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이 제정된 지 한달 후인 2000년 1월 19일 오후 서울 프레스센터. 재미동포로 4·3을 연구했던 이도영(1947∼2012) 박사는 기자회견을 열고 제주4·3사건 당시 수많은 민간인이 정당한 절차 없이 군 명령에 의해 집단 처형됐음을 보여주는 문건을 공개했다.

1950년 8월 30일 해병대 정보참모 김두찬 중령이 제주경찰국 성산포 경찰서장 앞으로 보내는 '예비검속자 총살집행 명령의뢰의 건'이라는 제목의 공문이었다.

〈div align=right〉〈font color=blue〉ⓒ연합뉴스〈/font〉〈/div〉1950년 8월 30일 해병대 정보참모 김두찬 중령이 제주경찰국 성산포 경찰서장 앞으로 보낸 '예비검속자 총살집행 명령의뢰의 건'이라는 제목의 공문과 문형순 서장의 사진. 문형순 성산포 경찰서장은 명령서 상단에 '부당(不當)함으로 불이행(不履行)'이라는 글을 써 돌려보내 상부의 명령을 거부했다. 사진은 제주4·3 평화기념관 2층 특별전시관의 모습. 2014.4.2.
ⓒ연합뉴스 1950년 8월 30일 해병대 정보참모 김두찬 중령이 제주경찰국 성산포 경찰서장 앞으로 보낸 '예비검속자 총살집행 명령의뢰의 건'이라는 제목의 공문과 문형순 서장의 사진. 문형순 성산포 경찰서장은 명령서 상단에 '부당(不當)함으로 불이행(不履行)'이라는 글을 써 돌려보내 상부의 명령을 거부했다. 사진은 제주4·3 평화기념관 2층 특별전시관의 모습. 2014.4.2.
공문에는 '제주도에 계엄령 실시후 예비구속중인 D급 및 C급 중에서 현재까지 총살 미집행자에 대해서는 귀경찰서에서 총살집행 후 그 결과를 9월 6일까지 육군본부 정보국 제주지구 CIC(방첩대) 대장에게 보고하도록 의뢰할 것'이라고 기록돼 있었다.

2개월 전 발발한 한국전쟁이 4·3의 광풍이 한 번 휩쓸고 지나간 자리에 또다시 큰 희생을 몰고 온 것이다.

정부는 당시 전국적으로 수많은 사람들을 '예비검속'(혐의자를 미리 잡아놓는 것) 했다. 4·3 토벌작전이 이어지던 제주에서는 과거 한 번이라도 군·경에 끌려갔다 온 적이 있거나 무장대에 동조할 가능성이 있는 사람들이 대거 구금돼 대부분 집단 희생됐다.

그러나 성산포 지역만은 예외였다. 김 중령이 성산포 경찰서장 앞으로 보낸 공문이 실행되지 않은 것이다.

당시 초대 성산포 경찰서장인 문형순(1901∼미상·평안북도)은 전시 상황에서 '예비검속자를 총살하라'는 명령서 상단에 '부당(不當)함으로 불이행(不履行)'이라는 글을 써 돌려보내 상부의 명령을 거부했다.

예비검속으로 인해 제주도민 수천명이 희생된 것으로 알려졌지만 문 서장이 있었던 성산포 관내에서는 단 6명만 희생되는데 그쳤다. 그가 아니었다면 마을 주민 수백명이 총살되거나 다른 지역 형무소로 끌려가 행방불명인으로 남았을 가능성이 컸다.

〈div align=right〉〈font color=blue〉ⓒ연합뉴스〈/font〉〈/div〉이도영 전 탐라대 교수가 지난 2000년 1월 19일 외신기자클럽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한국전쟁 전후로 벌어진 무차별적인 양민학살과 관련된 사진과 자료 등을 공개하고 있다.
ⓒ연합뉴스 이도영 전 탐라대 교수가 지난 2000년 1월 19일 외신기자클럽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한국전쟁 전후로 벌어진 무차별적인 양민학살과 관련된 사진과 자료 등을 공개하고 있다.
문 서장이 성산포 경찰서로 옮기기 전 모슬포 경찰서에서도 4·3사건 당시 '자수사건'에 휘말려 목숨을 잃을 뻔한 많은 주민을 살렸다는 증언이 나오기도 했다.

1948년 말 '초토화 작전'의 학살극이 벌어지던 당시 '자수사건'이 잇따랐다. 토벌대는 주민들에게 "과거에 조금이라도 무장대에 협조한 사실이 있으면 자수해 편히 살라"고 말하며 이미 '명단'을 확보하고 있다거나, 자수하지 않았다가 나중에 발각되면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란 협박이 뒤따랐다. 자수자가 하나, 둘 나오기 시작했고 토벌대는 이들을 가차없이 학살했다.

모슬포에서도 주민 100여명이 자수했고 서북청년단(서청)이 조서를 날조해 꼼짝없이 죽임을 당할 처지에 몰렸다.

그러나 이때도 모슬포경찰서에 있던 문 서장이 나서 주민을 구했다.

경찰에 주민을 강요하거나 때리지 말 것을 지시했고, 서청 대원이 조서를 받을 때 날조할 것을 염려해 마을 서기가 조서를 쓰도록 조치, 주민들을 무사히 돌려보냈다.

의로운 행동을 한 문형순 서장은 훗날 4·3연구가 등에 의해 2차 세계대전 당시 자신의 전 재산을 바쳐가며 유대인 학살을 막았던 '오스카 쉰들러'에 비유되며 '제주판 쉰들러'로 불리고 있다.

〈div align=right〉〈font color=blue〉ⓒ연합뉴스〈/font〉〈/div〉1950년 8월 30일 해병대 정보참모 김두찬 중령이 제주경찰국 성산포 경찰서장 앞으로 보낸 '예비검속자 총살집행 명령의뢰의 건'이라는 제목의 공문. 명령서 상단 붉은색 원에 문형순 성산포 경찰서장이 '부당(不當)함으로 불이행(不履行)'이라고 쓴 글이 보인다. 사진상의 문서는 제주4·3 평화기념관 2층 특별전시관에 전시된 공문서 사본이며 원본은 국가기록원에 보관돼 있다. 2014.4.2.
ⓒ연합뉴스 1950년 8월 30일 해병대 정보참모 김두찬 중령이 제주경찰국 성산포 경찰서장 앞으로 보낸 '예비검속자 총살집행 명령의뢰의 건'이라는 제목의 공문. 명령서 상단 붉은색 원에 문형순 성산포 경찰서장이 '부당(不當)함으로 불이행(不履行)'이라고 쓴 글이 보인다. 사진상의 문서는 제주4·3 평화기념관 2층 특별전시관에 전시된 공문서 사본이며 원본은 국가기록원에 보관돼 있다. 2014.4.2.
4·3사업소는 이러한 증언과 채록 등을 토대로 제주4·3 평화기념관 2층 특별전시관에 '의로운 사람' 코너를 만들어 의인(義人) 문 서장의 행적을 전시하고 있다.

이 코너에는 문 서장 외에도 무장대와 담판을 벌여 평화협상을 이끌어 내려 노력한 김익렬 연대장(국방경비대 제9연대)과 마을주민을 살리려 애썼던 강계봉 순경, 장성순 경사, 서청 단원인 고희준 등 의로운 경찰·군인들의 사례가 발굴돼 전시돼 있다.

제주4·3 당시 이러한 의로운 이들의 노력은 반세기가 훨씬 지난 지난해 드디어 결실을 봤다.

피해자와 가해자로 여겨지며 수십년 동안 서로 등을 돌리고 살아온 4·3 유족과 전직 경찰관 단체가 손을 맞잡은 것이다.

지난해 8월 3일 제주도의회 도민의 방에서 제주4·3희생자유족회와 제주도재향경우회의 '화해와 상생을 위한 공동 기자회견'이 열렸다.

이들은 이 자리에서 이념을 버리고 조건 없는 화해와 상생으로 지난 세월의 갈등을 치유하기 위해 노력하고 반목의 역사를 반성하며 4·3의 완전한 해결을 위해 함께 노력하고 대화하겠다고 다짐했다.

올해 국가기념일로 지정돼 열리는 '4·3희생자추념식'에도 경우회가 처음으로 참여해 4·3 희생 영령의 명복을 함께 빌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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