72시간 연속집회가 한창이던 6월7일 밤, 엄청난 크기의 아고라 깃발이 눈에 띄었다. 깃발을 든 시민은 “180㎝짜리 깃대 세 개를 이어서 만들었다. 쫙 펴면 540㎝까지 나온다”라고 자랑했다. 그런데 이 깃대에 아고라 깃발이 달린 이유가 독특하다. “원래 광우병 쇠고기 반대 깃발을 달고 나왔다. 나와 보니 누가 커다란 아고라 깃발천을 가져왔더라. 그래서 그냥 이걸로 바꿔 달았다.”

요즘 등장하는 아고라 깃발은 보통 대여섯 개. 개인이 사비로 만드는 거라 규격이 들쭉날쭉이다. ‘깃돌이’도 순간순간 바뀐다. 기만전술 같은 게 아니라, 그저 팔이 아프면 옆 사람과 교대하기 때문이다. 깃발을 ‘조직의 상징이자 전술의 중심’이라며 애지중지하는 프로 활동가들은 따라잡기 힘든 감수성이다.

아고리언이 대책회의에 대한 불만을 공유한다는 점도 단결력을 높인다. 오프라인 아고라에 모여드는 이들은 “대책회의가 너무 몸을 사리고 시민이 만든 흐름에 안주한다”라며 썩 달가워하지 않는다. 6월10일, 대책회의가 문화제를 끝내고 가두행진을 시작했을 때 아고라 깃발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이 가두행진은 의미가 없어요. 좀 가다가 막히면 다시 돌아오는 대책 없는 행진이죠. 대책회의가 동력을 낭비하고 있어요.”

아고라는 거리에 익숙한 ‘조직’이 아니다. 그래서 웃지 못할 장면도 자주 나온다. 아고라 대오 2000여 명이 세종로에서 서대문으로 향하던 6월7일, 대오의 선두 20여 명은 긴 현수막을 들고 행진했다. 20명이 발을 맞춰야 하니 속도를 낼 수 없는 상태지만 메가폰을 잡은 아고리언은 계속해서 “빨리 가자”라며 답답해했다. 거리에 서본 경험이 없다 보니 일어나는 해프닝이다. 

여의도 ‘기습시위’로 언론 장악 의제 되살려

6월10일에도 아고라를 따라다녀봤다. 가장 앞에 서서 회의를 하는 이들의 면면을 보니, 오후 8시의 인물과 11시의 인물이 달랐다. ‘지도부’도 그때그때 바뀐다는 얘기다. 의견도 각양각색이다. “민주노총과 한총련은 앞장서서 안 싸우고 뭐 하는 거냐”라는 말과 “노조와 학생이 너무 나서는 것 같다”라는 말이, 한 깃발 아래의 회의 안에서 동시에 나온다. 그야말로 좌충우돌. 지켜보기 답답할 정도다.
하지만 그렇게 장면 장면만 봐서는 알 수 없는 오프라인 아고라의 ‘진화’가 눈부시다. 6월10일 최대 규모의 촛불집회를 끝내고, 대책회의를 포함한 누구나 ‘잠시 쉬어가는 날’로 생각했던 6월11, 12일. 오프라인 아고라는 여의도 KBS 앞 기습 촛불 인간띠 잇기 시위를 벌여, 여론의 관심 밖이었던 정부의 언론 장악 시도를 다시 의제로 올리는 데 성공했다. 6월13일자 한겨레는 이 시위를 1면 톱으로 보도했다.

이번 주에도 오프라인 아고라는 ‘별동대’ 구실을 자임할 태세다. 6월17, 18일 이틀 동안 서울 강남구 코엑스몰에서 열리는 ‘OECD 장관회의’를 촛불로 둘러치는 방안을 유력하게 논의 중이다. 계속해서 의제를 먼저 치고 나가겠다는 얘기다. ID ‘권태로운창’은 “대책회의는 대책회의의 역할이 있다. 우리는 조직도 아니고 모임도 아닌, 그저 여론 자체다. 앞으로도 우리가 가장 잘할 수 있는 일을 할 것이다”라고 아고라의 계속되는 ‘진화’를 예고했다.

기자명 천관율 기자 다른기사 보기 yul@sisain.co.kr
저작권자 © 시사IN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