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메라 앞에서는 대체로 어색하다. 김현아씨(47)도 마찬가지였다. 포즈를 취하면서도 손 둘 곳을 몰랐다. 카메라 앞에 서는 일만큼 김씨를 머쓱하게 만드는 건 자주 받는 질문이다. 몇 나라를 여행했는지, 가장 기억에 남는 여행지는 어디였는지 묻곤 했다. 특별히 세어보지 않았다. 그녀는 청소년 여행 대안학교 ‘로드스꼴라’ 교사다. 한 번쯤 질문에 제대로 답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묵은 원고를 뒤적였다. 학교를 만드는 데 영감을 주었던 여행지를 정리해 에세이집을 냈다.

‘로드스꼴라’가 있는 서울 영등포 하자센터에서 그녀를 만났다. 문을 연 지 6년. ‘로드스꼴라’는 ‘길 위에서 배우고 놀고 연대하는 학교, 여행을 통해 배움을 실현하는 학교’를 표방한다. 첫 학기, 7~8명의 인원을 생각하고 입학생을 모집했다. 예상보다 많은 이가 몰렸다. 그때부터 20명 전후의 학생 수를 유지하고 있다. 한 학기에 한 번, 한 달 정도 여행을 간다.

ⓒ시사IN 신선영<나의 여행 이력서>의 저자 김현아씨는 청소년 여행 대안학교 ‘로드스꼴라’ 교사다.
김씨는 1990년에 대학을 졸업했다. 외국 여행을 많이 가지 않던 시기였다. “여행은 우리 시대의 욕망이 아니었다. 지금처럼 돈을 벌지 않아도 됐고 많이도 필요 없는 세대였다. 데모만 하면 되었다. 동기가 실종되기도 하는 불안한 시대였지만 지금처럼 다양한 욕망에 휘둘릴 필요가 없었다.” 스물여섯. 처음으로 해외여행을 했다. 중국이었다. 몰락한 사회주의의 실제를 목격하고 싶었다. 이후 아프리카에 들렀다. 풍경은 아름다웠고 너무 자유로웠다. ‘나만 행복해도 되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죽은 선배와 동기들이 떠올랐다. ‘죽지 않고 살아 있다면’ 하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같이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게 아닌지 빚처럼 지니고 있는 생각이다.

아프리카에 다녀온 후, 선배의 제안으로 소수자들의 인권을 위한 시민 네트워크 ‘나와 우리’를 만들었다. 한국군의 베트남 민간인 학살을 처음 세상에 알렸다. 경계를 넘나드는 경험이었다. 죽은 자와 산 자, 남자와 여자, 베트남과 한국이라는 경계였다. 한 문제를 깊숙이 파고든 경험은 혹독한 훈련이 되었다.

인생에서 세 가지가 늘 함께했다. 글 쓰는 사람으로서의 정체성이 가장 중심에 있었고 그 과정에서 생계를 위해 논술, 글쓰기 과외 등을 틈틈이 했다. 1980년대 대학 생활을 보낸 이로서, 시대의 고민을 같이하는 일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강박도 있었다. 일마다 시련과 갈등이 있었지만 누가 시킨 게 아니라 스스로 시작했기 때문에 원망할 대상이 없었다.

한국군에 강간당한 베트남 호아수언의 할머니, 부모를 잃은 아프리카 말라위의 열세살 소녀 수피아. 머문 곳곳마다 여성에 대한 관심이 눈에 띈다. 같은 사건이라도 남성과 여성의 기억과 언어가 달랐다. 베트남 남성들이 한국군의 만행을 증언하는 동안 멀리 부엌 한쪽에 모인 여성들이 수줍지만 무언가 이야기하고 싶은 눈빛으로 그녀를 쳐다봤다.

여행은 ‘공통의 감각’을 찾아가는 과정

돌이켜보면 여행은 나중을 예비하기 위한 시간이었고 지금의 자신을 있게 만든 퍼즐 조각이었다. 그녀에게 여행은 ‘공통의 감각’을 찾아가는 과정이다. 공정여행이라는 말을 쓰지만 여행을 다니다 보면 결국 공정한 여행자가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물이 귀한 지역에서 한가득 물동이 지고 오는 사람을 보면 필연적으로 물을 아껴야겠다고 생각하게 된다. 몸이 깨달아가는 과정이다. 공통의 감각은 그런 의미다. 여행지에서 어린 소녀를 오래 들여다보면 느끼게 되는 감각 같은 거다.

최근 학생들과 4박5일 순천과 여수에 다녀왔다. 너무 좋았다고 반복해 말했다. 억새와 음식 모두 완벽했다. 아이들은 대학에 진학하고 싶어한다. 여행을 하다 보면 배우지 않으면 안 되겠구나 하는 걸 체감하게 된다고. 김씨의 다음 책은 여행학교에 대한 이야기가 될 것 같다.

기자명 임지영 기자 다른기사 보기 toto@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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