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일리 비라는 이름의 토끼 한 마리가 멍한 표정으로, 손가락 하나를 입에 넣고 서 있다. 이 녀석은 자기가 누구인지를 모른다. “나 원숭이야?” “나 코알라야?” “나 산미치광이야?” 질문은 이어진다. 데일리 비는 자기가 어디 살아야 하는지도 모르고(나 동굴에서 살아야 해? 나 둥지에서 살아야 해? 나 거미줄에서 살아야 해?), 무엇을 먹어야 할지도 모른다(나 물고기 먹어야 해? 나 감자 먹어야 해? 나 벌레 먹어야 해?).

새를 따라 나무 위에서 살다가, 다람쥐 흉내 내서 도토리를 먹기도 하는 데일리 비. 녀석의 의문 중에서도 가장 큰 의문은 ‘도대체 자기 발이 왜 이렇게 큰가’이다. 수상스키 타기 좋으라고? 생쥐 걸터앉기 좋으라고? 우산 대신 쓰기 좋으라고?

“나 토끼인 줄 알았는데, 영웅이야?”

이렇게 아무것도 모르는 데일리 비는, 다른 토끼들이 이름만 듣고도 도망가는 재지 디가 누구인지도 모른다.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내며 다가오는 재지 디에게 데일리 비의 질문이 쏟아진다. 너 누구야? 너 어디서 사니? 너 뭐 먹니?

<내가 영웅이라고?> 존 블레이크 글, 악셀 셰플러 그림, 서애경 옮김, 사계절 펴냄
“너 같은 토끼를 먹지!” 하는 재지 디 앞에서 데일리 비는 울상이 된다. “내가… 토끼야?” 그리고 달려드는 족제비에게, 본능적으로 휘둘러지는 그 엄청 커다란 발! 된통 걷어차인 족제비는 휘익 날아 자기가 왔던 곳으로 되돌아간다. 기쁨에 날뛰며 “넌 영웅이야!”를 외치는 다른 토끼들 앞에서 데일리 비는 다시 울상이 된다. “어, 내가 영웅이야? 난 토끼인 줄 알았는데….” 다시 녀석은 멍한 표정으로 손가락 하나를 입에 넣고 서 있다.

이 그림책은, 아주 재미있다. 우선 천연덕스러운 그림과 통통 튀는 글이 그렇다. 거미줄에 붙은 토끼 같은 유머러스한 장면들도 그렇다. 이 천연덕스러운 유머 덕분에 나중에는 평범한 모듬과일 그림까지도 뭔지 우스워 보인다. 세 번씩 되풀이되는 문장과 에피소드들은 경쾌한 리듬감을 준다. 무엇보다도, 천진하거나 어리둥절하거나 우울하거나 당혹스러워 보이는 데일리 비의 표정이 압권이다.

이 그림책의 교훈은 자기 정체성 찾기의 중요성이다. 그것은 끝없는 질문을 통해 이루어져야 한다. 부모나 교사에게서 내려오는 답이 아니라 나 자신이 쉴 새 없이 세워보는 이런저런 가설을 통해서. 그러니 얘들아, 스스로 질문하고 스스로 답해보아라, 하고 말하는 것 같다.

데일리 비가 천적 족제비 덕분에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대목도 교훈적이다. 무시무시하게 위협적이지만 번개처럼 자신을 일깨워주고, 그런 뒤 완벽하게 제압당해주는 적은 우리 인생에 꼭 필요한 존재다. 그러니 얘들아, 적과 맞닥뜨리는 것을 두려워하지 마라, 하고 이 책은 말하는 것 같다.

기자명 김서정 (동화작가∙평론가)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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