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우(경북대 교수.경제학)교토 버스에서는 내릴 때 요금을 받는데, 우리는 왜 미리 받을까? 이것은 ‘확보주의’다. 확보주의란 이기주의의 한 형태로 일단 확보할 수 있는 이득은 미리 챙겨두고 보자는 심산이다.
올봄 학회 참석차 교토(京都)에 다녀왔다. 교토는 고풍스러운 분위기, 좁은 골목길, 친절한 시민들이 사람의 마음을 푸근하게 한다. 이런 게 인간적인 도시일까. 게다가 도시샤(同志社) 대학에 유학 갔던 민족의 자랑 윤동주와 정지용의 시비(詩碑)가 있어 더욱 정이 간다. 정지용이 시에서 읊었던 가모가와(鴨川)는 여전히 소리 없이 흐른다.

교토의 버스는 한국 버스와 세 가지가 다르다. 첫째, 한국 버스에서는 앞문으로 타서 뒷문으로 내리는데, 교토 버스는 반대다. 둘째, 우리와는 반대로 교토에서는 내릴 때 요금을 낸다. 셋째, 교토의 버스에서는 끊임없이 안내방송이 나오는데, 버스의 현 위치를 알려주기도 하지만 한 가지 흥미로운 내용이 있다. 그것은 하차 시 미리 일어서지 말고 반드시 버스가 멈춘 뒤에 앞으로 나오라는 안내다. 실제로 승객들은 그렇게 행동한다.

전세 제도는 전형적인 확보주의

시내버스의 차이점이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 한다. 교토에서는 버스가 멈춘 뒤에 승객들이 일어서서 내리니 안전하고 여유가 있다. 우리는 달리는 버스에서 문 앞으로 나와 미리 서 있어야지 자칫 꾸물거리다가는 정류장을 놓치거나 기사에게 잔소리 듣기 딱 알맞지 않은가. 소비자는 왕이라고 하는데, 과연 승객이 왕인지 짐짝인지. 요즘은 우리 버스도 많이 좋아져서 친절한 기사도 눈에 띌 정도로 늘어났지만 하차 관습만은 바뀌지 않고 있다. 양국 간 하차 관습의 차이는 정류장마다 겨우 몇 초의 시간인데, 우리는 그 몇 초를 아끼려고 인간이 비인간적 대우를 받으며 살아간다. 우리는 결국 ‘빨리빨리 병’의 피해자다.

교토 버스에서는 내릴 때 요금을 받는데, 우리는 왜 미리 받을까? 이것은 ‘확보주의’다. 확보주의란 이기주의의 한 형태로 일단 확보할 수 있는 이득은 미리 챙겨두고 보자는 심산이다. 우리 주위에서 확보주의를 자주 본다. 주택임대 방식을 보면 다른 나라는 거의 월세인데, 우리는 전세라는 독특한 제도를 갖고 있다. 전세가 무엇인가? 세를 미리 받아두는 것이므로 이것은 전형적인 확보주의다. 문제는 확보주의 때문에 많은 세입자들이 피해를 본다는 사실이다.

1989년 12월 당시 1년이던 임대기간을 2년으로 연장하고 전세금 인상을 5% 이내로 제한하는 내용의 주택임대차보호법 개정안이 국회를 통과했다. 그러나 법 개정 직후인 1990년 초 전세금이 폭등했고 자살하는 세입자들이 속출했다. 전세 기간이 2년으로 연장되고 장차 세를 5% 이상 못 올리게 되자 집주인들이 미리 왕창 전세를 올렸기 때문이다. 만일 월세 제도였다면 10만~20만원 정도의 월세 인상은 세입자들이 어떻게든 해결할 수 있었을 것이나, 문제는 1천만~2천만원이 갑자기 오르는 전세는 도저히 감당할 길이 없었던 것이다. 세입자의 어려움을 덜어주려는 선의의 정책이 거꾸로 세입자들을 집단 죽음으로 내몬 꼴이 되었다. 이 비극은 두 가지 교훈을 준다. 첫째, 선의의 정책이 반드시 좋은 결과를 가져다주지는 않으므로 정부는 정책 입안에 만전을 기해야 한다. 둘째, 확보주의가 사람을 죽일 수도 있다.

〈시사IN〉의 창간을 진심으로 축하한다. 지난 1년 동안 〈시사IN〉 기자들은 편집권 독립이라는 대의를 지키기 위해 길거리에 내몰리며 처절하게 싸웠지만 결국 관철하지 못했다. 그러나 이들은 패배자가 아니라 승리자다. 이들은 기득권을 확보하려면 할 수도 있었지만 원칙을 지키는 험난한 길을 택했다. 확보주의가 만연한 우리 사회에 정반대의 행동으로 감동을 주었다. 많은 시민들이 열광적으로 출자하고 구독하겠다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부디 〈시사IN〉이 쑥쑥 자라서 확보주의가 아닌 ‘공공의 정신’이 승리한다는 것을 보여주기 바란다.

기자명 이정우 (경북대 교수·경제학)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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