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IN 한향란
한국어로 ‘저널리스트’에 해당하는 말은 뭘까? 한국인 친구들은 대부분 ‘언론인’이라고 답한다. 하지만 저널리스트를 언론인이라고 번역하면 위화감이 생긴다. 언론인이라는 낱말에는, 마치 특별한 신분인 양 보이는 일종의 권위주의가 포함되어 있다. 권력에 대해 항상 의심과 감시의 시선을 유지해야 하는 저널리스트의 정신과는 미묘하게 다르다고 생각된다.

한국에서는, 신문·텔레비전 등 보도기관을 아울러 ‘언론계’라고부르는 일이 많다. 이 단어에는 넓게는 평론가·소설가·교수 등도 포함된다. ‘언어를 다루는 지식인’이 함께 사회를 만들어가고자 하는 엘리트 의식이 강하게 느껴진다.

언론 표현의 자유는 민주주의 사회의 근본이기 때문에, 그러한 자부심을 가지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보도기관 본연의 임무는 어디까지나 사실을 취재해 전달하는 데 있다. ‘언론인’으로서 사상에 근거한 사회를 만들어가는 것이 기자로서 사실을 추구해 나가는 것에 우선되면, 저널리스트로서 본래 구실과 괴리가 생긴다.

요즘 이런 괴리를 실감케 하는 몇몇 사건이 이명박 정부 출범과 더불어 벌어졌다. 수없이 많은 기자가 새 정부에 몸을 담았고 금배지를 달았다.  물론 이들은 베테랑 기자 출신으로서 상당한 실력을 갖추었으리라 짐작한다. 그러나 원래 감시해야 할 대상인 정권이나 정치권에 스스로 들어가는 일은 법정에서 변호사가 돌연 검사로 위치를 바꾸는 것과 같다.

중요한 점은 저널리스트로서 지켜야 할 선을 지키는 것이다. 어느 선배 기자가 나에게 이렇게 이야기한 적이 있다. “저널리스트란 기본적으로 고독하고 외로운 직업이다. 그 고독함을 계속 참지 못하고 스스로 무대에 서고 싶다면, 펜을 버리는 것이 좋다.”

이상한 것은 기자들이 대거 정치권으로 들어가는 것과 관련해 한국 기자 사회에서 자성의 목소리가 크지 않다는 점이다. 어느 기자는 “자기 생각을 세상에 투영하고 싶은 것은 기자로서 당연한 욕심이다”라며 합리화했다. 기자가 정치를 하는 일이 이명박 정부에서만 일어난 것은 아니다. 그 전에도 빈번하게 있던 현상이다. 여기에는 정치부가 언론사 내 엘리트 코스로 여겨지고, 정치 기사를 중요하게 취급하는 한국 미디어 풍조도 크게 작용하는 듯하다.

저널리스트 ‘고유의 정신’ 고집하라

물론 일본 저널리즘도 과거 비슷한 모습을 한 적이 있다. 요미우리 신문사 주필 겸 회장인 와타나베 쓰네오(82)가 대표적이다. 그는 정치부 기자 시절부터 자민당과 친분을 가져, 지금도 정치 기획에 관여한다고 공공연히 말한다. 기자 출신으로 정치가의 길을 걸은 사람은 그 외에도 있다. 하지만 오랜 비판 끝에 최근에는 기자가 정치가로 변신하는 일은 거의 없어졌다. 와타나베 씨 사례는 구시대 일로 받아들여진다. 일본 경제신문사 정치부 출신의 다제 야스히로 씨는 “일본 정치가 낙후한 데는 정치 저널리즘도 책임이 있었다. 정치 저널리즘이 정치와 정계를 혼동하며 세상의 상식과 괴리가 있었기 때문이다”라고 지적했다.

한국 매스컴의 역사는 저항의 역사였다고 알고 있다. 일본 통치 시대 때 총독부의 발행 금지 처분을 받으면서도 저항해온 기자들은 박정희 군사정권 아래서도 저항을 계속했다. 그러다 1987년 민주화 선언으로 자유를 얻은 매스컴은 당대 권력과 싸우거나 혹은 어울리면서 크게 세를 넓혔다. 그러나 한국 언론계는 다른 분야를  배타시하는 풍조가 있었고, 뒤이은 인터넷의 부흥과 더불어 뉴 미디어가 차례로 탄생해 구 미디어를 위협하는 상황이다. 기자의 사회적 신뢰도는 점점 더 떨어져간다.

한국 기자가 ‘언론인’으로서 자부심을 가지는 것은 당연하다. 그 자부심이 권위와 결합하지 않고 저널리스트 고유의 정신을 고집할 때 ‘언론계’의 피는 좀더 활발하게 흐를 것이다.

기자명 사토 다이스케 (교도뉴스 기자·일본인)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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