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IN 안희태이번 시위에는 기자 뺨치는 기록자가 기록적으로 늘었다.
청와대로 향한 촛불시위 행렬이 경찰의 물대포에 막혀 진퇴를 거듭한 지 며칠 뒤, 한 블로그에 흥미로운 글이 올라왔다. 광화문 일대를 찍은 구글 어스 위성사진에 경찰 병력 배치 지점과 이동 경로를 표시하고, 촛불시위 행렬이 이를 피해 효과적으로 청와대까지 다다를 수 있는 방법을 설명한 글이다. 경찰은 20년 전과 다름없이 여전히 무전기로 연락을 주고받고 있는데, 네티즌은 위성사진을 활용하는 수준에까지 이르렀다. 경찰과 네티즌의 디지털 격차가 얼마나 큰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2002년과 2004년의 촛불시위와 비교하면 디지털 매체 활용도는 놀라운 수준으로 진화했다. 당시 디지털 매체의 구실이란 촛불시위 일정을 전파하고, 인터넷 현장 생중계를 보면서 댓글을 달거나 시사 패러디를 만들어 올리는 일이 대부분이었다. 이에 비해 이번 시위에서는 디지털 매체의 활용은 훨씬 다각화·고도화되었다.

시번 시위 참가자의 첫 번째 유형은 말 그대로 ‘참가자’이다. 거리에서 행진을 벌이는 직접 행위자이다. 현장에서는 휴대전화 문자메시지로 다른 참가자와 긴밀하게 소통하고, 집회에 참석하지 않은 가족 및 친구에게 현장 상황을 알리고 참가를 독려한다. 과거 촛불시위에서도 가장 흔하게 볼 수 있었던 유형이다.

두 번째는 ‘기록자’이다. 이들은 주변부에 포진해 생생한 현장의 모습을 디지털 카메라와 캠코더로 찍어 인터넷에 올린다. 웹캠이 장착된 노트북을 들고 ‘아프리카’ 사이트를 통해 집회 장면을 생중계하기도 한다. 가두행진이 진행되면 대열의 선두로 나가 마주한 경찰을 카메라에 담는다. 채증하는 경찰을 역채증하고, 경찰이 시민을 폭행하는 장면이 포착되면 재빨리 카메라 렌즈를 들이댄다. 그러다 보니 이런 구호도 등장했다. “때릴 때 조심해라, 찍히면 인터넷 스타.” 촛불시위에 대한 보수 언론의 악의적 보도가 전혀 먹혀들지 않는 데는 이들 시민 저널리스트의 공헌이 크다.

     
 
집단지성 형성하는 웹 2.0과 닮은꼴

세 번째 유형은 ‘분석자’이다. 기록자가 인터넷에 올려놓은 사진과 동영상을 판독해 폭행 경찰의 소속과 신분을 추적해내는 놀라운 수사력을 보여주는 사람들이다. 또 집회 참가 때 챙겨야 할 물품을 꼼꼼히 챙겨 인터넷에 게시하고, 경찰에 연행되었을 때 어떻게 대처해야 좋은지를 정리해 알려주기도 한다. 앞서 소개한 구글 어스 위성사진을 올린 블로거 역시 분석자의 범주에 해당하는 사람이라 하겠다.

네 번째 유형은 ‘전파자’이다. 이들은 주로 블로그와 게시판을 무대로 집회 참가 후기를 적거나 정부와 경찰의 태도를 규탄하는 글을 써 올린다. 어디선가 새로운 소식이 들려오면 이를 인터넷 곳곳에 부지런히 퍼 나르기도 한다. 광우병이나 촛불시위에 대해 다른 의견을 밝히는 사람과 치열한 온라인 토론을 벌이는 것도 이들의 몫이다. 인터넷상의 의제 설정과 여론 조성을 주도하는 ‘빅 마우스’들이다. 이 네 가지 유형에 속하는 사람들이 엄밀히 구분되는 것은 아니다. 참가자가 기록자가 되기도 하고, 다시 집에 돌아와서는 분석자나 전파자 임무를 수행하기도 한다. 이번 촛불시위를 디지털 시위라 부를 만한 또 하나의 이유를 여기서 찾을 수 있다. 그동안 인터넷 공간에서 형성되어왔던 온라인 문화의 특성이 오프라인 집회에 고스란히 반영된 것이다.

조직적 지도부도 없고 사전에 기획된 프로그램도 없는 촛불시위지만 그 안에서 무수한 내러티브(서사 구조)가 만들어진다. 이는 웹2.0의 기본 명제인 ‘플랫폼으로서의 웹’을 연상시킨다. 플랫폼으로서의 웹이란 누구나 자유롭게 오가며 이용할 수 있는 열린 공간의 웹 환경을 뜻한다. 위키피디아의 사례에서 보듯 플랫폼으로서의 웹을 통해 수많은 이용자가 다양한 콘텐츠를 만들어내고, 이것들이 모여 거대한 ‘집단 지성’을 형성한다는 원리다. 촛불시위 현장에서는 연일 다양한 사람이 끝없이 자유 발언을 쏟아내고, 재기발랄한 문구의 피켓과 즉흥 구호가 광장 가득히 흘러넘친다. 여기에 촛불소녀, 예비군 오빠, 유모차 부대가 차례로 주인공으로 등장해 계속해서 새로운 내러티브를 생산한다. 플랫폼으로서의 웹이 오프라인 광장에서 구현되는 셈이다. 돌이켜보면 웹2.0의 철학이라 할 참여·자율·개방·공유 따위 키워드는 동시에 민주적 가치의 핵심 키워드이기도 하다. 지금의 디지털 환경이 민주적 가치를 확장하는 데 매우 유리한 방향으로 형성된다는 이야기다. 그리고 그 실체가 촛불시위 현장에서 확인되었다. 한편 가두시위 행렬의 움직임은 인터넷의 하이퍼링크 흐름과 아주 많이 닮았다. 막히면 돌아가고, 또 막히면 즉석에서 다시 방향을 바꾸고, 그래도 또 막히면 몇 갈래로 흩어졌다 어느 사이 다시 모여드는 시위대의 예측 불가능한 행보는 선형적 행진에만 익숙했던 경찰을 혼란에 빠뜨렸다. 그동안 시위라면 이력이 난 운동권조차 단 한번도 돌파하지 못했던 광화문 철벽 저지선이 아마추어 시위대의 하이퍼링크 흐름에 의해 한순간에 무력화된 순간이다. 극한 상황에서 빛나는 네티즌 유머 감각

놀이와 저항의 화학적 결합 역시 온라인 문화에서 비롯한 현상이다. 즉석 길거리 공연과 함께 촛불 축제가 펼쳐지고, 연인이 촛불 데이트를 즐기는가 하면, 오랜만에 모인 친구끼리 촛불 동창회를 열기도 한다. 극한상황이 닥치면 네티즌 특유의 유머 감각이 한층 빛을 발한다. 마이크 들고 진압 작전을 예고하는 경찰서장에게 “노래해”를 외치고, 물대포를 퍼붓는 살수차를 향해서는 ‘때수건’과 ‘온수’를 주문한다. 거리를 가로막은 경찰 버스에 불법주차 스티커를 붙이고, 경찰에 포위되면 제 발로 경찰버스에 들어가 기념사진을 찍으며 ‘닭장차 투어’를 즐기는 역발상을 꺼낸다. 1980년대식 엄숙한 시위 문화 대신 감성과 재미를 추구하는 유쾌·상쾌·통쾌한 네티즌 정서가 새로운 시위 문화를 창출해내고 있다.

하지만 무엇보다 가장 큰 근본 변화는 시민 참여 패러다임의 대전환이 일어나는 점이다. 지금까지 전통 시민 참여 방식은 가로등 모델에 비유할 수 있다. 붙박이로 서 있는 가로등이 밤새 어둠을 밝히듯 정당이나 시민단체, 이익단체 등 상시 조직체가 시민 참여의 중심이 되는 형태였다. 반면 지금 광화문과 인터넷 공간을 횡단하며 전개 중인 시민 참여 방식은 크리스마스 트리를 장식하는 점멸등 모델이라 하겠다. 점멸등을 구성하는 개개의 불빛은 비록 미약하기 짝이 없으며, 끊임없이 켜짐과 꺼짐을 반복하는 불안정한 존재이다. 그러나 이런 점멸등 하나하나가 네트워크로 연결되자 다른 어떤 불빛보다도 화려하고 아름다운 모습으로 크리스마스 트리를 밝혀준다. 이것이 바로 온라인 네트워크의 위력이다. 작은 점멸등이 온라인 네트워크로 정보를 교환하고 의견을 나누며 힘을 모아 행동해 나간다. 그래서 지금 오프라인 광장을 수놓는 저 많은 촛불은 점멸등 모델이라는 새로운 디지털 시민 참여에 대한 아날로그적 메타포이기도 하다.

기자명 민경배 (경희사이버대 교수·NGO학과)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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