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부업계의 여심(女心) 잡기가 점입가경이다. 대부업체 러시앤캐시는 지난 3월10일 ‘여자愛드림’이라는 여성전용 대출상품을 출시하고 케이블 텔레비전 등을 통해 광고를 쏟아부었다. 지난 2개월간 전체 광고비의 절반 수준인 5억원가량이 이 상품에 집중됐다. 경쟁 업체인 리드코프·원더풀 등도 뒤를 이어 여성전용 상품을 내놨다. 또 다른 대부업체인 미즈사랑은 아예 여성전용 대출회사를 표방한다. 제2금융권도 가세했다. HK상호저축은행은 5월1일 ‘HK119레이디’를 출시하며 여성전용 대출시장에 뛰어들었다. 100만원 단위의 소액 신용대출을 주력으로 하는 서민금융 시장에서 여성 고객이 한껏 주목되는 모양새다.

여성 대출은 대출시장의 ‘블루오션’이다. 대부업체들은 여성전용 대출상품을 잇따라 출시했고, 제2 금융권도 가세했다.
왜 여성 고객일까. 대형 대부업체의 모임인 한국대부소비자금융협회 이재신 사무국장은 “여성의 연체율이 상대적으로 낮기 때문이다”라고 설명했다. 남성에 비해 여성이 ‘덜 떼먹는다’는 얘기다. 한 선두권 대부업체는 “구체적인 수치는 밝힐 수 없지만, 여성의 연체율은 남성에 비해 80% 수준이라고 보면 된다”라고 귀띔했다. 대부업체 시각에서 보면 여성은 ‘우량고객’인 셈이다.

하지만 대부업체와 여성 고객은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사이와는 거리가 멀다. 여성이 대출금을 ‘덜 떼먹는’ 이유부터가 대부업체의 빚 독촉이 무서워서다. 서울에서 개인 사업을 하는 최아무개씨는 대부업체로부터 200만원을 빌렸다가 빚 독촉을 하는 직원에게 큰 봉변을 당했다. 가게에까지 찾아온 직원이 목덜미를 잡고 흔드는 등 폭행과 폭언이 반복됐다. 이제 그녀는 그 대부업체의 광고만 봐도 사지가 벌벌 떨린다. 또 다른 여성 채무자 김 아무개씨. 그녀는 휴대전화에 항상 녹음기를 연결해둔다. 대부업체의 빚 독촉 전화가 언제 날아들지 몰라서다.

‘경제민주화를 위한 민생연대’ 송태경 사무처장은 “위압적인 채무 독촉에 여성이 더 취약하기 때문에 대부업체는 남자보다 여자를 더 ‘쉽게’ 생각한다”라고 말했다. 허락 없는 방문, 잦은 전화 독촉, 주위에 채무 사실을 알리는 따위 행위도 모두 불법이다. 하지만 경찰은 직접 폭력 같은 문제가 불거지지 않는 한, 돈 문제는 당사자끼리 해결하라며 돌아서기 일쑤다. 채무자 김 아무개씨가 폭언과 무단 주거침입으로 신고한 불법 빚 독촉 사건 두 건도 석 달이 지나도록 수사가 진행조차 되지 않았다. 여성이 대부업체의 ‘우량 고객’이 될 수밖에 없는 이유다.

무심코 빌렸다가 21개 업체서 ‘돌려막기’

‘낮은 연체율’의 비밀은 또 있다. 대부업체는 연체고객에게 ‘대출 돌려막기’를 권하곤 하는데, 이에 여성이 응하는 경우가 더 많다. 서울에서 여섯 살, 네 살 된 자녀 둘을 키우는 전업주부 현 아무개씨는 지난해 12월 남편으로부터 이혼소송을 당했다. 2005년 9월 대부업체로부터 200만원을 빌리면서 시작된 빚이 2억원까지 불어난 탓이다. 현씨는 첫 대출금을 갚고 생활비도 보태려고 중개업체 여섯 곳으로부터 무려 21개 대부업체를 소개받아 ‘대출 돌려막기’를 했다. 대부업체가 빚을 받아낼 때 사용하는 전형적인 수법이다.

‘법조치’ 따위 표현은 여성 대출자에게 특히 부담이 된다(위 왼쪽). 미니 홈페이지에 대부업체 이름을 남기는 것도 불법이다.

진보신당 민생경제본부에서 대부업 관련 상담을 맡았던 김진희씨는 “대부업체 사이에도 서열이 있다”라고 말했다. 텔레비전 광고에서 흔히 보는 대형 대부업체 아래에는 중형 대부업체가 존재하고, 다시 그 아래에는 불법 영업도 서슴지 않는 ‘일수 업체’가 있다. 광고로 이미지가 좋은 대형 대부업체에서 돈을 빌린 채무자도 결국에는 일수 업체까지 흘러갈 수밖에 없는 구조다. 대부업체가 아랫단계 업체에서 대출을 받으라고 종용하며 ‘돌려막기’를 사실상 강요하기 때문이다. 대형 대부업체는 법 테두리 안에서 영업한다고 주장하지만, 돈을 빌린 이들이 결국 폭력적 빚 독촉에 노출될 위험이 높은 것도 그래서다. 유명 대부업체로부터 대출을 시작한 현씨는, ‘돌려막기’를 위해 돈을 빌렸던 아랫단계 업체의 강권에 못 이겨 남편의 인감도장을 빼돌려 집을 넘기기까지 했다.

“남성은 채무가 부담스러울 때 곧바로 상담을 받는 반면 여성은 혼자서 어떻게든 해보려고 하다가 문제를 키우는 경우가 많다.” 김진희씨가 들려준 상담 경험담이다. 실제로 김씨를 찾아왔던 여성 채무자 대다수는 2년 이상 빚을 지고 10개가 넘는 대부업체와 얽힌 장기 채무자였다. 김씨는 “여성들은 할 수 있는 건 다 해보고, 그것도 안 되면 할 수 없는 것까지도 해보고 나서야 겨우 상담을 받을 용기를 낸다”라며 안타까워했다. 여성은 대부업체가 종용하는 ‘대출 돌려막기’에 더 쉽게 휘둘린다는 얘기다. 개별 대부업체 처지에서 보면 연체율이 낮을 수밖에 없다.

대부업체의 전횡에 특히 취약한 이들이 전업주부다. 남편에게 알리겠다는 한마디에 서슴없이 ‘대출 돌려막기’를 선택하는 경우가 대다수다. 이 아무개씨는 딸을 해외 유학을 보낼 여유가 되는 중산층 가정의 전업주부다. 대부업체와 인연이 없을 법한 이씨는 150만원을 대부업체를 통해 빌렸다.

“남편이 아줌마 빚 있는 거 알아요?”

“유학비는 남편이 마련했지만, 유학 가는 딸을 위해 이것저것 챙겨주다 보니 그 정도가 들었다. 남편이 경제권을 틀어쥐고 있어 대부업체 외에는 방법이 없었다”라고 한씨는 말했다. 요즘 그녀는 연일 불어나는 이자보다 “남편은 이 빚을 알고 있느냐”라는 대부업체의 압박이 훨씬 더 부담스럽다.

한 대형 대부업체는 “여성 대출은 주부와 직장인의 비중이 큰 차이가 없다”라고 밝혔다. 직장인과 전업주부의 신용 격차를 생각하면 납득이 가지 않는 얘기다. 참여연대 김동언 간사는 “대부업체가 소득이 없는 주부에게 신용대출을 서슴없이 해주는 건 받아낼 자신이 있기 때문이다”라고 짚었다. 

대부업으로부터 피해를 입은 여성이 사회문제로 떠오르는 데는 적어도 1년 이상이 걸린다. 최근 출시된 여성전용 대출상품이 불러올 파장은 그래서 더 가늠키 어렵다. 성실하게 채무를 갚아 나가는데도 빚이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불어난다면, 가족과 상의하고 상담기관의 도움을 받아 파산이나 개인회생 등 구제 절차를 밟는 것이 중요하다고 전문가들은 입을 모았다.

기자명 천관율 기자 다른기사 보기 yul@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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