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IN 한향란구로생협 조합원들이 해초새우죽을 맛보며 평가지를 작성하고 있다. 생협에서 판매하는 먹을거리는 모두 ‘소비자’인 조합원이 결정한다.
지난 5월14일, 서울 고척동 구로생활협동조합 사무실 문을 여니 압력솥 돌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아이를 들쳐 업은 조합원 주부 7명이 차례차례 모여들었다. 사무실 탁자 위에는 방금 지은 밥과 죽, 냉면, 수프, 과자, 곰탕 등 어울리지 않는 조합의 음식이 어지럽게 널렸다. 주부들은 아이를 무릎에 앉히고 수저로 음식을 조금씩 떠먹기 시작했다. 가끔은 아이 입에도 넣어줬다. “이건 왜 이렇게 조미료 맛이 강하지?” “이 곰탕에 들어간 재료들은 다 국산 확실하죠?” 주부들은 깐깐하게 따져 물으며 ‘심의 물품 평가서’의 칸을 채웠다. 여기서 좋은 평가를 받은 물품들은 빠르면 한 달 뒤부터 전국 생협 조합원에게 판매된다. 판매 전에 안전한지, 맛있는지, 가격은 적당한지 상품을 평가하고 시장 출하를 결정하는 이들은 바로 소비자인 ‘생협 조합원’이다.

"마트, 백화점 유기농 식품은 못 믿겠다"

믿고 먹을 만한 게 없다는 일반 소비자의 걱정이 깊은 요즘, 생협 조합원들은 잇따른 먹을거리 파동에도 불안해하지 않는다. 생협은 이미 안전한 밥상을 실천해왔기 때문이다. 직접 맛보고 평가하는 ‘물품 심의’도 예전부터 매달 열리는 모임일 뿐이다. 아들 상준이(7)의 아토피 발병 이후 7년째 생협을 이용한다는 공병례씨(38)는 “솔직히 마트나 백화점에서 국내산, 유기농이라고 비싸게 파는 상품들을 못 믿겠다. 속이고 판다는 뉴스도 나오지 않았나. 하지만 조합원이 직접 생산 현장을 볼 수 있는 생협 물품은 100% 믿고 산다”라고 말했다. 

생협이 안전한 먹을거리를 위한 ‘새로운’ 대안은 아니다. ‘웰빙’이나 ‘로하스’라는 말이 생겨나기 훨씬 전부터 생협은 친환경·국내산 물품을 조합원들에게 공급해왔다. 1970∼80년대 ‘우리 농촌 살리기’와 ‘소비자 운동’이 만나 농산물 생산자와 도시 소비자가 직거래를 시작했다. 중간유통 과정 없이 농사짓는 사람과 먹는 사람이 서로 얼굴을 마주하고 믿음을 다졌다. 그렇게 키워온 생협이 이제 조합원 수 40여 만명, 전국 직영 매장만 100군데가 넘는다.

ⓒ시사IN 윤무영생협에 가입하면 국내산 친환경 농산물을 시중가보다 싸게 살 수 있다. 위는 마포두레생협 매장.
한살림, 한국생협연대, 두레생협연대, 여성민우회 생협 등 어디가 어디 소속인지 일일이 가리기는 힘들다. 여기저기에서 자발적·산발적으로 생겨난 탓이다. 오랜 역사와 최근 늘어난 친환경 식품 수요에 비하면 조합원 수가 그리 많다고도 할 수 없다. ‘홍보’에 큰돈을 들이지 않는 생협의 특성 때문이다. 하지만 웬만한 지역에는 지역 생협이 조용히 둥지를 틀고 있다. 인터넷 홈페이지 등에서 자기가 사는 지역에서 가장 이용하기 편리한 생협을 찾으면 된다. 

어떤 생협 단체이든 운영방식은 비슷하다. 가입비와 탈퇴시 돌려주는 출자금 2만~3만원을 내고 가입한 조합원은 물품을 집으로 배달받거나 매장에 가서 직접 살 수 있다. 모두 친환경·국내산 이지만 가격은 시중보다 20~30% 싸다(39쪽 기사 참조). 공급가격을 미리 정해놓고 납품하는 ‘계약 재배’ 방식으로 생산자도 크게 손해보지 않는다. 생협이 남기는 ‘이윤’은 제값에 파는 생산자와 싸게 사는 소비자가 가져간다.

제값에 파는 생산자, 싸게 사는 소비자

생협 먹을거리에 대한 믿음은 ‘완벽한 공개’에서 나온다. 물품 포장지에 찍힌 유통 인증번호를 생산유통인증시스템 홈페이지(www.kcod.or.kr)에 입력하면 생산자 이름과 사진, 연락처는 물론 재배 경력과 철학, 상품 출하 과정마다의 사진과 토양, 물, 시설의 상태까지 점검할 수 있다. 조합원이 불시에 생산지 점검을 가기도 한다. 거기서 내가 먹는 음식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일일이 확인할 수 있다.

생협이라고 식품 사고가 아예 없지는 않다. 지난 4월 여성민우회 생협 상담팀에 우유 맛이 이상하다는 조합원 불만이 접수됐다. 다른 조합원이 원인을 찾아 나섰다. 생산지를 방문해 ‘40분간의 보일러 고장 때 우유 파이프라인에 남아 있던 우유가 리턴되지 않아’ 발생한 문제라는 걸 밝혀내고 제품을 모두 회수했다. 생산자와 논의해 구체적인 보완책도 세우고 재발하면 공급을 중단하기로 약속했다. 이런 내용은 5월 생협 소식지에 A4 2장 분량으로 꼼꼼히 적혀 공개됐다. 문제가 발생하면 일단 쉬쉬하기 바쁜 일반 식품기업과는 다른 모습이다.

"자연양계 농장은 AI에도 안심"

모든 정보를 공유한 덕에 생협 조합원들은 광우병이나 AI 같은 먹을거리 파동에도 비교적 담담하다. 여성민우회 생협 매장 ‘행복중심’ 반포점 박영수 매니저는 “닭고기는 약간 주춤하지만 한우는 꾸준히 잘나가고 있다”라고 말했다. 자녀들에게 “밖에서는 믿을 수 없으니 한우라고 해도 절대로 쇠고기를 먹지 마라”고 당부하는 주부 이정희씨(35)도 생협에서 만든 한우 곰탕 고기는 스스럼없이 아이에게 먹인다. 소와 닭에게 어떤 사료를 어떻게 먹일지까지 생산자에게 직접 요구하고 반영시킬 수 있기에 얻은 ‘믿음’이다. 

ⓒ여성민우회 생협생협 조합원들은 수시로 가는 ‘생산지 점검’을 통해 먹을거리 안전을 직접 확인할 수 있다.
생협은 소비자뿐 아니라 생산자에게도 고마운 존재다. 믿어주는 소비자 덕에 요즘 같은 먹을거리 재앙 시기, 생협에 물건을 대는 생산자는 타격을 덜 받는다. 홍성에서 한우 50마리를 키우는 한은구씨는 “원래부터 항생제도 안 쓰고 GMO(유전자조작식품) 사료도 안 먹이고 축사 면적도 마리당 3평으로 널찍하게 뒀다. 이런 걸 소비자가 다 눈으로 확인했으니 안심하고 먹을 수 있는 거다”라고 말했다. 남양주에서 닭 6500마리를 키우는 김병수씨(50)도 ‘안전한 먹을거리 제공’에는 자신이 있었다. “자연양계, 무항생제, 유정란, 평당 7마리 이하라는 원칙을 지키며 키워왔다. 온도도 전기장판 대신 쌀겨와 볏짚으로 맞춘다. 그 덕에 닭들이 면역력이 굉장히 강하다. 이런 데가 전국에 80군데쯤 있는데 AI에 감염된 곳은 한 군데도 없다.”

친환경 농사를 짓는 영세 농민들은 생협에 물건을 내지 않으면 살아남기 힘든 경우가 많다. 홍성풀무생협 축산위원회 김영규 팀장은 “마트나 도매시장의 친환경 농산물 시장은 이미 소수의 대농이 꽉 잡았다. 웬만한 규모가 아니면 마트 등에 납품해서는 물류비도 안 나온다. 돈과 힘, 시간을 들여 어렵게 유기농사를 지어도 영세 농민은 이윤을 남기며 팔 곳이 없다”라고 말했다.

생산자는 ‘자식같이 키운 농산물의 가치를 알아주는’ 생협 소비자들이 고맙다. 홍성에서 25년째 친환경 쌀과 채소를 기르는 박종권씨는 “일반 시장이나 마트로 내놓는 물건은 철저히 이윤을 추구하는 중간유통망을 거치면서 ‘가격’으로만 남는데, 생협에서는 가격보다 물건의 가치를 인정해준다”라고 말했다. 생산비 보장이 안 되는 일반 시장과 달리, 생협은 애초에 정가로 계약을 한다. 일반 시장에서는 공급이 남으면 가격이 폭락하지만 생협에서는 조합원끼리 자체로 소비 창출 운동을 펼쳐 농민의 근심을 덜어주기도 한다. 

"농업 무관심이 위험한 밥상 만든다"

“이 냉면에 들어가는 재료 정보 좀 주세요.” 5월14일 구로생협 물품 심의 시간, 한 조합원이 정보를 요구하자 홍은경 물품위원장이 서류를 뒤적였다. 마늘과 고춧가루 등 18개 원재료의 배합비율과 구입처 주소, 전화번호, 원산지 인증번호까지 공개됐다. 생산자가 적어 보내는 ‘물품사양서’에는 왜 이 냉면을 개발했는지, 다른 냉면과 어떻게 다른지, 냉면을 만들 때 사용한 기계는 뭔지 등 온갖 정보가 다 들어 있다. 수질 검사서, 물품원가 계산서, 원산지 증명서, GMO 결과서도 첨부했다.    

생산자들은 이렇게까지 깐깐한 생협 소비자가 부담스럽지는 않을까. 충북 옥천에서 한방 복숭아를 키워 생협에 내다파는 ‘생산자 조합원’ 강영근씨(56)는 전혀 부담스럽지 않다고 한다. “숨길 수도, 숨길 이유도 없다. 와서 보면 (정직하게 농사짓는지) 단번에 안다. 까발려야 믿고 먹으라고 할 수 있지 않겠나.” 농민 박종권씨는 안전한 밥상을 만들어내는 주체는 농민 혼자만이 아니라고 말했다. “우리 먹을거리에 관심을 가지고 함께 가꿔나가면 농사짓는 사람도 외롭지 않게 안전한 농산물을 생산할 수 있다. 지금 도시 소비자들은 대부분 농업은 자기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잖은가. 바로 그게 위험한 밥상을 만든다.” 
기자명 변진경 기자 다른기사 보기 alm242@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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