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9일 울산지방법원 113호 법정. 60석 규모의 방청석으로는 무리였다. 출석 요구를 받은 피고인 323명 중 171명만 겨우 법정에 들어설 수 있었다. 통로를 가득 채워도 모자라 일부는 법정 밖 로비에 서서 재판을 지켜보기도 했다. 2010년 울산1공장 CTS 생산라인 점거 파업을 벌이다 현대자동차로부터 70억원 손해배상(손배) 소송을 당한 비정규직 노동자들이었다. 이날은 두산중공업 배달호씨가 78억원에 이르는 손배·가압류에 항의하며 분신한 지 꼭 11년이 되는 날이었다.

현대차 비정규직지회에 대한 거액 손해배상 판결이 계속되고 있다. 지난해 12월19일 울산지법 제5민사부는 90억원 배상판결을 내렸다. 노조 상대 손해배상액으로는 역대 최고 금액이다. 재판부는 앞서 지난해 10월에도 현대차 비정규직지회 조합원 11명에게, 회사 측에 20억원을 배상하라고 판결했다. 재판부는 “공장 점거로 생산라인 가동을 전면 중단시킨 것은 폭력의 행사까지 나아간 것으로 반사회적 행위다”라고 판결 이유를 밝혔다.

현재까지 1심 판결이 난 재판 결과만 합쳐도 132억원. 여기에 2010년 점거 파업과 관련해 70억원이 추가로 나올 예정이다. 전체 조합원 900여 명 중 70%가 넘는 680명이 손해배상 소송을 당했다. 점거농성장 안에서 조합원들 수십명을 빠져나가게 했던 ‘손배 위협’의 현실화다.

ⓒ시사IN 이명익철탑농성을 벌인 현대차 비정규직지회 천의봉·최병승씨는 거액의 손배소를 당했다.
실제로 농성 단계에서 손배는 위력을 발휘한다. 현장에서 조합원들이 가장 많이 흔들릴 때가 바로 회사 측이 손해배상을 청구한다는 얘기가 들려올 때다. 2010년 현대차 울산1공장의 25일 점거파업에 참여해 회사 측으로부터 20억원 손배소를 당한 박점규 비정규직없는세상 집행위원은 “‘손배 걸리면 집안이고 재산이고 다 날린다. 정규직 안 되어도 좋으니까 제발 농성 그만하고 나와라’ 이런 전화가 집안 식구들한테 빗발치기 시작한다. 간부들이 책임질 테니 일반 조합원들은 안심하라고 아무리 말해도, 불안해하던 조합원들이 수십명 빠져나갔다”라고 당시 분위기를 전했다. 농성이 끝난 뒤 부당한 손배 판결에 항소하려 해도 만만치 않다. 현대차가 제기한 모든 손해배상 소송에 대한 항소 비용만 2억원에 달한다. 소송에 따른 모든 비용은 대내외 모금을 통해 충당한다.

“4억5800만원, 38억원, 12억원…. 이제는 신경도 안 쓰고 있습니다. 평생 가도 못 만져볼 돈이라.” 현재 현대차 비정규직지회 법규부장을 맡고 있는 천의봉씨(32)는 자신이 당사자인 손해배상 소송의 총액을 묻자 이렇게 답했다. 296일 동안 철탑 점거농성을 벌이다 지난해 8월8일 내려온 최병승·천의봉씨도 손배 및 가처분에 예외가 없다. 최씨는 20억 손배소를 당했다가 1심에서 기각됐다. 임금 승소 판결은 받았지만, 현대차 쪽이 8억4000만원과 이자 20%를 더한 9억원에 대해 공탁금을 걸어 아직까지는 받을 수 없는 돈이다.

철탑농성의 대가도 가혹하다. 두 사람은 지난해 12월 한국전력 울산전력지사장으로부터 공문을 받았다. 송전철탑 무단점거 농성 퇴거단행 및 출입금지 가처분에 따른 간접강제금 1억2300만원(1인당 6150만원)을 연말까지 납부하라는 내용이었다. 이미 법원이 가처분 신청을 받아들인 상태여서, 한전이 가압류를 거는 등 간접강제금 집행을 할 것이라고 두 사람은 내다본다.

철탑농성 당시 생긴 허리디스크 치료를 받느라 아직 병원을 다닌다는 천의봉씨는 “돈으로 이만큼 때려놓으면 조합원들이 움직이지 못한다는 걸 아는 것이다. 불법 파견이라는 원인 제공을 한 이들은 처벌하지 않으면서 노동자들만 형사처분, 해고, 손배라는 삼중 처벌을 받아야 하는 게 현실이다”라고 말했다. 그는 노조로부터 월 50만원 생활비를 지원받으며 3년째 해고자로 살고 있다.


기자명 전혜원 기자 다른기사 보기 woni@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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