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중·동에 대한 불신이 커지고 있다. 위는 지난 5월28일 조선일보사 앞에서 열린 광우병국민대책회의의 왜곡 보도 규탄 기자회견.
냉정할 필요가 있다. 사실을 있는 그대로 봐야 한다. 의미심장한 움직임인 건 틀림없다. 촛불집회가 열리는 곳에서 조·중·동과 일부 방송을 규탄하고, 나아가 절독운동과 광고주 항의운동을 전개하는 건 분명 눈에 띄는 움직임이다. 경향신문과 한겨레에 격려 광고가 몰리고 자발적 구독자가 증가하는 것 역시 주목할 만한 움직임이다.

다음 ‘아고라’가 행동의 진원지가 되고 블로그가 의제 전파의 실핏줄이 되는 것 또한 놓쳐서는 안 될 움직임이다. 인터넷 신문뿐만 아니라 1인 미디어가 촛불집회를 생중계하면서 수백만 클릭을 기록하는 것 역시 획기적인 움직임이다.

그렇다고 ‘경천동지’급 변화로 평가할 수는 없다. 매체 영향력에 지각변동이 오고 매체 지형에 대변화가 올 것처럼 몰아가는 일각의 분석은 ‘오버’다. 수치가 그렇게 말한다. 촛불집회가 상승일로를 달린 5월 한 달 동안의 언론사 사이트 페이지뷰(다음 디렉토리 기준)를 보면 안다. 촛불집회 상승기류를 타고 경향신문과 한겨레의 페이지뷰가 증가했지만 그 수치가 100만 단위를 넘지 못했다. 반면 촛불집회 난기류를 맞아 흔들렸던 조·중·동의 페이지뷰는 1000만 단위를 유지했다. 5월 마지막 주에 수직상승을 하며 꼭짓점을 기록했던 한겨레의 페이지뷰가 1200만 회였던 반면 조·중·동 가운데 가장 실적이 떨어지는 동아일보의 5월 최저 페이지뷰는 3000만~4000만 회를 상회했다.

중간 정리를 하면 이렇다. 흥과 망이 교차하는 게 아니다. 성과 쇠가 엇갈리는 것도 아니다. 단지 어느 한쪽에서 흥성의 움이 싹트고 있을 뿐이다. 물론 달리 볼 부분은 있다. 이는 객관적 수치로 설명할 수 없는 ‘질의 영역’이다. 의제 선점·설정 기능이다.

이 부분에서는 확연히 차이가 난다. 경향신문과 한겨레, 그리고 MBC가 의제를 선도한 반면 조·중·동은 의제 설정에서 실패했다. 다음 아고라와 블로그가 이들 매체가 설정한 의제를 증폭했고, 조·중·동이 설정한 의제는 이들의 유격전에 무력화됐다.

조·중·동이 재역전할 가능성 있어

이 점만 놓고 보면 흐름이 뚜렷하다. 흥망과 성쇠가 분명히 갈린다. 매체시장이 아니라 여론시장이 크게 출렁이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것을 최종 결론으로 삼을 수는 없다. 의제 설정력의 역전 현상은 쇠고기 국면에 한정해서 나타나는 것이다. 이런 현상이 이명박 정부 5년 내내 지속된다고, 그래서 조·중·동이 그로기 상태에 몰릴 것이라고 단정할 근거가 현재로서는 없다. 오히려 조·중·동이 재역전을 꾀할 여지를 부정할 수 없는 상황이다. 

의제 설정력은 ‘정보’ 수집력에서 갈린다. 경향신문과 한겨레, 나아가 일부 방송과 인터넷은 이 점에서 조·중·동을 따라잡기 힘들다. 편집국 기자 수를 놓고 하는 얘기가 아니다. 정보 출처, 즉 (고급) 취재원 접근도를 두고 하는 말이다. 대통령직인수위원회 시절부터 지금까지 동아일보가 특종 행진을 해온 점을 보면 안다. 조·중·동은 가깝고 다른 매체는 멀다.

경향신문과 한겨레에 성원이 쏟아지고 있다. 위는 ‘경향신문을 사랑하는 모임’ 온라인 카페.
이렇게 얘기하고 나니 부연할 게 생겼다. 그럼 경향신문·한겨레·MBC는 어떻게 쇠고기 의제를 선점할 수 있었을까?

비결은 두 개였다. 하나는 의지. 조·중·동은 이 잡듯이 뒤질 의지가 없었지만 경향신문이나 한겨레는 차고 넘쳤다. 그래서 미국 육우협회 홈페이지를 검색했고 정부 문서를 뒤졌으며 결국은 찾아냈다. 비밀금고에서 문서를 찾아냈다기보다는 이미 공개된 문서에서 ‘보도 가치’를 발견한 것이다.

둘째는 문제의식이다. 쇠고기 협상 결과에 대한 문제의식이 이미 충분히 제기된 주장을 재구성했고 거기서 문제의 줄기를 세웠다. ‘사실’이 아니라 ‘해석’에서 성과를 냈다. 하지만 조·중·동에는 이게 없었다. 이들에게 쇠고기 협상은 국익을 위해, 한·미 FTA를 위해 일부 문제가 있더라도 넘어가야 하는 사안이었다.

어쩌면 같은 얘기인지도 모른다. 의지와 문제의식은 동전의 앞면과 뒷면 정도의 차이에 불과할지 모른다. 그런데도 굳이 나눈 이유가 있다. 의지가 정파적 지향성에서 비롯했다면 문제의식은 사안을 대하는 태도에서 기인했기 때문이다. 간단히 말해 이명박 정부를 향한 태도가 개별 사안에 대한 대응력을 규정해버린 것이다. 바로 이게 답이다. 매체 지형이 근본으로 변화할 것인지를 가르는 관건이 바로 이것이다.

경향신문이나 한겨레는 준비가 돼 있다. 이명박 정부에 대한 기본 방침을 ‘감시와 견제’로 세워둔 터다. 개별 사안에 기민하게 대응할 태세도 갖추었다. 이명박 정부라는 밭에 권력 감시·견제라는 씨를 뿌릴 만반의 준비를 했다.

새로운 게 아니다. 조·중·동이 지난 10년 동안 유지해온 전략이자 생존 방법이다. 이 방법을 경향신문과 한겨레가 채택한 것이다. 궁금해진다. 그럼 왜 조·중·동은 지난 10년 동안 환호를 받지 못한 걸까? 경향신문과 한겨레는 왜 지금 뜨거운 지원을 받는 걸까?

정치와 언론, 경계선 넘나들며 ‘교호작용’

결국은 국민 태도의 차이다. 정권에 대한 국민 태도, 정책에 대한 국민의 견해 차이다. 김대중 정부나 노무현 정부는 그나마 실정을 상쇄할 요소를 갖고 있었다. 김대중 정부는 햇볕정책, 노무현 정부는 정치개혁이라는 버팀목을 가졌다. 더불어 개개 정책에 대한 국민 평가가 지금처럼 극단적인 악평으로 흐르지는 않았다. 

이게 차이다. 조·중·동은 그나마 국민적 지지를 확보한 사안에 대해 정파의 시각으로 접근했다. 국민적 평가보다 정파적·이념적 시각을 우선했다. 덕분에 ‘단골’의 결속력을 강화시킬 수는 있었지만 외연을 넓히지는 못했다. 반면 경향신문과 한겨레는 국민 공감대를 확보한 사안을 국민의 입으로 대변하고 있다. 정파에 대한 국민 염증이 한계치에 도달한 상황을 반영해 정파를 가리지 않고 쓴소리를 한다. 그 덕에 외연을 확장하고 있다.

관건이 자연스레 도출됐다. 아이러니하게도 매체 지형을 좌우하는 힘은 이명박 정부에 있다. 이명박 정부가 어떤 정책을, 어떤 절차를 밟아 전개하느냐에 따라 매체의 의제 설정력이 달라지고 시장 입지가 달라진다. 이명박 정부의 정책 성과에 따라 정치 지형이 달라지면서 매체, 언론의 정파성도 규정된다.
부인하고 싶지만 결코 부인할 수 없는 현실이다. 매체 또는 언론과 정치는 이미 융합돼 있다. 두 영역의 경계선을 넘나들며 교호작용을 한다. 쇠고기 국면에서 나타나는 매체 지형의 변화는 전조다. 정치와 언론의 교호작용이 본격 시작되고 있음을 알리는 신호탄이다.

기자명 김종배 (시사 평론가)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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