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진(에세이스트)우리 현실에서 ‘눈높이를 낮추라’는 것은 ‘영영 낮게 살라’는 말이다. 그러니, 혹시 잘살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버리기 싫어서 숱한 밤 도서관 불을 밝히고 있는 그 많은 88만원 세대에게 그렇게 말해서는 안 된다.
지난 9월12일 한나라당 이명박 대선 후보는 충남 목원대 취업박람회장에서 취업을 앞둔 대학생들을 만나 “세계 다른 선진국도 우리나라에 비해 비정규직이 그리 적은 것이 아니다. 눈높이를 조금 낮춰 여러 가지 경험을 살리는 것이 좋다”라고 의견을 피력했다고 한다. 그러니까 ‘취업이 잘 안 되는 이유는 다 너희가 눈높이가 높아서이니 비정규직이든 뭐든 눈높이를 낮춰 아무 데서나 일하면서 구박이든 인정이든 받으며 닥치는 대로 이 일 저 일 다 해보라’는 이야기다. 나는 그 말을 아주 잘 들은 경우인데, 당장 목구멍에 풀칠해야 하니 눈높이는 조금, 연봉은 대폭 낮춰 회사에 들어가서 여러 경험을 쌓아보려고 목하 노력 중이지만 쉽지는 않다. 오히려 갈수록 좌절감만 커질 뿐이다. 눈높이를 낮춰 사는 것은 타이틀이 곧 그 사람을 말해주는 이 시대에 정면으로 반하는 방식이다. 어느 대학을 다녔고 어떤 직장에서 일하는지가 곧 그 사람을 말해주는 2007년의 한국 사회에서 ‘눈높이를 낮추는’ 것은 ‘젊은 사람이 궂은일 마다 않고 경험을 쌓겠다니 장하다’고 칭찬을 받을 만한 일이 아니라, 그냥 ‘원래 그 정도밖에 안 되는 사람’으로 영영 고정되는 일이다. 그들이 눈높이를 낮출 수 없어 발버둥치는 이유는, 안 그래도 낮은 처지에서 눈높이까지 낮췄다가는 앞으로는 잘살 수 있을 거라는 최후의 희망조차 멀어질까봐서이다. 패배감에 사로잡혀 있는 것이 비단 우리 세대만은 아니다. ‘눈높이를 낮춰’ 들어간 직장의 상사들 역시 자기 직장의 입지를 모르는 게 아니라서 열패감을 품고 있기 십상이다. 그래서 그들은 ‘너도 여기 온 걸 보니 뻔한 종자’라는 기색을 숨기지 못한다. 그리고 이같은 열패감은 매우 쉽게 전염된다. 게다가 일을 똑바로 가르쳐줄, 노하우와 인맥을 전수해줄 유능한 선배가 요즘 같은 시대에 그런 ‘눈높이를 낮춘’ 회사에 남아 있을 리 없으니 눈높이 높은 사람들이 가는 회사에서 배우는 것과 같은 업무 능력을 쌓을 길이 없다. 실무를 순조롭게 처리하기 힘든 수습 과정에서도 몇 사람 몫의 일이 무리하게 할당되는 일이 허다하다. 우는소리를 해봐야 회사가 볼 때에는 나약한 정신머리가 문제일 터이니, 싫으면 그만두는 수밖에 없다.

ⓒ난 나 그림
“한참 굶던 사람에겐 다달이 나오는 월급이 마약”
하지만 달마다 나오는 월급은 한참 굶던 사람에게는 마약이다. ‘알파 걸’과 ‘알파 보이’들은 이런 곳에서도 신화를 이뤄낼 수 있겠지만, ‘노멀 걸’과 ‘노멀 보이’들은 더듬더듬하다 결국에는 무엇 하나 제대로 해낼 수 없고 일도 똑바로 배우지 못하게 된다. 점점 자신의 능력과 앞날을 의심하고, 먼저 그곳에 있던 사람들이 가지고 있던 열패감을 온전히 물려받는다. 눈높이를 낮췄던 그는, 아예 영영 낮은 곳에 임한 사람으로 살게 된다. 이렇게 어영부영 이삼 년 살다 보면 서른이 넘고, 주저앉기는 한층 쉬워진다. 이러한 현실에서 눈높이를 낮추라는 것은 그냥 낮게 살라는 말이다. 눈 깔고 살라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앞으로 혹시 잘살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버리기 싫어서 그토록 많은 88만원 세대들이 부모 등골 빼먹는 거 뻔히 알면서도 도서관에서 그토록 숱한 밤에 늦도록 불을 밝히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세상의 모든 것이 간단히 설명되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이명박 후보가 ‘눈높이를 낮추라’는 충고를 젊은이들에게 건네는 이유는 그저 자기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명색이 대통령 후보가 그 정도 인식으로, 그런 충고나 하려거든 부디 어른이 몸소 모범을 보이는 차원에서 먼저 눈높이를 낮추고 서울시장 경력으로 만족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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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명 김현진 (에세이스트)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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