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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령공주]의 무대 ‘야쿠시마 원시림’

야쿠시마 원시림을 종주했다. 다양한 기후와 지형이 드넓은 초지와
울퉁불퉁한 바위 언덕, 수령 7200년의 나무들을 품고 있었다. 인간이 간섭을 멈춘 자리에서 자연이 스스로 만들어내는 아름다움은 압도적이었다.

규슈·고재열 기자 scoop@sisain.co.kr webmaster@sisain.co.kr 2014년 12월 10일 수요일 제37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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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야쿠시마(屋久島) 원시림에 가봐야겠다고 마음먹게 된 것은, 나가노 현의 아카사와 자연휴양림(赤沢自然休養林)을 방문한 뒤부터였다. 에도 시대부터 막부 차원에서 관리했다는 아카사와 휴양림도 매우 웅장했다. 근대 이후의 일본 정부 역시 이 숲을 원형 그대로 보존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부러지고 썩은 편백나무가 그대로 방치되면서 숲의 일부로 편입되어 새로운 나무의 숙주가 되어 있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규슈 올레의 다케오 코스에서 만난 녹나무 ‘다케오노오쿠스’와 ‘가와고노오쿠스’는 일본인들이 신성시하는 나무다. 두 나무의 연령은 무려 3000년에 이른다. 다케오 신사에 있는 ‘다케오노오쿠스’에는 금줄이 둘려 있다. ‘가와고노오쿠스’는 500여 년 전 벼락을 맞아 나무 기둥이 대부분 사라졌지만 신물(神物)로 숭배된다.
이런 풍경들에 압도당한 나에게 누군가 야쿠시마 원시림에 대해 속삭였다. 아카사와 숲보다 더 자연 그대로인 곳이 있다고. 그곳에 가면 ‘다케오노오쿠스’와 ‘가와고노오쿠스’의 곱절 넘게 살아온 수령 7200년의 ‘조몬스기(조몬 삼나무)’를 볼 수 있다고 했다. 야쿠시마 원시림은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유명한 애니메이션 <모노노케 히메(원령공주)>의 무대가 된 곳이기도 하다.

   
 
야쿠시마는 일본 규슈 오스미 반도에서 남쪽으로 60㎞ 정도 떨어진 바다에 있는 섬이다. 섬 면적은 제주도의 3분의 1에 조금 못 미치는 504㎢. 섬 둘레는 약 132㎞로 오각형 모양을 하고 있다. 작은 섬이지만, 높이 1936m인 미야노우라다케 등 고봉이 많아 웅장해 보인다. 건너편 항구에서 보면, 어떤 산은 봉우리까지 드러내고 있지만, 어떤 산들은 허리에 구름을 두르거나 흐릿하게 비쳐 신비감을 높인다.
야쿠시마 방문자들은 대부분 당일 코스로 ‘조몬스기(繩文衫)’를 선택한다. 시라타니운스이 계곡(白谷雲水峽)의 등산로 입구를 통해 다녀오는 왕복 22㎞ 코스인데 9시간 정도 걸린다. 이 길을 통해서도 야쿠시마 숲의 신비로움을 충분히 맛볼 수 있다. 그러나 야쿠시마를 잘 아는 사람들은, 요도가와 등산로 입구로 들어간 뒤 하나노에고 늪지를 거쳐 미야노우라다케 정상을 밟고 조몬스기를 보고 오는 종주 코스를 권유한다. 조몬스기 왕복 코스와 거리는 비슷하지만 여러 봉우리를 넘어야 해서 길이 좀 험하다.
야쿠시마 원시림 트레킹 종주는 히말라야 트레킹 정도의 체력이 필요했다. 함께 종주한 동행자들 역시 그렇게 말했다. 새벽 4시30분에 출발했는데 오후 5시 무렵에야 산장에 도착했다. 고생할 가치는 충분하다. 히말라야 트레킹에서 맛볼 수 있는 압도적인 자연 풍광을 선사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고도에 따라 아열대부터 아한대까지 다양한 기후와 지형이 느닷없이 나타난다. 산의 다채로움을 맛볼 수 있는 산으로 중국 황산을 꼽아왔던 한 일행은, 야쿠시마 원시림이 그 이상이라고 평가했다. 야쿠시마 원시림 종주를 마친 일행과 함께 ‘야쿠시마 8경’을 꼽아보았다.

  <div align=right><font color=blue>ⓒ김응용 제공</font></div>하나노에고 늪지대의 바닥은 진흙이 아닌 모래로 이루어져 있다.  
ⓒ김응용 제공
하나노에고 늪지대의 바닥은 진흙이 아닌 모래로 이루어져 있다.
 삼나무 숲길
4차원의 세계로 안내합니다

요도가와 등산로 입구에서 산장을 거쳐 하나노에고 늪지에 이르는 길이다. 곧게 뻗은 삼나무가 일품이다. 등산로에 들어서자마자 울창한 원시림이라 마치 4차원의 관문이라도 통과한 느낌이다. 압도적인 풍광에 취해 카메라를 들이대고 싶은 욕망이 솟구칠 테지만 참는 것이 좋다. 갈 길이 멀기 때문이다. 더욱이 어둑한 새벽에 출발하기 때문에 좋은 사진을 찍기도 힘들다. 야쿠시마에서는 수령 1000년 이상 된 삼나무를 ‘야쿠스기(鹿兒杉)’라고 부르는데 이 지역은 ‘조몬스기’와 ‘윌슨 그루터기’ 구간에 비해 야쿠스기가 적다.
50분 정도 걸으면 요도가와 산장이 나온다. 1박2일 종주를 하는 사람들은 새벽에 산행을 시작하기 때문에 보통 이곳에서 아침 도시락을 먹는다. 산장 주변에 음용수를 얻을 수 있는 계곡이 있기 때문이다. 도시락을 꺼내 먹다 보면 낯선 손님을 맞이하게 된다. 바로 야쿠시마 사슴 야쿠시카다. 일본 본토 사슴보다 체구가 작아서 더 귀여운 야쿠시카는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이 길을 걷다가 자주 마주치는 다른 동물은 원숭이다. 원숭이 역시 사람을 별로 경계하지 않는다.

  <div align=right><font color=blue>ⓒ김응용 제공</font></div>야쿠시마에서 자주 볼 수 있는 사슴 야쿠시카는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김응용 제공
야쿠시마에서 자주 볼 수 있는 사슴 야쿠시카는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늪지와 고사목길
산신령이 여기 다 있네

요도가와 산장을 지나 1시간50분 정도 걸으면 하나노에고와 고하나노에고 늪지대가 나온다. 해발 1700m 이상의 분지에 조성된 늪지는 고사목과 어울려 신기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아침 안개가 자욱하게 내려앉아 있을 때는 더욱 그렇다. 늪지대지만 자세히 보면 바닥이 진흙이 아니라 모래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야쿠시마는 해저화산 폭발로 화강암이 융기해 만들어진 섬이다. 화강암이 풍화작용에 의해 모래가 된 지역이라 계곡물도 상당히 맑다. 알프스 산악지대의 빙하 녹은 물과 비슷한 투명도를 보인다.
이 늪지대부터 고사목이 나오기 시작한다. 우리나라 산에는 정상 부근에 부분적으로 고사목이 있는 데 비해 야쿠시마에는 넓은 지역에 걸쳐 두루 나타난다. 판소리 고전 <변강쇠전>을 보면 장승을 불태운 변강쇠를 혼내기 위해 전국 팔도의 장승들이 회합을 여는 장면이 나온다. 그런데 이 늪지대에 분포된 고사목들을 보면 산신령들이 유엔 총회라도 하는 형세다. 야쿠시마의 최고봉인 미야노우라다케가 보이는 언덕까지 가는 동안 내내 고사목들을 만날 수 있었다.

 정상 초지길
공룡 알 같은 둥근 바위들

고사목 지대를 지나 언덕을 넘으면 거대한 초지가 펼쳐진다. 얇고 낮은 대나무 지대다. 초지는 정상까지 이어진다. 가끔 둥근 바위가 공룡이 알을 낳아둔 것처럼 초지 위에 드문드문 놓여 있다. 한 사람이 좁게 지나갈 만큼의 길이 나 있는데 바닥은 바위다. 바위 위에 흙이 50㎝ 정도 쌓이고 그 위로 초지가 형성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초지길을 따라 올라가다 보면 해발 1936m인 미야노우라다케 정상에 이른다.
미야노우라다케에서 남서쪽의 나카타다케 쪽으로 고개를 돌리면 울퉁불퉁한 바위로 이뤄진 악산 지대를 볼 수 있다. 야쿠시마의 봉우리들은 크게 두 종류다. 정상 부근이 초지인 경우가 있고, 바위가 많고 고사목이 우거진 봉우리도 있다. 한쪽 정상에 올라 다른 쪽 정상을 바라보는 기분이 각별하다.

  <div align=right><font color=blue>ⓒ김응용 제공</font></div>  
ⓒ김응용 제공
  <div align=right><font color=blue>ⓒ김응용 제공</font></div>시라타니 협곡(위)을 걷다 보면 이끼 낀 계곡이 연주하는 물소리를 들을 수 있다. 매끈하게 길을 닦는 대신 버려진 나무와 돌을 활용해 길을 보완했다.  
ⓒ김응용 제공
시라타니 협곡(위)을 걷다 보면 이끼 낀 계곡이 연주하는 물소리를 들을 수 있다. 매끈하게 길을 닦는 대신 버려진 나무와 돌을 활용해 길을 보완했다.
 바위 언덕길
종주 코스 최고의 뷰포인트

미야노우라다케에서 내려오다 보면 맞은편 멀리 히라이시(해발 1707m) 바위 언덕이 나타난다. 외계인 형상으로 구멍이 뚫린 큰 바위도 있다. 이 지점이 바로 야쿠시마 종주 코스 최고의 뷰포인트이다. 미야노우라다케의 웅장한 산세를 그대로 느낄 수 있고 나카타다케와 줄 지어 선 악산들의 풍모도 볼 수 있다. 멀리 언덕 아래로는 고사목들이 사열받듯이 줄지어 있어서 경례를 받아줘야 할 것 같다.
히라이시 언덕의 가장 큰 매력은 푄 현상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다는 점이다. 푄 현상에서, 바람은 높은 산을 타고 올라가며 비를 뿌린 뒤 건조한 상태로 지상에 내려온다. 야쿠시마 정상 부근의 강수량은, 이 푄 현상에 따라 연간 8000㎜에 이른다. 히라이시 언덕에서는 구름이 계곡을 거슬러 미야노우라다케로 올라가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시시때때로 구름의 지형이 바뀌기 때문에 사진을 찍는 맛이 새롭다.

 관목림 통과길
제주 곶자왈과 닮았군

히라이시 언덕에서 신다카쓰카 산장(해발 1501m)에 이르는 길은 관목림이다. 제주도 곶자왈을 연상케 하는 곳인데 이곳 관목림의 주축이 바로 만병초(만병을 고칠 수 있는 풀)다. 일본에서는 샤쿠나게(石南花)라고 부른다. 영어 이름은 로더덴드런(Rhododendron)인데 진달래과 식물로 네팔의 국화이기도 하다(네팔에서는 ‘랄리구란스’라 부른다). 이 관목림을 따라 내려가 신다카쓰카 산장이나 조금 더 밑의 다카쓰카 산장에서 1박 하면 된다.
일본에는 높고(산) 울창하며(숲) 깊은(물) 산이 많다. 다만 해발 1500m 이하에서는 울창한 숲 때문에 시야가 열리지 않아 답답하다. 그 이상 올라가면 나무가 낮아지면서 주변을 관망할 수 있기는 하다. 그러나 해발 1500m 이상은 안개가 잦은 높이이기도 하다. 일본 산의 ‘깊은 물’은 그만큼 비 올 때의 산행이 위험하다는 의미다. 한국에서도 그렇지만 일본 산을 등반할 때는 더더욱 계곡을 조심해야 한다.

 야쿠스기의 길
할머니 나무의 품

신다카쓰카 산장을 나와서 한 시간 정도 내려가면 드디어 ‘조몬스기’를 만날 수 있다. 여기서부터 윌슨 그루터기까지 이르는 1시간30분 정도의 산행이 야쿠시마 종주의 하이라이트 코스다. 그 풍광 중에서도 압도적인 것이 바로 조몬 삼나무다. 웅장하면서도 푸근한 맛이 있다. 나무 옆으로 흰 주름이 있어서 마치 할머니를 보는 듯한 기분이 든다. 한참을 머물게 만든다.
윌슨 그루터기까지 관록 있는 나무들이 계속 나온다. 두 나무가 붙어서 2000년 넘게 해로했다는 부부 삼나무(夫婦衫·후후스기)와 대왕처럼 우뚝한 대왕 삼나무(大王衫·다이오스기)를 만날 수 있다.
윌슨 그루터기는, 일본 관백이자 임진왜란의 원흉인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대불전 건축에 필요한 목재로 쓴다며 삼나무 둥치를 베어버린 뒤에 남은 거대한 그루터기다. 측면으로 구멍이 나 있어서 그루터기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데 상당히 넓다. 대형 몽골 텐트에 들어선 기분이다. 그루터기 상단에는 하트 모양으로 구멍이 나 있다. 관광객들이 그루터기 안에서 밖을 보고 사진을 찍으며 즐기는 관광 명소다.

 산림철도 산책길
가벼운 마음으로 걸어요

윌슨 그루터기에서 내려오면 협궤로 된 산림철도를 만난다. 해발 910m 정도 되는 지역이다. 여기에서 해발 720m 지점의 구소가와 갈림길까지 산림철도를 따라 걷는 길이 야쿠시마 종주 코스에서 가장 편한 길이다. 어깨 위의 짐을 내려놓을 수는 없지만 마음의 짐을 내려놓고 산책하듯 가볍게 걸을 수 있다.
산림철도 길에서 만나는 야쿠스기는 삼대삼(三代衫·산다이스기)이다. 첫 삼나무가 죽고 난 뒤 썩은 그루터기에서 두 번째 삼나무가 자라고, 두 번째 삼나무가 부러져 죽은 자리에서 세 번째 삼나무가 뿌리를 내리고 자란다. 파괴가 바로 재창조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 곳이다. 누군가를 격려할 때 ‘끝날 때까지 끝난 것이 아니다’라는 말을 하는데 ‘끝나고 나서도 끝난 게 아니다’라는 것을 몸으로 보여주는 나무라 할 수 있다.

 이끼와 계곡의 길
귀를 호강시키는 물소리

구소가와 갈림길에서 꺾어 쓰치 고개(979m)를 넘어서면 시라타니 계곡이 있는 곳으로 내려오게 된다. 이 길의 매력은 이끼 낀 계곡과 그 계곡들이 모여서 만든 깊고 맑은 협곡이다. 나무와 흙과 바위로 이뤄진 길을 충분히 만끽한 후에 물로 마무리하는 기분이 산뜻하다. 그동안은 눈이 호강을 했다면 이곳은 귀가 호강을 하는 곳이다. 계곡을 거세게 굽이쳐 흐르는 물소리가 귀를 시원하게 해준다.
또 하나 잊을 수 없는 풍경은 계곡의 이끼 낀 바위들이 만들어내는 신비로움이다. 애니메이션 <겨울왕국>에 나온 바위 요정 트롤들이 웅크리고 앉아 있는 모양새다. 주로 북유럽에서 볼 수 있는 이끼 계곡을 시라타니 계곡에서 두루 만끽할 수 있다. 이끼 계곡을 보면서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이 여기를 보고 가서 <모노노케 히메>를 구상했다는데 왜 <모노노케 히메>밖에 못 만들었나’ 하는 건방진 생각도 해보았다. 그만큼 이곳의 자연이 스스로 만들어내는 아름다움이 압도적이다.

야쿠시마 원시림 트레킹에서 자연이 보여준 아름다움과 함께 감동적인 모습은 인간의 간섭을 최소화했다는 것이다. 일본의 경제력이나 기술력이면 충분히 편리를 도모할 만한데도 불편한 채로 그냥 두었다. 대신 버려진 나무나 돌을 활용해 길을 보완했다. 돌보지 않는 듯 돌보았다. 자세히 보면 세심한 배려가 느껴졌지만 티를 내지 않는 것이 더 인상적이었다. 야쿠시마에서 마지막으로 기억해야 할 모습은 자연과 공존하려는 인간의 자제력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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