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드코맥 매카시 지음문학동네 펴냄
우리에게는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의 원작자로 알려져 있을 뿐이지만 코맥 매카시는 비평가 해럴드 블룸이 ‘미국 현대문학의 4대 작가’로 지목한 거물이다. 매카시의 2007년 퓰리처상 수상작 〈로드〉(문학동네)가 나왔다. 사무엘 베케트가 쓴 〈살아 있는 시체들의 밤〉 운운하는 외신 평에 굴복해서 단숨에 읽었다. 다 읽고 나니 과연 그렇구나 싶지만 그 이상이다. 이토록 아름다운 묵시록이 또 있었던가 싶다. 

여기는 멸망 이후의 세계다. 인류는 거의 절멸했다. 곳곳에 시체가 널려 있다. 몇 안 되는 생존자는 서로가 서로를 도륙해 먹으면서 목숨을 연명해 나간다. 그 세계의 어느 곳에 한 남자와 한 소년이 있다. 그들은 부자지간이다. 둘은 남쪽으로 그저 하염없이 걸어간다. 남쪽에 뭐가 있기에? 알 수 없다. 다만 아비가 아이를 남쪽으로 데려가기 위해 필사적이라는 것만 알겠다. “내 일은 널 지키는 거야. 하느님이 나한테 시킨 일이야. 너한테 손을 대는 사람이 있으면 누구든 죽일 거야. 알아들었니?”(90쪽) 굴곡이 거의 없는 서사가 그렇게 한참 이어진다. 그런데 책을 놓을 수가 없다.

비밀 때문이다. 이 남자와 이 아이는 누구인가? 그들은 왜 남쪽으로 가는가? 멸망 이후의 생존자라는 점에서 두 인물은 묵시록적 상징성으로 잔뜩 충전돼 있다. 그 비밀이 풀릴 때까지 이 여행을 따라가지 않을 수가 없다. 그러나 소설의 후반부는 독자의 기대를 배반한다. 도착이 곧 결말일 거라 짐작했으나 아니었다. 분명 어떤 지점에 도착하기는 하되 거기서 다시 여행이 시작되니 말이다. 이 기묘한 결말이 이 소설의 포인트다. 이에 대해서는 자세하게 말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 과정으로 보였던 것이 결국 그 자체로 목적이었고, 결말을 알기 위해 읽은 300여 페이지가 실은 300여 페이지짜리 결말이었다는 것만 적어두자.

무신론자에게는 희망이 신이다

이 구조가 그 무슨 얄팍한 반전 따위를 위해 구축된 것은 아니다. 이 구조 자체가 이 소설의 전언이다. “우린 괜찮은 거죠, 그죠 아빠?/그래. 우린 괜찮아./우리한텐 나쁜 일이 일어나지 않죠./그래./우리는 불을 운반하니까요./그래. 우리는 불을 운반하니까.”(96쪽) 파국 이후의 세계에서 그토록 소중히 지켜야 하는 ‘불’이란 대체 무엇이겠는가. 희망일밖에. 그러나 이 희망에는 희망이 없다. “남자는 자신이 아무런 근거 없이 희망을 걸고 있음을 알았다.”(242쪽) 그래, 희망이 없을 때 희망은 가장 숭고해진다. 이 전언을 이 소설은 여로의 구조로 치밀하게 장악한다. 그래서 감동적이다. 이 감동에 대해서도 자세히 말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 가이드가 외려 해가 되는 여행도 있는 법이다.

ⓒEPA작가 코맥 매카시(오른쪽)는 ‘미국 현대문학의 4대 작가’ 중 한 명이다.
그러고 보니 세 종류의 소설이 있는 것 같다. 희망의 근거를 어설프게 늘어놓는 아마추어의 소설, 어떠한 타협도 없이 절망의 정의로움을 완강하게 고수하는 프로의 소설, 그리고 절망의 끝에서 기어이 희망의 가능성을 설득해 내고야마는 대가의 소설. 소설이 말하는 희망에 마음이 움직이는 일은 드물다. 이 소설은 어떻게 그럴 수 있었는가. 매카시가 대가여서? 그가 대가인지 아닌지 나는 모른다. 내가 아는 것은 일흔이 넘은 그에게 열 살이 채 안 된 아들이 있다는 사실이다. “그 자신의 마음속에서 이미 재가 된 것을 아이의 마음속에서 불로 피워올릴 수는 없다는 것”(174~175쪽)을 알기 때문에 아비는 우선 제 자신부터가 희망이라는 ‘불’을 끌 수 없었을 것이다. 잠든 아들을 보며 구상한 소설이라 했던가. 이 소설을 쓰게 한 것은 아비의 그 사랑이다.

마지막 페이지를 덮고 생각했다. 지구가 멸망한다 해도, 만약 생존자가 하나가 아니라 적어도 둘이라면, 그리고 그 둘 중 하나가 다른 하나를 사랑하게 된다면, 거기에는 희망이라는 것이 생겨나겠구나 하고. 더 짧은 결론. 눈먼 노인을 만난 남자가 자기 아들을 가리키며 말한다. “저 아이가 신이라고 하면 어쩔 겁니까?”(196쪽) 그래, 무신론자에게는 희망이 신이다.

기자명 신형철 (문학 평론가)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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