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증에 심혈을 기울였던 드라마 〈응답하라 1994〉에도 빠진 내용은 있다. 1994년 5월, 록 밴드 넥스트가 두 번째 앨범 〈더 리턴 오브 넥스트 파트1:더 비잉(The Return of N.EX.T Part 1:The Being)〉을 발표했다. “육교 위의 네모난 상자 속에서 나와 만난 노란 병아리 얄리는 처음처럼 다시 그 상자 속으로 들어가 우리 집 앞뜰에 묻혔다”라고 읊조리는 보컬 신해철의 낮은 목소리. 타이틀 곡 ‘날아라 병아리’의 도입부 내레이션이었다. 대마초 사건으로 재기가 힘들 줄 알았던 그가 복귀해 ‘굿바이 얄리~’를 열창했다. 같은 앨범의 ‘불멸에 관하여’에서 보여준 “그대여 꿈을 꾸는가 너를 모두 불태울 힘든 꿈을/ 기나긴 고독 속에서 홀로 영원하기를 바라는가” 같은 가사는 자의식 충만한 소년·소녀의 ‘중2병’적 감수성에 불을 지폈다.

20년 뒤, 신해철은 여전히 앨범을 낸다. 6년 만에 낸 앨범 제목은 〈리부트 마이셀프 파트1(Reboot Myself Part 1)〉. 데뷔한 지 26년이 되었다. 길었던 머리가 짧아졌고, 넓었던 이마는 더 시원해졌다. 고집하던 통굽에서도 ‘내려왔다’. 가수 데뷔 이후의 삶이 이전보다 길어진 나이(46세)가 되었다. 체중이 늘었고 본인의 표현을 빌리면 ‘지하방에서 작업하다 보니’ 개그감이 떨어졌다. tvN의 〈SNL 코리아〉에 출연해 불어난 몸, 대마초의 ‘흑역사’를 웃음의 소재로 삼았다. 범접할 수 없는 카리스마로 무장했던 그가 곁을 내준 풍경이었다. 보기 불편했다는 팬에게 ‘음악만은 아무도 웃지 못하도록 할게’라며 토닥이기도 했다.

ⓒ시사IN 윤무영재미 삼아 한 뱀 문신도 정치적으로 해석되곤 했다. 담낭염 수술 후유증으로 길게 잠들지 못한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전성기로 ‘지금’을 꼽는 데 주저함이 없었다.

해가 떠 있는 시간은 늘 몽롱하다. 7월10일 서울 창전동의 소속사 사무실에서 만난 그에게 오후 3시는 너무 이른 시간이었다. 이틀에 한 번 잠을 잔다. 그마저도 두 시간 정도다. 짬짬이 충전하듯 조는 걸로 혼미한 정신을 붙든다. 인터뷰나 음악 작업, 회의를 할 때 줄담배는 습관이다. 손에 담배가 안 들리면 얘기가 산으로 간다. 니코틴을 찾는 것으로 지난 이야기에 시동을 걸었다.

이번 앨범의 제목(Reboot)처럼 재시동을 거는 데 오래 걸렸다. 스무 장 넘는 앨범을 꾸준히 내면서 음악만 한 적은 없었다. 라디오 진행처럼 음악과 가까운 ‘아르바이트’를 했다. 이번엔 처음으로 ‘벙커를 파고 들어가는 시기’였다. 공백기가 길어진 건 한 가지 때문은 아니다. 대중에 대한 신뢰가 무너진 게 컸다. “사람들 앞에서 노래 부르기가 싫어지더라. 유명인이 된다는 건 대중으로부터 지나친 환대와 지나친 천대를 받는 것 사이 간극이 커지는 거라고 했다. 미디어를 보면 내가 한 말보다 안 한 말이 더 늘어났고 먹잇감으로 지목돼 사냥을 당했다. 어떤 말을 써도 악의적으로 매도당하면서 인격 살해가 벌어지는 거다. 그 당시 나는 인격적으로 살해를 당해 땅에 묻힌 거나 다름없었다.” 당시 라디오에서 하는 자질구레한 이야기가 모두 기사화되었다. 소신껏 한 말들이 과장되거나 편집됐다. 변명하는 게 ‘추잡스러워’ 입을 다물었다.

다른 고민은 ‘무엇을 말할 것인가’에 있었다. 1988년 스무 살에 대학가요제로 데뷔해 팬들과 나이 차이가 얼마 나지 않을 때는 자아실현이랄지, ‘이 따위로 살지 마’같이 용기를 주는 선에서 유의미한 가사를 쓸 수 있었는데 팬들도 나이를 먹었다. “그러니 속았다고 한다. 네 말대로 믿고 용기 내서 해봤는데, 속았다. 그래서 그 다음은? 가사에 담아낼 다음 메시지가 문제였다. 음악의 형식과 기술 면에서 진보할 자신이 있느냐보다 가사에 담아낼 메시지가 뭘까 이런 게 제일 근원적인 문제였다.”

이번 앨범에 담긴 메시지는 어쨌든 아프지 말라는 당부다. 아내를 위한 곡 ‘단 하나의 약속’에서도 “다신 제발 아프지 말아요”라고 말한다. 아내도, 본인도 아팠던 경험이 있다. 혹자는 ‘애 아빠 되어서 약해진 게 아니냐’고 묻지만 중의적인 의미다. 자살률은 세계 최고지만 행복지수는 낮은, 우리 현실과도 닿아 있다.

도무지 되는 것 하나 없는 삶의 고단함을 그린 타이틀곡 ‘A.D.D.A’는 듣기에 쉽고 경쾌해도 녹음하기가 까다로웠다. 악기 없이 1000개 이상의 녹음 트랙에 자신의 목소리만 중복 녹음하는, 이른바 ‘원 맨 아카펠라’를 시도했다. 스스로 보컬리스트로서의 특징을 생각하다가 목소리의 음역대가 생각처럼 일관적이지 않다는 걸 깨닫고 시도했다. 2주 동안 입술이 부르트는 고된 작업이었다. 가사도 각별히 신경 썼다. 원래 의미 위주로 가사를 쓰기 때문에 각운에는 신경 쓰지 않는데 이번에는 단어의 발음이 가사의 방향을 정하기도 했다. “그래도 망신은 안 당하는 거 같다”라는 게 이번 앨범에 대한 소회다.

네 곡 모두 3~4분짜리다. 대중적인 음악을 작정한 건 아니지만 적어도 15분짜리 곡, 한 곡 안에 15개 코드가 들어가는 노래는 쓰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3분30초 안쪽에서 뭔가를 만들어보겠다고 하는 것은 역으로 말하면 되게 공격적인 거다. 유행가의 틀에서 해보겠다는 건데, 거기의 문제들에 매달려보겠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역대 앨범 중 후배들에게 가장 많은 연락을 받았다. 고맙다는 이야기도 했다. 3분30초 안에서 싸우겠다는 신호 때문이다. 거기에서 먼저 대중의 애정 기반을 확보해야 길고 난해한 곡도 나올 수 있다.”

타고난 달변은 무기이자 독이었다

완전한 공백은 아니었다. 가끔 아내와 텔레비전에 출연해 근황을 보여주기도 했다. 2009년 고 노무현 전 대통령 추모 콘서트에 삭발한 채 등장했고, 2012년에는 노 전 대통령에 대한 추모곡 ‘굿바이 미스터 트러블’을 발표했다. 알려졌다시피 그는 노무현 대통령이 후보이던 시절, 공개적으로 지지 발언을 했다. 추모 콘서트에서는 눈물을 보이며 ‘더 히어로(The Hero)’를 불렀다. 어떤 심정이었을까.

“산적한 문제를 봤을 때 임기 중에 성공한 대통령보다는 퇴임 후 빛을 발하는 대통령이 될 거라고 생각했다. 우리나라에는 뛰어난 지도자도 모자라지만 통합을 다룰 수 있는 리더가 너무 적기도 했고. 그런데 그 양반이 덜컥 죽었다. 추모 콘서트에 나가서, 그를 죽인 건 나라고 말했다. 천주교에서 신부가 ‘내 탓이오’ 하면 신자들도 따라 ‘내 탓이오’ 한다. 자리에 있는 이들에게 하는 말이었는데 못 알아듣는 것 같았다.”

타고난 달변은 그에게 무기이자 독이었다. 정치적으로든 음악적으로든 그를 싸움의 최전선으로 모는 이들이 많았다. “음악 하는 사람의 임무는 타이태닉호에 있던 연주자 같은 거다. 사회 갈등에 대해 이야기하는 뮤지션도 있지만, 지친 양쪽을 위로하는 뮤지션도 있다. 정치사회적인 것에 대해 생각 외로 양비론적이다. 나는 경상도 출신으로 경상도의 기묘한 사고방식을 이해한다고 생각하지만 인터넷에서는 꽤나 홍어라면서 전라도 취급을 받는다.”

ⓒKCA Ent 제공6월20일 서울 마포구 브이홀에서 신해철의 새 앨범 <리부트 마이셀프 파트1> 음감회가 열렸다.

음악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음악이 괜찮네 하는 것까지는 좋은데, 그 다음엔 이상한 압력이 들어온다. 싱어송라이터니까 곡을 안 쓰는 가수를 질책하라거나, 아이돌을 질책하라고도 한다. 그에 응하지 않으면 내 이름에 따옴표를 쳐서 내가 안 한 말을 낸다.”

그런 식으로 매년 한두 건씩 ‘사건’이 터졌다. 그러면 당사자에게 전화해서 마음 상했냐며 그런 말 한 적 없다고 해야 했다. 정치계도 다르지 않았다. “자기네들이 생각하는 신해철이 있었다. 내가 노비인가, 이런 생각도 들었다. 예술가가 정치 이야기를 한다면 분노를 다스린다든가 그런 부분에서 도움이 돼야 하는데, 나는 공격수였다.”

어느 날 그가 뱀 문신을 하고 등장했다. 그냥 하고 싶어서 했다. 그랬더니 쥐 잡는 뱀이라면서 이명박을 은유했다고 마음대로 해석했다. “정말 경멸했다. 사람을 쥐로 비유하는 건 외모 비하고 인종차별과 마찬가지다. 전두환·이순자를 대머리·주걱턱으로 말하는 건 대중 탄압에 대한 반감이 있기 때문이다. 루키즘(외모지상주의)은 기본적으로 옳지 못한 태도다. 그것까지도 좋은데, 왜 거기에 나를 끌어들이나.” 마음고생이 적지 않았으면서도 막상 말을 조심하는 기색은 없다. 그래도 요즘 ‘유해졌다’는 말을 종종 듣는다. 말의 효율을 생각하게 되었다. 의미 있는 말을 하더라도 그 때문에 음악을 못하게 되는 지경에 이르는 건 경계하는 눈치다.

‘벙커’에 있는 동안, 가족들과 대화를 많이 했다. 뮤지션 신해철은 아홉 살(딸), 일곱 살(아들) 아이의 아빠이기도 하다. 작은 아이에게 타이틀 곡을 들려줬더니 “힘들었겠는데”라고 토닥이더란다. 음악을 뜯어서 들으려는 게 본인의 어렸을 때랑 비슷하다. 그와 외모가 붕어빵인 딸은 심각하게 들은 다음 “다 끝난 거야? 그럼 오늘 나랑 잘 수 있어?”라고 물었다. 그렇게 다르다. 아이들이 음악을 한다면 말리고 싶지만 그럴 권한이 없다는 걸 안다.

2년 전 받은 담낭염 수술의 후유증이 남았다. “젊었을 때 몸을 막 써서 간을 절반, 쓸개도 상당히 잘랐다.” 술은 끊었지만 담배는 앞으로도 끊기 힘들 것 같다. 수술 후부터, 잠을 길게 못 잔다. 잠을 자고 나면 귀의 상태가 바뀌기 때문에 음악 하는 그에게는 치명적이다.

그의 ‘4세대’ 팬들은 그를 뭐라고 부를까

오빠 부대를 장착하고 다니던 꽃미남 시절도 있었지만 전성기는 불혹을 넘긴 지금이라는 데 주저함이 없다. “덜 두렵기 때문이다. 언제 내 발전이 정체될지, 막다른 골목길에 다다를지, 목숨이 끊길 때까지 뮤지션일지, 근원적인 고민이 있었다.” 천재로 불리기도 했지만 막상 그가 72시간 좀비처럼 틀어박혀 작업하는 걸 보면 그런 소리가 들어간다고. 중학교 이후 음악을 그만두고 싶었던 적은 딱 한 번, 1988년 ‘무한궤도’로 대학가요제에 나가기 이틀 전이었다. 부모님의 주름살을 보며 내가 꿈을 좇을 거라고 말할 수 있나 생각했다. 이후에도 몇 번 그만둘 생각을 했지만 진심은 아니었다.

요즘에는 가을에 나올 넥스트 앨범을 준비 중이다. ‘넥스트 유나이티드’라는 이름을 붙였다. 오케스트라처럼 1진, 2진이 있다, 밴드 멤버 역시 유기적으로 바뀐다. 신해철의 팬 1세대는 그를 해철님으로, 2세대는 교주, 3세대는 마왕이라 부른다. 충돌하는 지점도 있다. 1세대 팬들은 자유로운 분위기의 라디오 〈고스트 스테이션〉을 들으며 성장해 ‘해철님’께 반말하는 3세대 팬들이 못마땅하다. 1990년대, 레코드 가게 앞에 줄서서 음반을 사던 이들이다. 팬끼리 반드시 사이가 좋을 필요는 없지만 26년의 역사가 만든 ‘세대 간 충돌’ 현상이 흥미롭다. 좀 더 어릴 다음 팬 세대는 그를 뭐라고 부를지 궁금해진다.

기자명 임지영 기자 다른기사 보기 toto@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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