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드림5·18 광주민주화운동 격전지인 옛 전남도청 앞 금남로(위)에서 촛불시위가 계속되고 있다.
서울은 ‘전쟁 중’이라는데 광주는 상대적으로 조용하다. 5·18 광주민주화운동 격전지인 옛 도청 앞 금남로에서 촛불시위가 연일 계속되긴 했지만 ‘쇠고기 협상 철회’ 구호는 금남로를 넘지 못했다. 지난 5월10일, 광주 동구 금남로에서 처음 불을 밝힌 촛불은 4000여 개였다. 이날 주최 측의 예상을 뛰어넘는 대규모 인파가 집회에 참석했지만 이어진 촛불문화제에는 인원이 대폭 줄었다. 5월25일에는 고작 150여 명이 집회에 참가했다. ‘민주화의 성지’라는 광주가 촛불 정국에서는 ‘침묵’하는 듯했다.

“민주화의 성지인데 서울에서 저 정도면 광주는 더 나서야 하는 것 아냐?” 의아해하는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터져나왔다. 표면적으로는 5·18 28주년 기념주간과 일정이 겹치는 데다 인구 수로 볼 때 서울보다 참여 인원이 적을 수밖에 없다는 해석이 나온다. 하지만 무엇보다 ‘공간과 목표의 한계’가 컸다. ‘청계천 광장’이라는 공간과 ‘청와대’라는 목표가 있는 서울과 달리 광주는 금남로밖에 없다. 특히 금남로 일대가 전남도청 이전으로 도심 공동화 현상을 보이고 있어 밤이면 유동인구도 많지 않다. 경찰의 대응도 유순하다. 시위대가 도로를 점거하고 거리 행진을 해도 묵묵히 교통만 통제한다. “목표물이 없고 갈 곳도 없는데 막을 이유가 있겠나”라는 게 경찰의 생각이다. 이 때문에 엉뚱하게도 촛불시위 기간 중 광주 경찰은 시위대를 보호하는 ‘민주경찰’이라며 네티즌의 찬사를 받기도 했다.

주동자 없는 시위가 낯선 광주 시민

‘조직화한 시위’에 익숙한 광주 지역 정서가 새로운 ‘디지털 시위’에 적응하지 못하는 면도 있다. 광주 시민은 ‘남총련’으로 대변되는 조직화한 투쟁 역량 아래 1990년대 중·후반까지 왕성하게 거리를 누볐다. 지금도 누군가 이끌어야 한다는 정서가 남아 있다. ‘주동자’가 없는 자발적 시민참여형 집회인 촛불시위가 낯설 수밖에 없다. 특히 촛불시위엔 인터넷 문자, 동영상 등을 통해 정보를 공유하는 ‘디지털 감수성’이 필수이지만 지역의 인터넷 교감은 아직 부족하다.

관망하는 시민도 많다. 괜히 광주가 나섰다가  되레 ‘역공’을 당하지 않을까 하는 염려가 크다. 지난 대선에서 서울은 과반수(53.2%)가 이명박 대통령을 찍은 반면, 광주는 겨우 8.6%만이 표를 줬다. 애초부터 기대한 게 없으니 ‘그럴 줄 알았다’는 반응이다. 심지어 이명박을 뽑은 국민이 결자해지하라는 속내마저 드러낸다. 

하지만 광주의 민심은 서서히 불타오르는 특징이 있다. 돌이켜보면 1980년 5월 민주화운동 때도 그 시작은 서울이었다. 하지만 5·17 비상계엄 조처 이후 서울을 비롯한 전국이 침묵에 들어갈 때 광주는 계엄군과 충돌하면서 10일간의 항쟁을 시작했다. 1987년 역시 6월10일 국민항쟁 이후 전국이 일주일 만에 소강상태에 빠졌을 때도 광주는 6월19일부터 다시 타올랐다. “광주는 민주화의 고비 때마다 늘 맨 마지막에 시작해 끝까지 불타올랐다. 이번에도 마찬가지다.” 금남로 촛불집회에 참석한 한 시민의 말이다. 이를 증명하듯 6월5일 집회에는 촛불 1000여 개가 타올랐다.

기자명 박준배 (광주드림 기자)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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