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마이뉴스 윤성효2004년 경남지역 시민·공무원 단체가 강매 근절 운동에 나서기도 했다. 경남 민언련 등은 올해도 같은 운동을 벌일 계획이다.
학교 도서관에 또 두꺼운 책 한 권이 날아왔다. 〈○○뉴스 연감〉, 지역의 한 신문사가 일년 동안 보도한 뉴스를 정리한 일종의 자료집이다. 책 가격은 19만원. 올해 쓸 수 있는 도서 구입 예산의 10%에 이른다. 경기도 ㅅ고등학교 도서관 사서교사 정 아무개씨(36)는 고민하다가 학교 행정실에 책을 반송해달라고 요청했다. 비정규직 신분으로 학교 도서관 일을 처음 맡은 지난해에는 ‘부임 첫해부터 시끄럽게 굴기 싫어’ 그런 책들이 오면 살 수밖에 없었다.

〈사진으로 본 국립경찰 반세기〉 〈보도사진 연감〉 등 10만~20만원짜리 연감·전집류 서적이 ㅅ고 도서관 서고 한쪽에 가득 쌓여 있다. 바로 옆 ㅅ초등학교에는 〈2008년 100대 뉴스〉와 같은 연감들이 아예 학생 손이 닿지 않는 대출대 뒤 구석에 쌓여 있었다. 책을 꺼낼 때 먼지가 떨어졌다. 사서교사 김 아무개씨는 “앞쪽에 내놓아도 아무도 들춰보지 않는다”라고 말했다. 

각종 언론사와 기자 단체, 학회 등이 해마다 찍어내는 비싼 서적이 재정이 열악한 초·중·고등학교 도서관에 부담이 되고 있다. 책을 파는 쪽에서는 “그냥 봐달라고 부탁하는 정도다”라고 하지만 사서교사들은 “사실상 강매다”라고 주장한다. 특히 언론사나 ○○기자협회이라거나 아무개 기자를 사칭하며 교장실로 전화할 경우, ‘기자라고 하면 일단 겁부터 먹는’ 교장 선생님이 구입을 거부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교장이 결정하면 어쩔 수 없다”

연감 강매 문제는 오래된 일이다. 특히 교육 현장에 압박이 심했다. 2000~2004년 경남 지역 초·중등학교와 교육청은 각종 언론사와 단체의 연감을 구입하느라 4억6000여 만원을 썼다. 이에 경남민주언론시민연합과 공무원노조·전교조가 함께 ‘강매 신고센터’를 개설하는 등 강매 근절 운동을 펼치기도 했다. 하지만 아직도 학교 도서관에는 구입·구독 요청 전화가 울리고, 주문하지 않은 책이 영수증과 함께 날아오고, 언론인 단체 명함을 든 영업사원이 수업 시간에 불쑥 찾아온다.

학교 도서관에는 엄연히 도서선정위원회가 있다. 1년에 한두 차례 학생·학부모·교사에게 희망 도서 신청을 받아 많지 않은 예산으로 책을 산다. 도서관 및 독서진흥법에서는 학교 예산의 3%를 도서구입비로 쓰라고 하지만 의무 사항이 아니다. 학교장이 신경쓰는 정도에 따라 예산은 몇 십만원에서 천여 만원까지 천차만별이다. 하지만 각종 단체는 학교의 사정을 가려가며 영업을 하지 않는다. 한 고등학교는 올해 도서 구입 예산 200만원 중 ‘끊지 못한’ 정기간행물 구독료로만 100만원이 미리 나가버렸다.
 
‘교장’을 타고 내려오는 책이 특히 사서교사들의 골칫거리이다. 인천의 한 초등학교 사서교사는 “얼마 전에도 교장 선생님이 교육청에서 18만원짜리 연감 구입 요청이 왔다며 사라고 했다. 나한테 요청이 오면 다 거절하지만 교장 선생님이 결정해버리면 어쩔 수가 없다”라고 말했다. 경북 구미 형일초등학교 손계양 교장은 승진과 이동이 빈번한 매 학기 초마다 교장·교감이 각종 단체의 서적 구입 요청에 시달린다고 했다. “그저께도 무슨 기자협회라면서 금강산 화보인지 뭔지를 두 권에 30만원에 사라더라. 그럴 때마다 화를 내며 강력히 거부한다.” 하지만 교장 선에서 ‘강력히’ 통제하지 못하면 피해는 고스란히 학생에게 돌아간다. 대부분 비정규직으로, 1년씩 계약을 갱신하며 근무해야 하는 사서교사는 “학생들에게 미안하지만 우리에겐 힘이 없다”라고 말한다.

‘부담스러운’ 책을 만들어 파는 단체들은 모두 “강매라는 건 오해이다”라고 항변한다. 매년 뉴스연감을 발행하는 경기일보 출판부 연감 사업부 최준호씨는 “그냥 부탁을 드리는 차원인데 학교에서는 언론사라고 하면 괜히 부담스러워한다. 우리도 이미지를 고려해 굉장히 신중하게 하고 있다”라고 말했다. 한국편집기자협회의 한 직원은 “기자 사칭 등 문제가 심했던 적도 있지만 요새는 기자라 해도 다들 우습게 생각해서 어차피 쉽게 책을 반송한다”라고 말했다.

몇몇 단체는 출판 사업을 접었지만 단체 이름을 사칭한 불법 영업은 여전하다.
“인터넷에 다 있는 내용인데…”

예전에는 언론사나 각종 단체의 연감·전집류 서적 판매는 꽤 쏠쏠한 수익원이었다. 원가 4만~5만원을 들여 20만원쯤에 팔아 마진율도 높았다. 이제는 달라졌다. 파는 사람에게나 사는 사람에게나 부담스러운 존재가 됐다. 워낙 강매 문제가 심각해 한국방송기자클럽 등 몇 개 단체는 아예 몇 년 전에 출판 사업을 접었다. 예전에는 1만 부씩 찍던 〈연합뉴스 연감〉도 이제 2000부 수준으로 떨어졌다. 연합뉴스 연감판매팀 한 직원은 “사실 거의 적자를 보며 만든다”라고 말했다.

쉬는 시간, 도서관을 찾은 ㅅ고 학생들에게 20여 만원에 이르는 연감·전집 책은 인기가 없었다. 서고에 그런 책이 있다는 사실조차 몰랐다. 2학년 고 아무개양은 “인터넷에 들어가면 다 볼 수 있는데, 이런 책 요새 누가 본대요?”라고 물었다. 얼마 전에도ㅅ고 도서관에는 “요새 언론사가 다 힘들지 않습니까. 도와주는 셈치고 조금만 신경 써주세요”라고 사정하는 한 영업부장의 전화가 걸려왔다. 정 사서교사는 어이가 없다. “그보다 더 열악한 학교도서관에 대해, 당신네 언론사들이 얼마나 신경을 써주고 있었나요?” 

기자명 변진경 기자 다른기사 보기 alm242@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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