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IN 윤무영형진씨(위)는 “아버지같은 카리스마로 통일교를 지휘할 수 없기 때문에 민주적 시스템을 정착시키려 한다”라고 강조했다.
서울 용산구 청파동에 자리한 통일교 본부교회 내 허름한 사저 집무실에서 문형진 회장을 만났다. 한 살 연상인 부인 김연아 목사와 20세에 결혼해 10년 만에 슬하에 5남매를 둔 그는 사실상 통일교의 책임자가 된 뒤 ‘변화’를 강조하고 있다.

문 총재가 막내아들을 사실상 후계자로 내정했는데 특별한 이유라도 있는가?

다른 종교에서는 후계자가 되면 전권을 넘겨받지만 통일교는 좀 다르다. 아버지는 자녀 3형제를 세우셨다. 나는 종교, 국진 형님은 경영, 현진 형님은 NGO 활동을 맡도록 하셨다. 아버지가 우리 형제에게 전승자 구실을 나누도록 조처하신 것이 타 종교와 차이일 것이다.  나는 교회 조직의 직책을 떠나 많은 신자를 섬기고 모시는 자세로 임하겠다. 그런 뜻에서 한국 총회 본관으로 출근하지 않고 청파동 교회 사택에서 생활하며 기도 정성을 드리는 삶을 산다. 지금은 내가 세계회장으로 임명받았지만 언제든 바뀔 수 있는 것이고, 지휘도 돌아가며 다른 분이 맡을 수 있다고 본다. 다른 형제들은 자주 만나는가?

미국과 영국에서 수학하는 누님 둘과 형님 한 분을 제외하고 5남매가 아버지 사시던 한남동 사택에서 함께 산다. 그 자녀만 14명인데 매일 한집에서 한솥밥을 먹고 지낸다. 통일교주의 아들로서 미국에서 태어나 자라며 남다른 성장 과정을 거쳤을 텐데….

20여 년 전만 해도 우리 가족은 미국에서 많은 핍박을 받으며 뉴욕의 이스트가든이라는 수련소에서 생활했다. 아버님은 대부분의 시간을 통일교회를 개척하러 세계 각국으로 다니셨는데, 어린 시절 거의 매일 “문선명 아들딸을 납치해 죽이겠다”라는 괴전화에 시달렸다. 심지어 친구 집에 놀러 갈 때도 경호원이 늘 붙어다녀 어린 마음에 원망도 많았다. 신변 문제 때문에 초·중·고교는 집 근처에서 다녔고, 그 뒤에야 코네티컷 주에 위치한 천주교 계통의 페어필드 대학교로 갈 수 있었다. 처음에는 역사학을 전공했는데 같이 살며 유일하게 의지하던 바로 위 영진 형님이 갑작스러운 사고로 세상을 뜨면서 인생무상과 크나큰 가치관의 혼란을 경험했다. 가톨릭계 대학이라 신부님과 인생 상담을 한 끝에 종교학으로 바꿔 하버드 대학에 편입해 석사 과정까지 마쳤다. 문선명 총재는 가정에서 자녀교육을 어떻게 시켰는가?

예수 닮고 싶어서 ‘어린 양’을 많이 키운다는 말씀으로 여러 자녀를 두셨다. 아버님이 바쁜 가운데서도 자녀에게 가르치신 삶의 자세는 ‘융통성’이었다. 물론 아무렇게나 해도 된다는 것은 아니고 목표로 삼는 일에서는 무조건 열과 성을 다 바치라는 주문도 늘 하셨다.

하버드 대학 시절에는 유난히 불교에 심취했다던데….

컬럼비아 대학에서 동양학을 전공하다 급작스러운 사고로 돌아가신 영진 형님을 못 잊어 형님 방에 꽂힌 동양학 관련 책을 읽어보면서 시름을 달래다 불교에 관심을 갖게 됐다. 하버드 대학에서 전공을 세계종교학 비교종교 연구로 잡은 뒤 미국인 천주교 신부님과 유학 오신 한국 불교계 정관 스님을 만나 불교사상 논문을 도움받는 과정에서 불교에 더욱 심취했다. 이때 홀연히 인도로 가서 달라이라마를 만나 불교사상 강의도 듣고, 삭발을 한 뒤 스님 복장으로 학교에 다니기도 했다. 하루는 법장 스님께서 스님들과 동국대학 교수 일행 50여 명을 인솔해 하버드 대학을 방문하셨는데, 내가 그분들을 특별 초청해 만나뵈면서 인연이 더욱 깊어져 법장 스님 열반할 때도 참석하는 등 오랜 교분을 쌓아왔다. 이번 부처님 오신날에도 해인사에 가서 종계종 종정 법전 스님을 만나뵙고 왔다.

통일교주의 아들이 일찍부터 다른 종교에 심취한 데 대해 아버지는 반대하지 않았나?

뉴욕 집에 아버님이 오신 날이면 통일교회 신자가 찾아와 함께 훈독회(새벽 기도)를 하셨는데 하루는 내가 삭발하고 스님의 누비 두루마기를 입고 참석하니 다들 놀라며 아버지로부터 불호령이 떨어질까 조마조마해하는 눈치였다. 당시에는 내 마음대로 하겠다는 생각이었는데 아버님이 뜻밖에 “형진이 이 아이는 내가 이렇게 입어보라고 시켰으니 아무 걱정들 하지 말라. 이렇게 여러 종교를 다 경험하고 공부하고 나면 끝내 하나님을 제일 사랑하는 사람이 될 것이다”라며 다른 신자의 불안감을 달래셨다. 그 순간 나는 ‘아버님이 모든 종교를 포괄하는 분이로구나’ 느끼면서 비로소 통일교인이 되었다.

ⓒ통일교 제공하버드 대학 재학 시절 불교에 심취해 삭발을 하고 달라이라마(가운데)를 찾아간 문형진씨(오른쪽).
신자들을 상대로 짝을 지정해 행하는 ‘축복결혼식’이 세계의 보편적 추세인 자유연애와 결혼에 반하는데….

일반인은 교회에서 배우자를 맺어주는 데 거리감을 느낄 수 있다고 보지만 통일교 신자는 가정이 하나님께서 함께 사실 집이니까 이를 성스럽게 받아들인다. 하지만 지금은 아버님도 많이 변하셨다. 세계적으로 신자가 늘어나 축복결혼식을 다 거행하기 힘든 면도 있지만, 각 가정 단위로 하나가 될 수 있는 방향을 강조하고 영역을 확대해왔기 때문에 결혼도 훨씬 자유로워졌다. 이제는 하나님의 가르침을 공유하면서 부부 간 인권 유린이나 외도 등을 반대하고 순결을 지키겠다고 서약하면 가족 간 교류 속에 연애를 해도 축복의 대상이 된다.

기독교계에서는 ‘예수님은 실패한 메시아’라 표현하는 통일교 교리를 들어 ‘적그리스도’라고 규정한다. 그건 잘못된 지적이다. 우리는 예수님이 전세계를 하나님 말씀으로 통일하려는 사명감을 가지고 이 땅에 오신 메시아라고 믿는다. 그러나 박해 세력에 의해 십자가에 못박힌 채 그렇게 가신 것, 본래 오신 최종 목적이 십자가에 못박히는 일은 아닐 텐데  당시 시대 상황이 이를 제대로 못 받아들이고 예수님을 못박아버려서 아쉬운 것이다. 통일교회의 원리론 설명을 여기서 말하기는 길지만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세계 모든 인류가 하나님의 아들로서 평화롭게 사는 세상을 만들고, 다른 민족과 종교끼리 공격하지 않으며, 그런 하나님의 사명을 앞장서서 실천할 사명이 한국에 있다고 믿고 한국에서 태어난 우리부터  실천하자는 이론이다. 앞으로도 기독교계로부터 이단이라는 공격은 계속될 터인데 어떻게 대응하려고 하나?

통일교가 기성 기독교에 비해 성서를 해석하는 이론 면에서 이견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는 기독교에 안티가 없다. 예수를 사랑하는 기독교를 우리도 형제로서 사랑하고, 소중하다고 생각한다. 기독교가 끝까지 우리를 이단이라 박해해도 우리는 똑같이 대응하지 않을 것이다. 최근 들어 미국에서는 통일교 신자가 기독교 교회에 가서 예배도 보고 사역도 함께 한다. 우리는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자녀라는 뜻에서 그 사람의 교파가 아니라 행동과 말과 믿음을 보면서 판단해야 한다고 본다. 강력한 카리스마로 통일교회를 개척한 아버지 뒤를 이을 자신이 있는가?

아버님은 모든 것을 직접 컨트롤할 수 있었지만 우리 2세는 아버님처럼 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걸 알면서 권력을 잡겠다고 욕심 부리면 안 된다. 앞으로 통일교도 제왕처럼 한 사람이 절대 권력을 쓰면 안 좋다고 본다. 나는 권력을 줄여 시스템으로 운영하려 한다. 그런 점에서 이번에 실시한 교단 내부의 선거는 큰 변화다. 그동안은 상부에서 임명하는 방식이었지만 나는 ‘민심이 천심이다’는 진리를 믿기 때문에 각 교구 구석구석 실정을 더 잘 아는 신자가 직접 지도자를 선택하는 게 더 낫다고 보고 그런 제도적 변화를 단행했다. 우리는 식구(신자)가 선택한 분들과 같이 일하면 되는 것이다.

기자명 정희상 기자 다른기사 보기 minju518@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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