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남 당진시 석문면 교로리. 철강단지에서 내뿜는 연기가 도로에 자욱했다. 괴물같이 거대한 송전탑이 빼곡하게 들어선 곳을 지나 육지의 끝자락까지 도달했다고 느낄 때쯤 작은 마을이 나왔다. 한때 일출과 일몰이 장관이라고 유명했던 마을. 그러나 뜨내기가 절반에 가까운 이곳은 어딘가 우울하다. 100만㎾급 화력발전소 2기(당진화력발전소 9·10호기)가 건설 중이다.

건설 현장에서 일하는 김종현씨(가명·43)는 경기도 평택에서 나고 자랐다. 지난해 10월, 이곳까지 흘러들어왔다. 건설사 측이 마련해준 숙소가 거처다. 처지가 비슷한 남자 셋이 함께 지낸다. 초등학생 키만 한 137ℓ 냉장고, 낡은 텔레비전 한 대가 놓여 있다. 아내가 싸준 이불 한 채, 옷 몇 벌이 개인 소유물의 전부다.

재산 가압류로 남은 퇴직금이 ‘3만7650원’

김씨는 쌍용자동차 해고자다. 1993년 12월10일 조립팀에 입사했다. 2009년 77일간 옥쇄파업을 거쳐 곧바로 구속됐다. ‘함께 살자’고 법에 호소했지만, 그는 ‘죽고’ 말았다. 감옥에서 7개월을 신경안정제로 버텼다. “내가 왜 ‘죽어’야 했나?” “나는 왜 노조를 했나?” 등 ‘내가 왜’ ‘나는 왜’로 시작하는 질문이 끊임없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생각하지 않으려고, 애썼다. 후회하지 않기 위해, 버텼다. 쉽지 않은 일이었다. 받아들이지 못하면, 다른 동료들처럼 목숨을 끊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하루 한 번은 죽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힘들다, 죽자, 살아야지, 외롭다, 죽자, 살아야지….’

2010년 풀려나긴 했다. 그가 살던 평택에는 ‘산 자’와 ‘죽은 자’가 공존했다. 그는 쌍용차 작업복을 입은 사람만 보면 화가 났다. 노려보고, 때때로 주먹을 앞세웠다. 미움과 무기력이 뒤범벅되었다. 정신이 피폐해진다고 느꼈다. 조금씩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러나 파업과 구속의 1년6개월을 거치며 쌓인 빚은 어찌할 수가 없었다. 가족의 이름으로 남은 빚은 2억원. 이자만 다달이 150만원이다. 의료보험료도 180만원이나 밀렸다. 생계비가 없어 고통당하는 가족을 그냥 보고 있어야 하는 일도 너무 힘들었다.

김종현씨는 쌍용자동차 평택공장에서 16년 동안 일했다. 쫓겨나면서 받은 퇴직금은 5800만원이다. 이 중 2900만원이 회사 측이 건 가압류에 묶여 있다. 나머지 2900만원은 퇴직금을 담보로 받은 대출금으로 빠져나갔다. 16년을 일하고 그가 손에 쥔 퇴직금은 단돈 3만7650원이었다.

재산은 경찰에 가압류되었다. ‘옥쇄파업’ 당시 경찰의 진압비용 중 일부를 노동자들로부터 배상받겠다는 것이다. 김씨에겐 2006년, 결혼 8년 만에 3000만원 대출을 안고 1억원에 장만한 66㎡(20평)짜리 아파트가 있다. 이 아파트라도 처분해서 빚을 줄이고 싶지만, 경찰에 가압류되어 있는 상태라 이마저도 불가능하다. 다만 지난해 11월 수원지방법원이 쌍용차와 경찰이 제기한 손해배상 청구소송에서 김씨의 재산에 대한 가압류를 기각했다. 집을 처분할 수 있는 기회였다. 하지만 경찰이 즉각 항소하면서 가압류는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곧 메리츠화재가 파업 노동자들에게 구상권을 청구할 예정이다. 메리츠화재는 경찰 진압 당시 파손된 쌍용차 설비에 대해 회사 측에 보험금을 지급했다. 이에 대한 책임을 노동자들에게 묻겠다는 것이다.

보험회사마저 노동자에게 구상권 청구

지금 김씨의 평택 집은 난민촌 같다. 작은 아파트에 다섯 식구가 산다. 방을 장모에게 양보하고, 중학생 딸과 초등학생 아들, 부부가 함께 거실에서 잔다. 두 아이가 공부할 자리가 없다. 그나마 김씨가 당진에 나와 있는 덕분에 딸아이가 방 하나를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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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IN 이명익

해고 뒤 안 해본 일이 없다. 2011년 당시에는, 쌍용차 해고자·희망퇴직자 상당수가 보험설계 영업에 뛰어들었다. 맨손으로 할 만한 일로는 최선이었다. 김씨도 그중 한 명이다. 그러나 매달 300만원을 벌어도, 150만원은 꼭 지출해야 했다. 영업이라는 게 그랬다. 보험을 하면서 대리운전을 병행했다. 아내도 대리운전에 뛰어들었다. 20% 수수료와 하루 기름값 4만원, 애플리케이션 수수료를 제외하면 한 사람당 하루 5만원 정도가 남는다. 그의 이름이 박힌 명함에는 ‘G렌트카 영업팀’이라고 적혀 있다. 다 쓰지 못한 명함이다. 

그래서 어떻게든 아내에게 매달 일정한 생활비(250만~300만원)를 주겠다는 약속이, 때때로 무너졌다. 그러나 시중은행 대출 한도는 꽉 차 있다. 아내 몰래 신용등급과 관계없이 빌릴 수 있는 사금융을 찾아 생활비를 마련했다. 그러다 보니 아내가 모르는 빚이 별도로 5000만원 더 생겼다. 비싼 이자를 줄일 수 있는 방법을 눈 씻고 찾아봐도, 모르겠다. “손배·가압류만 없어도”가 입가에서 맴돈다.

그러다 당진으로 왔다. 인천의 한 건설현장에서 일하던 쌍용차 해고자 황 아무개씨가 김씨에게 당진 화력발전소 건설 현장을 소개한 것이다. 3명씩 한 팀이다. 40∼50㎏짜리 쇳덩이를 들어 옮긴다. 평평한 쇠를 갈고 용접해 돌돌 말아서 세운다. 오로지 사람의 힘만으로 이렇게 한다. 오전 8시부터 오후 5시까지 일한다. 하루 10만7150원을 벌어 한 달 240만원 정도 손에 쥔다. 그나마 숙식이 제공되는 이곳 처우는 좀 낫다.

그러나 이곳 현장에서 오래 일하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다. 공사가 있어도 인부를 오래 붙잡지는 않는다. 장기적으로 일한 사람에게는 퇴직금을 지불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달이 계약한다. 보통 3개월 간격으로 인부가 바뀐다. 김씨는 발목에 ‘무재해’라고 쓰인 형광 밴드를 감고 있다. ‘무재해’는 해고자 원직복직만큼 공허한 소리다. 앞서 50일 동안 일한 화학공장에서는 사람이 죽었다. 공구 줄이 목에 걸려서, 가스에 중독돼서, 그리고 공사장에서 떨어져서 목숨을 잃었다.

김씨의 세 살 터울 동생도 쌍용차 희망퇴직자다. 두 아들이 실직하면서 노모는 쇠약해졌다. 오랜만에 모인 가족 식탁 앞에서 가압류가 화제에 올랐다. ‘어떻게 할 거냐’고 아내가 묻지만, 방법이 없다는 걸 모두 안다. 국가가, 이미 떠난 회사가 손배·가압류를 던졌다. 손쓸 수가 없다. 목을 조인 채 숨 쉬는 기분이다.

두 아이에게 모든 사실을 숨겼지만, 이미 다 알고 있는지도 모른다. 김씨의 어머니는 “집 팔고 시골로 들어오라”고 했다. 중학생 딸아이가 한마디 내뱉었다. “우리 집 못 팔아. 가압류 걸려 있어요.” 구치소에 가면서 “아빠 해외 출장 다녀올게”라고 했던 말에도 속아준 것인지 모른다.

두 아이는 너무 빨리 성숙했다. 중3인 딸아이가 먼저 제안했다. “아빠, 우리 형편 안 좋은데, 기술 배울게요. 내가 해볼게요.” 초등학교 전교회장인 아들은 김씨의 자랑거리다. 얼마 전에 지방법원의 후원으로 곧 진학할 중학교 교복 값과 상장을 받았다. 아들은 단상에 올라 이렇게 말했다. “개인적으로는 받기 싫습니다. 법이 있다면 해고자도 없어야 하는데…, 우리 집 형편이 어려워서 받습니다.” 대견하기보다 가슴이 찢어졌다.

3년 전 딸아이가 사준 지갑은 구석구석 다 해졌다. 지폐 없는 빈 통이다. 지난해 10월7일 김씨의 생일에, 딸이 새 지갑을 선물했다. 김씨에게 주는 용돈 1만원이 들어 있었다. 비닐도 벗기지 않은 채 고스란히 작업복 안주머니에 넣어뒀다. 훗날 지폐를 두둑이 넣은 지갑을 딸아이에게 내밀면서 “쓰고 싶은 만큼 쓰고 와”라고 말하고 싶다. 손배 가압류가 풀리면, 그때 바로 할 수 있을 것 같다.

손배·가압류로 노동권을 짓밟는 나라

가족과 함께 살기 위해 김씨는 죽지 않는다. 그런데 쌍용차는 직원을 가족이라고 하더니, 내쳤다. 배신감에 절규하는 사람이 많았다. 내칠 때는 ‘상하이자동차’였는데 이제는 ‘마힌드라’다. 상대가 자꾸 바뀌면서 감정이 복잡해진다. 국민을 보호하지 않는 이 나라가 싫다. 모든 걸 버리고 오스트레일리아로 떠난 쌍용차 해고자가 영주권이 나오면 김씨를 초대하기로 했다. 자유를 외치면서 억압적이고, 법이 있어도 가진 자만 배불리는 나라, 손배·가압류로 노동권을 짓밟는 나라. 법은, 쌍용차는 그를 ‘당당한’ 노동자로 인정할까. 1월15일, 해고무효소송이 열린다.
 

그는 〈시사IN〉 제330호 ‘편집국장 브리핑’을 들고 가만히 멈췄다. 원고지 일곱 장 분량이 채 안 되는 글을 아주 천천히 읽어 내려갔다. 그사이, 턱을 괸 손은 입술을 가리고, 콧등을 훑고, 눈을 비볐다. 민심은 이렇게 모이는데 그는, 왜 이렇게 힘든 걸까. 미련하게도 눈물이 자꾸 난다. 헤어지는 길에 그는 기자에게 이렇게 문자를 보냈다. “힘이 들 때 친구가 되어주는 힘은 사랑만큼 즐겁고 아름답습니다.” 늘 힘이 들지만, ‘마음들’ 덕분에 가끔은 견딜 만하다.

 

기자명 송지혜 기자 다른기사 보기 song@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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