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IN 안희태시민은 광장에 빈 손으로 나오지 않는다. 세대에 상관없이 디카·폰카·캠코더로 축제 같은 집회를 기록하고 퍼뜨린다


5월28일 밤 10시30분, 서울 청계광장 입구를 전경들이 막아섰다. 스물두 번째 열린 촛불문화제가 막 끝난 시점이었다. 문화제 참석자는 물론이고 우연히 그곳을 지나던 시민의 귀갓길까지 막혔다. 누군가 비아냥거렸다. “너거(전경)들 촛불에 딜(데일)까 봐 중무장하고 나왔냐?” “ㅋㅋㅋㅋㅋㅋ” 사람들이 웃었다. 아기를 업은 여성이 전경 앞에서 발을 동동 굴렀다. 4·4조의 즉석 구호가 결정됐다. “애 엄마는 보내줘라!(반복)”

비아냥대고, 웃고, 구호를 외친 사람들은 현장에 없었다. 사실 각자의 집에 앉아 채팅하고 있다. 하지만 이들은 엄연히 촛불시위에 ‘참석’하는 중이다. 인터넷으로 생중계되는 집회 현장 동영상이 이들의 눈과 귀가 됐다. 청계광장에서 누가 재미있게 ‘자유발언’을 하면 같이 웃고, 전경이 도로에 방패를 찍으면 함께 공포에 질리고, 청소년이 연행되는 걸 보고 눈물을 흘렸다. ‘입’도 있다. 생중계 화면에 위험한 상황이 포착되면 거리에 나간 친구에게 전화를 하거나 문자 메시지를 보내 알린다. 2008년 대한민국, 이명박 정권은 ‘재택(在宅) 집회’라는 새로운 현상을 만들어냈다.

경찰이 발표하는 집회 참가자 수는 이제 별 의미가 없다. 하루 평균 33만(중복 포함) 시청자가 인터넷 개인 방송 사이트 ‘아프리카’에 들어가 촛불집회 현장을 지켜봤다. 동시 시청자 수도 최대 3만명에 이른다. ‘오마이TV’ 생중계 클릭 수는 하루에 50만 번(중복 포함)을 넘기고 ‘민중의 소리’ 방송 서버에는 ‘버틸 수 있는 한계치의 두 배’가 넘는 과부하가 걸렸다. 재택 집회 참가자는 동영상이 끊기면 ‘라디오21’에서 현장음이라도 듣거나, 다음 아고라 등에 들어가 “지금 집회 상황 아시는 분?”이라며 정보를 주고받았다.

시민은 첨단 집회, 경찰은 88년식 대응

온라인 집회가 오프라인 집회로 번지는 건 순식간이다. 경남 김해에서 공중보건 의사로 지내는 민 아무개씨(32)는 지난 5월27일 새벽, 생중계 진행을 하다 전경에게 맞았다는 진중권 중앙대 겸임교수의 목소리를 듣고 “너무 열 받아서” 다음 날 퇴근 뒤, 집회 참석을 위해 서울행 KTX를 탔다. “소심한 주부라 촛불문화제에 나올 생각이 없었다”라던 이영숙씨(38)도 5월26일 새벽 신촌에서 전경과 몸싸움을 벌이던 친오빠 목소리를 라디오 생중계로 듣고 다음 날 청계광장에 나왔다.

시민은 빈손으로 나오지 않았다. 5월27일, ‘아프리카’에서 인터넷 개인 방송국을 꾸리는 회사원 방호석씨(35)는 노트북 세 개와 캠코더 두 대를 가지고 나왔다. 캠코더로 찍은 영상을 실시간으로 보내며 시청자에게 재기 넘치게 현장 상황을 전했다. “와, 전경들 주차요원 하면 잘 하겠어요. 아주 틈 하나 없이 딱딱 잘 붙여서 시민이 가는 길을 막아놨어요.” 휴대전화 콘텐츠 업체에 다니는 이응선씨

‘재택 집회’ 참가자는 집에서 생중계 영상을 보며 정보를 주고받는다.

(29)는 가수 인터뷰 등을 찍을 때 사용하던 회사 캠코더를 빌려서 나왔다. “인터넷에서 보고 나도 찍어보고 싶었다. 회사 동료들도 들고 나가보라고 하더라.” 나이도 중요치 않다. 안중규씨(66)는 인터넷에서 경찰의 무자비한 진압 동영상을 보고 “피가 끓어서” 작은 캠코더를 들고 시위대에 참가했다.

카메라와 노트북, 와이브로 무선 인터넷으로 무장한 시민은 ‘평화집회 지킴이’ 노릇을 톡톡히 한다. 서울 종각역 근처에서 시민 진압이 시작된 5월28일 오전 1시30분, 대학생 이 아무개씨(21)는 와이브로 모뎀을 청색 테이프로 꽁꽁 묶어놓은 웹캠 내장 노트북을 머리 위에 높이 들고 시위대 선두로 뛰어들었다. 이씨 앞에서 벌어지는 전경과 시위대의 몸싸움은 실시간으로 인터넷을 타고 흘렀다. 전경이 시민을 연행할 때마다 시민은 ‘연예인이 나타난 것처럼’ 휴대전화 카메라를 켜고 달려갔다. 폰카에 찍힌 사진과 상황 설명은 무선 인터넷을 통해 곧바로 친구 휴대전화나 인터넷 커뮤니티에 퍼진다.

5월28일 밤, 명동 거리 입구로 행진하던 일부 시위대를 전경이 막았다. 대학생 정현수씨가 갈라진 다른 시위대 상황이 어떤지 궁금하던 차에, 휴대전화로 “전경들 지금 한국은행 앞에서 몸 풀고 기합 넣는 중”이라는 친구의 문자 메시지가 날아왔다. 정씨는 전경 대열 코앞에서 무선 인터넷으로 ‘다음카페 소울드레서’에 접속해 긴급 상황을 올린 새 글이 있는지 살폈다. 웹디자이너 변미화씨(28)는 “정부가 세상이 바뀐 줄 모른다”라고 말했다. “국민은 첨단 통신기술로 집회에서 일어난 일을 모두 다 공유할 수 있는데 경찰은 아직 1980년대처럼 다 감출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국민을 바보 취급하는 거다.”

5월29일 밤 12시30분쯤 동대문 밀리오레 근처에서 시민과 대치하던 전경이 차례차례 해산했다. 생중계를 지켜보던 ‘재택 집회’ 참석자들은 키보드 자판을 두드려 “짝짝짝” 박수를 쳤다. “오늘은 아무도 연행되지 않아 다행이에요.” “우리가 이겼어요!” 동대문 앞, 경찰이 돌아간 자리에 시민은 삼삼오오 모였다. 일부는 ‘자유 발언’을 하고, 일부는 즉석 음악 공연을 열었다. 밴드 ‘두번째 달’이 길가에 걸터앉아 기타와 아코디언을 연주하며 요들송을 불렀다. 노랫소리는 재택 집회 참가자의 귀도 적셨다. “오, 정말 좋다.” “오늘 모두 수고하셨어요.” 거리의 시민도, 재택 집회 참가자도 함께 긴장을 풀었다. 평화로웠다.

기자명 변진경 기자 다른기사 보기 alm242@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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