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클 무어의 다큐멘터리 〈식코〉를 한국에서 봤다. 이 영화에는 사고로 손가락 두 개를 잘린  미국인이 비싼 의료비 탓에 손가락 하나만 붙이고, 나머지 잘린 손가락은 그냥 버렸던 사연이 나온다. 많은 한국인이 그 장면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하지만 나는 놀라지 않았다. 〈식코〉를 보기 석 달 전 더 심한 사례를 들었기 때문이다. 샌프란시스코에 사는 우리 형이 이야기다. 친구 중에 그림 액자 만드는 목수가 있는데, 어느 날 작업을 하다가 손가락을 다쳤다. 그는 병원에 가지 않고 스스로 치료하려 했다. 상처는 병균에 감염돼 악화됐고 급기야 팔 전체로 번졌다. 그 목수는 거의 생명을 잃을 뻔했다. 도대체 왜 이 사람은 병원에 가지 않은 걸까. 그는 미국에 산다. 그게 이유다. 미국에서 의사를 찾아가는 것은 큰맘 먹어야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시사IN 안희태
내 친구 케빈은 알래스카에 산다. 건축가인 그는 돈을 꽤 번다. 매달 의료보험회사에 600달러(약 60만원)를 내지만, 감기에라도 걸려 병원 진료 15분을 받을라치면 엄청난 현금을 지불해야 한다. 지난 2년 동안 케빈은 병원비로 3만 달러(약 3000만원)를 썼다. 병이 심각해져 어쩌면 죽을지도 모른다는 말을 들었을 때, 그의 근원적인 두려움은 목숨을 잃을 걱정보다 집과 재산을 날리지나 않을까 하는 염려였다.

뉴욕에 집이 있는데 한국에 왔다가 종양 조직검사를 받게 된 한 미국 여성은 참 운이 좋은 편이었다. 나는 그녀를 강릉아산병원 로비에서 봤는데, 그녀는 수술을 마치고 막 걷기 시작한 때였다. 그녀가 제일 걱정하는 문제는 암 같은 것이 아니라 미국으로 돌아간 뒤 추가 치료를 위해 병원에 내야 할 돈이었다.

물론 이런 내 미국인 친구 이야기에 대해 반론을 펼칠 사람이 많다는 것도 안다. 강릉에 있는 한 의사는 지금 한국 의사가 환자에게 겨우 ‘3분 진료’만을 하며, 전문적인 상담을 할여유가 없다고 비판했다. 국가가 운영하는 당연지정제 의료보험 제도 아래서는 어쩔 수 없다는 것이다. 병원은 돈을 못 벌고, 능력 있는 환자는 원하는 진료를 받을 수 없어 불만이다. 그는 환자가 값을 더 치르는 데 따라 더 많은 시간을 의사와 상담할 수 있는 시스템을 원했다.

뉴질랜드에서는 관광객이라도 응급실 이용이 공짜지만, 생명에 지장이 없는 수술이라면 몇 년을 기다려야 한다. 나와 같이 일하는 영국인 모벤은 간단한 뾰루지 치료를 받기 위해 병원에 갔다가 6주를 기다려야 한다는 말을 들었다. 그 뒤로 모벤은 병원에 가지 않는다. 아무리 의료보장 제도가 무료라 할지라도, 정작 내가 접근할 수 없다면 소용이 없을 것이다.

미국 무기 살 돈으로 의료보험 제도 유지하라

한국의 이명박 정부가 앞으로 추진할 의료보장 제도는 어떤 모양일까? 처음에는 당연지정제 완화를 주장했던 보건복지가족부가, 〈식코〉 덕인지 의료보험 제도에 대한 사람의 관심이 높아지자, 지난 4월29일 당연지정제를 유지하겠다고 천명했다. 당연지정제는 미국에는 없는 한국 의료보험 제도의 중요한 장점 중 하나다. 하지만 여전히 의사 단체는 당연지정제 완화와 의료민영화를 주장하고 있다. 만약 이명박 정부가 미국식 제도를 이상향으로 상정하고, 의료보험 제도 개혁에 나선다면, 그 제도는 최상위 부유층을 빼놓고는 재앙이 될 것이다.

물론 한국 의료보장 제도가 세계 최고의 시스템이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의사는 하는 둥 마는 둥 많은 환자를 단시간에 진료하기 바빠 오진이 넘쳐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인인 내가 보기에 한국 의료보험 제도는 여전히 단점보다 장점이 많다.

한국식 의료보험 제도를 계속 유지하기 위해서는 정부 재정이 더 필요하다는 말을 들었다. 다른 분야에 쓸 돈을 의료보험 유지에 쓰는 데 국민의 합의가 필요할 것 같다. 어떻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미국산 전투기와 미사일을 사기 위해 투자하려는 막대한 돈을 의료보험 제도 유지에 쓸 수는 없는지 묻고 싶다. 둘 다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지키기 위한 예산이라지만 내가 보기에는 후자 쪽이 좀더 실질적인 의미가 있는 듯하다.

기자명 릭 러핀 (강릉대 외국어교육원 강사·미국인)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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