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정우 편집국장
겉으로는 숫기가 없어 봬도 정치인은 타고난 끼를 숨기지 못한다. 멍석만 깔면 얼굴에서 생기가 돈다. 아무리 바쁘고 고달파도 카메라 플래시가 터지고 방송사 카메라가 돌아가면 얼굴이 훤해진다. 잘나가던 정치인이 몰락해 화면과 지면에서 사라지고 나면 금세 폭삭 늙어버린다.

노무현 대통령도 어쩔 수 없는 정치인이다. 한동안 얼굴에서 빛이 사라졌던 노 대통령은 이번 정상회담을 계기로 완전히 ‘회춘’했다. 특히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얼굴이 펴진 10월4일 오후부터는 얼굴이 눈에 띄게 밝아지고 웃음도 많아졌다.

노무현 대통령은 돌아오는 길 개성공단에서, 도라산역에서 지루하다 싶게 얘기를 많이 했다. 듣는 사람들에게 박수 좀 쳐달라고 몇 차례 주문하기도 했다. 대통령 스스로 힘든 일을 해냈다는 자부심을 느끼는 듯했다.

어떤 사람은 노 대통령이 군사분계선을 걸어서 넘어가는 것을 바라보면서 인류가 달에 처음 발을 내딛는 것을 봤을 때의 감동 같은 걸 느꼈다고 한다. 이번 정상회담에서 노 대통령이 거둔 성과는 확실히 가볍지 않다.

하지만 1969년 여름 미국의 아폴로 우주선이 달에 착륙했을 때 모든 미국인이 환호작약했던 것은 아니다. 축제 분위기에 들뜬 기술자와 취재진을 태운 차량이 우주선 발사 기지인 케이프 커내버럴로 가는 길을 가득 메웠을 때 연도에서는 굶주린 흑인들이 영문을 몰라 눈을 동그랗게 뜨고 지켜보고 있었다고 한다. 땅 위의 가난한 이들을 외면하고 깜깜한 우주에 열을 올리는 것은 확실히 논란거리이다.

요즘 대한민국에서 ‘다른 인종’ 취급을 받는 이들이 바로 비정규직 노동자이다. 정부가 올해 7월에 이들을 위한답시고 비정규직법을 내놓은 뒤에 이들의 처지는 더욱 딱해졌는데, 그 대표적인 피해자가 이랜드 노동자이다. 이 법을 피해 가려고 회사측이 비정규직을 모두 계약 해지하고 외주화하려고 했던 것이다. 이랜드 노조는 현재 100일 넘게 파업 중이다. 정상회담이 끝난 직후인 10월5일에는 서울지방노동청장실을 점거하고 농성 중이던 뉴코아 노조 간부가 전격 구속되고 말았다. 노동자들은 얍삽한 회사보다 못할 짓을 해놓고도 모른 척하는 정부가 더욱 밉다.

아마도 이랜드 노동자들의 눈에는 이번 정상회담이 ‘아폴로 우주쇼’처럼 허망하게 비쳤으리라. 당장 내일의 끼니가 간데없는데 노 대통령이 이번 회담의 가장 큰 성과라고 꼽은 ‘서해 평화수역 전환 논의’가 아랑곳이겠는가.

기자명 문정우 편집국장 다른기사 보기 mjw21@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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