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IN 안희태지난 5월28일 경향신문 편집 디자이너들이 기자와 함께 신문 지면을 편집하고 있다.
먼 훗날 역사는 ‘그해 5월’을 이렇게 기록하지 않을까. “10대 청소년이 싸움의 최전선에 나설 줄은 누구도 예상치 못했다. 그리고 경향신문이 있었다. 수입 개방의 위험성과 협상의 기만성을 남김없이 폭로한 경향은 2008년 5월 촛불 정국의 또 다른 주인공이었다….”

정부는 ‘미국산 쇠고기가 안전하다’고 주장했다. ‘한·미 정상회담, FTA와 무관하다’고도 했다. 하지만 협상 합의문, 미국 관보, 셰이퍼 농무부 장관 연설 녹취록, 대통령직 인수위원회 보고 자료, 서울대 용역보고서 등을 근거로 한 경향신문의 ‘사실 공세’를 당해낼 수는 없었다(표 참조). 이명박 정부의 불편한 심기는, 역시 경향신문이 각 부처 대변인의 증언을 인용해 단독 보도한 “쇠고기 파문 보도 너무 적대적…경향에 광고 줄 필요 있나”라는 제목의 지난 5월17일자 기사에 그대로 나타났다.

그 다음은 숫자가 모든 것을 말한다. 5월15일 228부, 16일 319부, 17일 417부 등 자진 구독자 수 역대 최고 기록을 연일 경신하고 있다. 지난해 하루 평균 9부에 그쳤던 것에 비하면 엄청난 폭증세이며, 5월 한 달 동안만 총 5000부에 이를 전망이다. 신문업계 관계자에 따르면 ‘1974년 동아일보 광고 탄압 사태, 1988년 한겨레신문 창간 때에 비견할 만큼 엄청난 수준’이라고 한다.

1년치 정기구독량을 5월 한 달 만에

용돈을 털어 틈나는 대로 송금하겠다는 10대 독자, 신문 100부를 구입해 지인과 촛불집회 참석자에게 나눠준 독자, 조·중·동을 끊고 경향으로 바꿨다는 숱한 홈페이지 댓글 등 경향 구성원을 고무시키는 감동의 사연도 속출한다. 우석훈 성공회대 외래교수는 “얼마 전 경향신문 구독 신청을 했는데 1주일 넘

ⓒ시사IN 안희태경향신문 직원은 자진 구독자의 폭발적 증가로 한껏 고무돼 있다. 교정지를 수정하는 편집국 기자들.
게 오지 않아 알아봤더니, 주문이 폭주해서 정신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했다”라는 경험담을 자신의 블로그에 올리기도 했다. 시민과 네티즌의 의견·후원 광고 역시 쇄도하고 있으며, 지난 5월19일에는 회원 수 2180명(5월29일 현재)의 ‘경향신문을 사랑하는 모임(경사모)’까지 탄생했다.

안경숙 〈미디어오늘〉 신문팀장은 “여러 문제로 혼란을 겪는 다른 일간지와 비교하면, 확실히 경향의 분위기가 좋아 보인다”라고 말했다. 박상훈 후마니타스 대표는 “과감한 문제 제기, 실증주의적 태도, 선명한 논조 등 누가 봐도 지금 가장 잘하는 신문이다”라고 평했다. 이한기 〈오마이뉴스〉 편집국장도 “이 사회와 진보진영에 필요한 어젠다가 무엇인지 치열하게 고민하는 것이 느껴진다”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확실히 ‘되는 동네’는 뭐가 달라도 달랐다. 미국산 쇠고기 전면 개방과 관련해 5월 한 달 동안 단독 기사 15건을 쏟아낸 경제부 강진구 기자는 “4월 말까지만 해도 이미 되돌릴 수 없는 엎질러진 물이라고 생각했다”라고 털어놓았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강원도 원주에 사는 한 가정주부로부터 전화가 왔다. 경향이 왜 광우병 문제를 소홀하게 취급하느냐는 항의를 받았다. 솔직히 다른 신문보다는 많이 다뤄왔기에 좀 억울했지만, 자극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로부터 며칠 뒤에는 편집국 수뇌부의 심상치 않은 움직임이 감지됐다. “긴급 회의를 갖고 나를 불러서 ‘협상 내용이 문제가 많은 것 같은데 대체 뭐 하고 있냐’고 호통을 쳤다. 그때부터 협상 합의문 등을 허겁지겁 챙겨 보기 시작했다. 데스크진의 지원은 정말 전폭적이었다. 과거에는 단독 기사를 발굴해도 이런저런 눈치를 살펴야 했지만, 이번에는 진짜 원없이 자유롭게 썼다. 발제를 하면 예외없이 통과됐고, 좀더 분명한 사실을 찾아내라는 주문이 계속 들어왔다.”

어느 날 갑자기 이룬 성과 아니다

결국 쇠고기 정국을 뒤흔든 경향의 잇단 보도는, 뛰어난 기자와 까칠한 독자, 그리고 뚝심 있는 데스크진의 강력한 지원이 함께 만들어낸 ‘합작품’인 셈이다. 송영승 경향신문 편집국장은 이와 관련해 “특별히 다른 목적이 있어서 집중한 것이 아니다”라며 경향이 지난날부터 일관된 관점으로 보도해온 사실을 강조했다. “우리는 노무현 정부 때부터 한·미 FTA와 쇠고기 개방의 문제점을 큰 비중을 두고 지속 보도해왔다. 한국 사회에 끼치는 부정적인 영향이 크다고 봤기 때문이다. 최근의 성과는 바로 그런 바탕 위에서 가능했다.”

주변의 평가도 다르지 않다. 미디어 평론가 백병규씨는 “비슷한 논조로 보도하고 있음에도 왜 한겨레가 아닌 경향에 열광하는지를 볼 필요가 있다”라며 다음과 같은 분석을 내놓았다. “한겨레가 진보·개혁 세력과의 관계 등으로 약간 주춤하는 동안, 경향은 과도하다고 생각될 만큼 노무현 정부를 강하게 비판하면서 좀더 일찍 선명한 정체성을 확립해나갔다. 2006년 9월부터 시작된 ‘진보·개혁의 위기’ 시리즈가 대표적이며, 이후에도 신자유주의를 비판하는 꾸준한 기획물을 이어갔다. 그때부터 지식인 사회·오피니언 리더를 중심으로 인정을 받기 시작한 것 같다.”

6월 초 퇴임을 앞둔 고영재 경향신문 사장도 지난 3월 ‘사원들에게 보내는 글’을 통해 이러한 관심과 애정을 피부로 느끼고 있음을 드러낸 바 있다. “경향에 대한 사회적 평가는 높습니다. 기대 어린 눈초리가 경향에 집중되고 있음을 느낍니다. 머지않아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신문의 자리를 차지하리라는 기대가 확산되고 있습니다.”

“경향의 원칙은 그대로 지켜질 것”

물론 대다수 진보 언론이 그렇듯, 경향의 앞날이 늘 지금 같으리라는 보장은 없다. 단독 보도와 자진 구독은 쏟아지고 있지만, 역으로 광고는 나날이 어려워진다. 지난해 말 비자금 문제를 적극 보도한 ‘죄’로 끊긴 삼성 광고는 여전히 감감무소식이고, 이명박 정부는 아예 대놓고 ‘광고 탄압’을 선포했다. 경향의 한 고위 관계자는 “대기업·공기업의 광고 비중이 절대적인 상황에서 갑갑한 게 사실이다”라고 토로한다.

지난 5월23일 사원총회에서 당선된 이영만 신임 사장과 현 데스크진의 관계가 별로 원만하지 않은 것도 문제다. 양자는 경향 내에서 서로 다른 세력을 대표해온 것으로 알려졌으며, 특히 이 사장은 ‘진보·개혁 노선’과 거리가 있다는 게 중론이다. 이 사장은 오래전부터 ‘중도개혁 노선’을 표방해왔다.

한국기자협회 경향지회장이기도 한 강진구 기자는 이에 대해 “현재의 편집 방향이 계속 유지될 수 있을지 큰 고비이지만, 대다수 기자는 물론이고 신임 사장도 송영승 국장의 유임을 원한다. 지면의 경쟁력이 곧 경영 위기 극복 대안이라는 공감대가 확고하다”라며 걱정할 만한 사태는 없을 것이라고 자신했다. 이영만 사장은 최근 〈미디어오늘〉과 인터뷰에서 “지금 편집국이 잘 운영되고 있는데 굳이 바꿔야 하나 싶다”라고 밝힌 바 있다.

취임 2년째인 송영승 국장은 “내 유임 문제보다 더 중요한 것은, 어떠한 상황이 와도 지금까지 지켜온 경향의 원칙은 그대로 이어진다는 점이다”라고 강조했다.

기자명 고동우 기자 다른기사 보기 intereds@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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