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1일 파리 트로카데로 인권광장에서 유학생과 교포들이 한국 촛불 시위를 지지하는 집회를 열고 있다.

한때 몇몇 신문과 정치권 인사가 이번 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 촛불시위에 배후가 있다는 주장을 한 적이 있다. 아마도 배후가 있다면 그것은 인터넷일 것이다. 서로 얼굴을 모르는 네티즌을 광화문 한자리에 모은 주역이 미디어 다음의 ‘아고라’(agora.media.daum.net) 게시판이라고 한다. 물론 아고라 외에도 토론 게시판은 많지만, 아고라만큼 촛불시위 열기를 북돋운 곳은 없었다.

외국 교포 사회에서도 마찬가지 현상이 벌어진다. 최근 세계 곳곳에서 교포·유학생이 한국의 쇠고기 수입 반대 촛불시위를 지지하는 집회를 열고 있다. 나라마다 고유의 ‘아고라’가 있어서 이 사이트가 집회의 자연스러운 ‘배후’ 노릇을 한다.

미국의 경우는 미즈빌(mizville.org)이 아고라 구실을 했다. 미즈빌은 한인 여성 정보 사이트로 한국으로 치면 마이클럽과 비슷한 곳이다. 마이클럽과 달리 비영리 사이트를 표방한다. 회원은 3만6000명가량 된다. 미국 내 한인 여성 사이트는 미즈빌 말고도 여러 군데가 있으며, 이곳보다 더 규모가 큰 (예를 들어 미시유에스에이같은) 사이트도 있다. 하지만 정치 사회 이야기는 미즈빌 게시판에서 더 활발히 이뤄진다.

최근 광우병 문제가 이슈화하자 이곳 미즈빌은 여성 사이트가 아니라 정치 토론 사이트가 돼버렸다. 애틀랜타에 사는 주부 이선영씨는 “원래 미즈빌 게시판에 시사 관련 글은 가물에 콩 나듯 했다. 그런데 요즘에는 정치 시사글만 하루 500건씩 올라온다”라고 말했다.

미즈빌 덕분에 미국의 경우 남편보다 주부가 광우병 문제에 대해서 더 많이 안다. 주부가 남편보다 더 식품안전 문제에 민감하다는 점도 작용했다.

5월13일 이 미즈빌 게시판에서 의견을 나누던 주부가 따로 모여 성명을 발표한 적이 있다. 미즈빌은 정치 목소리를 낼 수 없게 등록된 단체라 ‘미즈빌 아줌마’들은 성명서를 발표하기 위해 따로 미즈월드(club.limeusa.com/mizworld)라는 사이트를 만들었다. 미국산 쇠고기 전면 개방 반대, 검역권 없는 개방 반대, 재협상 촉구 등을 요구한 이 선언문에 서명한 주부 2316명 중 상당수는 미즈빌에서 활동하던 사람이다. 이 ‘미주 한인 주부들의 모임’ 선언문은 한창 로스앤젤레스 한인회장, 뉴욕 한인회장 등을 동원해 미국 쇠고기의 안전성을 홍보하려던 정부의 선전전에 큰 타격을 주었다.

하숙집 정보 사이트가 정치 토론장으로

프랑스에도 ‘아고라’가 있다. 프랑스 한인 사회에 촛불시위 바람을 일으킨 것은 한인 정보 사이트 ‘프랑스존’(francezone.com)이었다. 이 사이트는 젊은이가 즐겨 찾는 거의 유일한 한인 정보 사이트였다. 평소 하숙방 정보와 아르바이트 정보로 채워지던 이 프랑스존 게시판이, 요즘에는 ‘이명박 탄핵 촉구’ ‘촛불집회 중계방송’ ‘너나 먹어 미친소’ 등 온통 한국 쇠고기 문제를 다룬 글로 도배되었다.
 

ⓒ연합뉴스6월2일 미국 로스앤젤레스 한인 40여 명이 총영사관 앞에서 쇠고기 수입 반대 시위를 하고 있다.

5월28일 이 프랑스존 게시판에 ‘안개비’라는 아이디를 쓰는 한 회원이 한국의 쇠고기 수입 반대 집회를 지지하는 촛불시위를 하자고 제안했다. 유학생과 교포는 이 제안에 갑론을박을 벌였다. 서둘러 촛불시위에 동참하자는 찬성 글부터 한국을 떠난 우리가 굳이 집회를 열 필요가 있느냐는 회의론까지 다양했다. 결국 뜻을 모아 6월1일 트로카데로 인권광장에서 집회를 열기로 했다.

파리 경시청에 집회 신고를 냈던 최경호씨(34·아이디 봄날의봄)는 “한국의 촛불이 외롭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고 힘을 보태주고 싶었다”라고 말했다. 최씨는 자기가 프랑스존 게시판에 올린 집회 공지 글이 순식간에 한국 내 배낭여행 사이트나 포털 사이트 심지어 교회 커뮤니티 같은 곳으로 퍼지고, 이내 ‘프랑스존’ 게시판으로 돌아 옮겨지는 것을 보며 인터넷의 정보 확장 속도에 놀랐다고 한다.

“프랑스존 게시판에 댓글 달린 걸 보고 최소한 20명, 많게는 80명 정도 올 거라 생각했다.” 예상은 빗나갔다. 6월1일 집회에 참석한 한인은 150명가량 됐다. 집회 준비를 도와준 파리 유학생 표 아무개씨(정치학 석사)는 “파리에 사는 한국인이 한자리에 모이는 일은 거의 없다. 2002년 월드컵 때 모인 게 전부였다. 150명이면 정말 많이 온 것이다”라고 평했다. 그는 전날 5월31일 한국 경찰의 폭력 진압 소식이 참여 열기를 더 높인 면도 있다고 봤다. 

에펠탑이 배경으로 보이는 광장에서 6월1일 주최 측은 ‘장관 고시 철회’ ‘폭력진압 규탄’ ‘한국 촛불시위 지지’ 등을 내용으로 하는 홍보물을 전시하고 풍자 만화 등을 내걸었다. 집회 참가자들은 ‘2MB OUT, Democracy IN’ 따위 피켓을 들었다. 돌아가며 자유 발언도 하고 성악 공연, 풍물패 공연을 즐기며 2시간 동안 함께했다.

파리 유학생은 6월7일 오후 5시 에펠탑 근처에 있는 평화의 문(Mur de la Paix)에서 2차 촛불집회를 열었다. 두 번째 집회는 내용이 훨씬 풍부해졌다. 한국 비보이와 프랑스인 배우들이 나와 공연도 했다.

프랑스 말고도 6월7일 세계 각지에서는 한국 촛불시위 지지 집회가 열렸다. 캐나다 밴쿠버 다운타운 미술관, 토론토 노스욕 멜라스트먼 스퀘어 분수대 앞, 영국 런던 리치몬드 테라스, 호주 시드니 하이드파크, 독일 베를린 추모교회 광장, 프랑크푸르트 파울스교회 광장 등에서 재협상을 촉구하는 시위가 열렸다. 이 집회를 성사시키는 데 각 나라 특유의 ‘아고라’가 한몫했음은 물론이다.

기자명 신호철 기자 다른기사 보기 shin@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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