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 총선에서 차기 총리로 가장 유력시되는 인물은 힌두 극우주의 성향인 인도국민당의 나렌드라 모디다. 현재 구자라트 주지사인 그는 성공적인 경제성장 모델을 만들어냈다며 열광적인 지지를 이끌어내고 있다. 그러나 모디는 2002년 인도 구자라트 주에서 자행된 처참한 인종청소형 학살의 주역이기도 하다.

‘구자라트 학살’은 느닷없이 발생한 기차 화재 사건으로부터 시작되었다. 2002년 2월27일 구자라트 주의 고드라 역을 떠난 기차가 발차 이후 몇 분 지나지 않아 원인 모를 화재에 휩싸였다. 58명이나 되는 승객이 순식간에 사망했다. 문은 양쪽 다 잠겨 있었다. 이 사고가 발생한 정황은 분명하지 않다. 다만 기차가 하필 무슬림 밀집 거주지에 비상 정차했고, 무슬림 군중이 몰려와 돌을 던졌다는 것이 사실로 확인되었다. 당시는, 힌두 극우주의자들이 아요디아의 무슬림 성전을 파괴한 ‘아요디아 사태(〈시사IN〉 제343호 ‘정치와 종교의 잘못된 만남’ 참조)’ 직후로 양 종교 간 갈등이 극으로 치닫고 있는 상태였다.

ⓒAP Photo인도국민당의 나렌드라 모디(가운데)는 가장 유력한 차기 총리 후보다. 그는 2002년 벌어진 ‘구자라트 학살’의 주역이기도 하다.
사건 발생 당시 연방 정부의 여당이면서 주 정부의 여당이던 인도국민당이 조사위원회를 구성했다. 조사위원회에 따르면 무슬림 폭도가 기차 안으로 난입해 바닥에 휘발유를 뿌리고 불을 질렀다는 것이다. 이른바 무슬림 폭도에 의한 방화 사건이었고, 재판에서도 관련자 31명에 대해 유죄가 선고되었다. 그러나 일부 시민단체는 이런 조사 결과에 반발했다.

이후 연방 정부의 정권이 바뀌면서 조사위원회가 다시 구성되었다. 그런데 조사 결과가 이전과 완전히 달랐다. 방화가 아니라 우연한 화재였고, 무슬림 군중의 난동 역시 우발적이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도 엄청난 반발이 있었다. 아직까지도 사건의 내막은 베일에 가려져 있다. 기차가 왜 그 자리에 정차하게 됐는지, 누가 무슬림 군중을 선동했는지, 어떻게 불이 붙었는지 납득할 만한 설명이 나온 적이 없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이 기차 화재 사건을 빌미로 구자라트 전역에서 대량 학살이 자행되었다는 것이다.

이쯤에서 우리는 1987년 한국의 13대 대통령 선거에서 발생한 폭력 사태를 상기할 필요가 있다. 당시 여당인 노태우 후보의 광주 유세에서, 청중 가운데 일부가 지역감정을 조장하며 후보에게 돌을 던지자, 옆에서 자극받은 상당수의 시민이 폭력에 휩쓸렸다. 이 사건은 계속 방송에 오르내리면서 전국적으로 지역감정에 불을 붙였다. 다음 날 대구 유세에 나선 김대중 후보 역시 보복성 돌팔매질을 당했다. 이후 13대 대선은 지역감정 중심으로 흘러갔으며, 그 결과는 노태우 후보의 당선이었다. 이후 광주 유세장의 폭력 사태가 어떻게 일어났는지를 두고 ‘안기부(국정원의 전신) 배후설’ 등 갑론을박이 있었다. 그러나 진실이 어떠하든, 광주 유세의 폭력 사태는 당시 군부 세력에게 유리한 정세를 조성하는 데 기여했다.

ⓒAP Photo2012년 구자라트 학살 10주년을 맞아 반정부 시위를 펼치던 생존자가 경찰에 체포되고 있다.
인도의 힌두 극우세력들은 고드라 열차 화재 사건으로 종교 갈등을 부추기면서 구자라트 지역의 무슬림 학살을 기획하고 집행했다. 사건 직후, 어떤 법적·행정적 권한도 없는 일개 수구 단체가 구자라트 전역에 철시(撤市)를 선언한다고 발표했다. 구자라트의 모든 상인들에게 어떤 영업 활동도 하지 말라고 선포한 것이다. 이에 대해 모디가 이끄는 주 정부는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그리고 수구 단체들은 구자라트 주 집권 여당인 인도국민당의 공공연한 지원을 받으면서 난동을 저지르기 시작했다. 정부가 운영하는 방송은 희생자 가족의 울분과 증오 그리고 애도로 가득 찬 내용을 줄기차게 내보냈다. 모디는 수구 단체들의 난동을 저지하기는커녕 스스로 선동에 나섰다. 그는 사건의 실체가 밝혀지지 않은 상황에서, ‘테러리스트들이 방화한 고드라 열차에서 우리 형제들이 불에 타 죽었다’고 말했다.

열차 화재 사건이 일어난 다음 날 아침부터 힌두 수구 세력의 색깔인 황토색 옷을 입고 힌두 전통 칼과 도끼로 무장한 폭도들이 시내 전역에 배치됐다. 이들은 무슬림을 대상으로 학살을 자행했다. 힌두 폭도들은 무슬림이나 무슬림으로 의심되는 사람들에게 알라를 모욕하라거나 힌두 신을 찬양하라고 요구했다. 이를 거부하면 칼로 목을 베거나 휘발유에 불을 붙였다. 여성과 어린이도 학살에서 배제되지 않았다. 성폭행과 신체 일부에 대한 절단이 난무했다. 인도의 종교 공동체 간 폭력 갈등의 역사에서는 처음으로 힌두 여성들까지 적극적으로 무슬림에 대한 폭력에 가담했다. 구자라트 주도인 아메다바드에서는 무려 한 달 동안 학살 난동이 벌어졌다.

학살 배후 조종으로 기소됐지만…‘증거 불충분’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종류의 죄악이 구자라트에서 저질러졌다’고 언급될 정도다. 고드라 열차 화재 사건은 지금까지도 사고인지 아니면 누군가 치밀하게 계획한 사건인지 밝혀지지 않았다. 그러나 구자라트 학살에 동원된 힌두 수구 세력은 매우 잘 짜인 각본에 따라 무슬림을 난도질했다. 영화감독 라케시 샤르마는 2003년 다큐멘터리 영화를 제작했는데, 그 제목을 〈최종 해결(Final Solution)〉이라 지었다. 나치가 유대인 홀로코스트를 저지르면서 사용한 용어를 그대로 차용한 것이다. 기획에 따른 인종 청소형 학살이었다는 주장인 셈이다. 힌두 수구 세력은 지금도 무슬림은 인도 국민이 될 수 없고, 따라서 인도에 무슬림이 살 공간을 주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을 서슴지 않는다. 나치가 유대인에 대해 10년 동안 차별·탄압·분리·학살 등을 단계별로 실시한 것과 다를 바 없다. 다만 나치는 그 사악함을 강제수용소와 가스실 내부로 은폐한 것에 비해 인도 수구 난동 세력은 대낮 길거리에서 학살을 자행했고 그 장면을 심지어 텔레비전으로 내보냈다.

학살을 주도한 나렌드라 모디는 승승장구했다. 그는 학살 사건 이후 선거에서 압승을 거둬 주정부 총리직을 연임했다. 연방 정부가 교체된 뒤 모디는 학살 배후 조종으로 기소되기도 했다. 그러나 2012년 대법원에서 증거 불충분으로 무죄판결을 받았다. 무슬림 진영과 시민·인권단체가 대법원의 판결에 일제히 반발하고 나섰지만 별무소용이었다.

이후 모디는 2014년 4월 시작된 총선에서 야당인 인도국민당의 총리 후보로 확정되었다. 현재까지 여론 조사에서 국민회의당의 라훌 간디를 여유 있게 따돌리고 1위를 달리고 있다. 큰 이변이 없는 한 ‘학살자’는 조만간 인도 총리가 될 것이다.

기자명 이광수 (부산외국어대 인도학부 교수)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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