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가요가 시위 현장으로 ‘소환’된 사례는 역사에서 흔하게 찾을 수 있다. 대개 바람이 분 대중 집회의 첫 시작은 그러했다. 1987년 노동자대투쟁 이후 생전 처음 시위라는 것을 해보는 택시기사는 〈노란 샤쓰의 사나이〉를 소리 높여 부르면서 시위를 했고(그들의 유니폼이 노란색이므로), 중·장년의 남성 노동자는 〈아빠의 청춘〉을 가사를 바꾸어 불렀다. 이로써 창작자가 아니라 수용자가 노래의 새로운 주인이 되며, 소환된 노래가 새로운 의미를 부여받을 만하면, 그것은 어느새 민중가요가 되어버린다.
1960년 4·19 때 〈해방가〉가 불린 것도 아마 학생이 함께 부를 수 있는 행진곡풍의 만만한 노래가 그것밖에 없었기 때문일 수 있다. 광복 직후 박태원 작사·김성태 작곡으로 지어져, 대중에게 널리 전파된 노래였으니 말이다. 〈인민항쟁가〉 같은 좌익의 노래를 부를 수 없었으니 이들의 선택 폭은 좁았을 것이다. 1960년대 중반 한·일 수교 반대 데모 때는 〈삼일절 노래〉도 불렸다고 한다. 일본과의 수교 문제라는 점에서 삼일운동 정신이 연상되었을 것이다. “선열하 이 나라를 보소서” 하는 구절을 부를 때 가슴이 뭉클했다고 하니, 정인보 선생의 가사가 참으로 긴 감동력을 가졌던 셈이다.
1970년대 초 대표 데모 노래는 〈선구자〉
1970년대 초에 가장 대표적인 데모 노래는 〈선구자〉였다. 교정에서 일단 〈선구자〉 노랫가락이 들리기 시작하면 교수님들은 한숨을 푹 쉬며 분필을 놓고 “오늘 수업은 그만!” 하셨단다. 느릿느릿한 이 노래가 불렸다는 것은, 당시 학내 데모가 (막판에는 격렬한 투석전으로 끝날지언정) 시작할 때는 다소 여유로웠다는 당시 분위기를 말해준다. 1970년대 중반에 들어서면서 김민기가 지은 대중가요 〈아침이슬〉이 데모 노래로 소환되고, 미국 남북전쟁 때 노래가 ‘훌라훌라’ 하는 희한한 후렴구가 붙어 데모 노래로 들어왔다. 〈아침이슬〉은, 1971년 발표 이후 젊은이에게 너무도 인기 있던 대중가요였을 뿐 아니라 “나 이제 가노라 저 거친 광야에” 하는 뒷부분이 충분히 시위에서도 부를 만한 대목으로 여겨졌을 것이며, 〈훌라송〉이라고 뒤에 이름 붙은 노래는 “무릎 꿇고 살기보다 서서 죽길 원한다 우리들은 정의파다” 하는 격렬한 가사가 선동적이었다.
대학가 시위에서 다시 노래가 회복된 것은 1980년대 들어서서다. 1983년 즈음이 되면 대학 안에서 다시 스크럼을 짜고 마당을 한두 바퀴 돌 수 있을 정도의 조직력이 회복되었다. 이때 시위의 시작을 알리는 노래는 〈흔들리지 않게〉였다. 2절 가사가 “와서 모여 함께 하나가 되자”이니, 그야말로 주제가로 안성맞춤이었던 셈이다. 그리고 1984년 총학생회가 부활되고, 대학 교정에서 몇 시간씩 정치집회를 해도 잡혀가지 않는 시대가 되었을 때, 드디어 〈임을 위한 행진곡〉이라는 1980년대 최고의 노래가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1982년 광주에서 만들어져 서울로 퍼진 이 노래는 1980년대를 대표하는 최고의 민중가요가 되었고, 1980년대 말과 1990년대 초에는 (국민의례를 대신하는) 민중의례에 포함되는 노래로까지 지위가 격상했다.
1987년 노동자대투쟁이 벌어진 직후, 초기에는 데모를 처음 해보는 노동자들이 〈노란 샤쓰의 사나이〉나 〈전선을 간다〉 같은 노래를 불렀지만, 1988년 말부터 김호철이 〈파업가〉 〈노동조합가〉 〈단결투쟁가〉 등을 발표하면서 이른바 노동가요라는 새로운 민중가요의 역사를 쓰기 시작했다. 이 노래들은 지금까지도 파업 현장에서 없어서는 안 될 노래이다.
경찰과 대치할 때마다 등장하는 〈훌라송〉
비교적 조직된 대중이 중심이 된 시위에서는 당대의 민중가요 신곡이 불려지는 것에 비해, 지금처럼 시내에서 시위 경험이 없는 시민이 함께 어울릴 때는 부를 수 있는 노래가 매우 적어진다. 이때 누구나 함께 부를 가장 좋은 노래는 늘 〈아리랑〉이었다. 1980년 5월 광주항쟁 때도, 1987년 6월 항쟁 때도, 한민족의 노래 〈아리랑〉은 대중을 결집시키는 힘을 발휘했다. 그런데 이번 촛불집회 때는 하나가 더 추가되었다. 월드컵 경험 덕분에 〈오! 필승 코리아〉를 함께 부를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렇게 일반 시민이 즉석에서 쉽게 배우는 노래가 있다. 한 번만 들으면 따라 부를 수 있는 쉬운 노래이다. 1980년 광주에서는 시장판 아줌마들도 〈훌라송〉에 여덟 자의 구호를 넣어 부르는 것은 쉽게 따라 했다. 이번 촛불집회에서는, 2004년 윤민석이 지어 발표한 〈헌법 제1조〉가 떠오르는 신곡이 되었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를 반복하는 간단한 가사와 선율이, 오만한 정부에 대한 분노를 담아내기에 적당했다.
그러나 시내 한복판에서 가장 엄숙하고 비장한 순간에 불려지는 노래는 역시 〈애국가〉다. 1980년 ‘서울의 봄’ 광화문에서, 5월 광주 금남로에서, 최루탄과 총탄 앞에서 사람들은 〈애국가〉를 불렀고, 이번에도 역시 마찬가지다. 단, 이번에는 ‘월드컵용’ 대형 태극기 퍼포먼스가 곁들여진 것이 차이라면 차이일까. “다 이 나라 잘되자고 이러는 거다” “너희 경찰들도 이 나라 국민이면 길을 비켜라” “이 나라를 위해 이 정도 희생은 감수할 수 있다” 같은 결의가 이 〈애국가〉를 부르는 마음에 담겨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