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 현대사에서 가장 비극적인 날이라면 단연 1992년 12월6일이다. 1947년 인도 국가 건설 이후 한 번도 권력을 제대로 잡지 못한 야권의 보수 세력 가운데 ‘민족의용단’이라는 집단이 있다. 힌두 종교 공동체주의를 표방하는 이들이 이날 인도 북쪽 아요디아(Ayo dhya) 지역의 한 모스크(이슬람 사원)에 쳐들어가 망치, 도끼 등으로 닥치는 대로 파괴한 것이다. 무갈 제국의 시조 바부르가 세운 모스크였다. 극우 힌두 집단은 또한 500명 이상의 무슬림(이슬람교도)을 학살했다. 이들은 인도 내 무슬림을 같은 민족이 아니라 외래 침략자의 후손이며 적이라고 규정했던 것이다.

ⓒ이광수 제공1992년 12월6일 힌두 광신도들이 아요디아 지역의 한 이슬람 사원을 파괴하고 있다. 그들이 사원을 잿더미로 만드는 데 걸린 시간은 겨우 다섯 시간이었다.
종교 갈등 부추긴 영국 식민정부

사건 이후에는 과격파 무슬림들이 힌두 대중을 적으로 규정하고 테러를 감행하기 시작했다. 테러는 다시 학살을 낳고 학살 뒤에는 또다시 테러가 일어났다. 이렇게 인도는 1992년 12월 이후 20년 넘게 학살과 테러가 순환 반복되는 나라가 되었다. 이 비극의 시작, ‘아요디아 사태’를 기획하고 저지른 집단이 앞서 언급한 민족의용단(RSS: 인도의 제1 야당인 인도국민당과 같은 계열)이다.

민족의용단은 영국 제국주의가 인도를 식민지로 지배한 지 150년 정도 지난 1925년에 형성된 우파 민족주의 단체다. 영국 식민정부는 인도 민족주의 세력을 약화시키기 위해 종교 감정을 조장했다. 그 결과, 인도 사회는 힌두 공동체와 이슬람 공동체로 나뉘어 첨예하게 대립하게 된다. 특히 인도·파키스탄 분단이 진행될 무렵, 무슬림에 대한 민족의용단의 공격과 테러는 더욱 잔학한 양상으로 진행되었다. 급기야 1948년 인도·파키스탄 분단에 반대하며 화합을 외쳤던 마하트마 간디를 암살하기에 이른다. 이로 인해 민족의용단은 네루 정부로부터 활동 금지령을 받았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복권되었다. 그 뒤 차츰 세력을 결집해 지금은 인도 국내외에 지부를 3만여 개나 둔 명실상부한 인도 최대의 극우 단체로 성장했다.

간디를 암살한 이들이 이처럼 세를 불릴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일까? 인도·파키스탄 분단에 따른 거대한 재앙에 인도주의라는 외피를 쓰고 접근하면서 민심을 얻었기 때문이다. 물론 이 인도주의(?)는, 파키스탄에서 인도로 건너온 힌두인에게만 적용되었다.

ⓒ이광수 제공1947년 인도-파키스탄 분단에 의해 발생한 난민 캠프(위)에서 민족의용단은 세를 불렸다.

무력한 정부 대신 손 내민 민족의용단

1947년 인도·파키스탄 분단은 불과 몇 개월 사이 무려 인구 1200만여 명을, 새롭게 성립된 두 국민국가(인도와 파키스탄) 간에 이동시킨 인류사 최대의 비극이다. 파키스탄에서 인도로 내려온 난민들은, 힌두·이슬람 간 살육의 아비규환 속에서 부모형제와 고향, 재산을 잃은 사람들이었다. 자연스럽게 무슬림에 대한 원한과 복수심으로 사무쳤다. 이들에게 파키스탄은 같은 하늘 아래 살 수 없는 원수였다. 인도로 이주한 난민들을 살갑게 맞아주는 사람은 없었다. 식민지를 갓 벗어난 인도 정부는 월남(?)한 이주민들을 챙길 만한 여력을 갖추지 못했다. 토착 인도인들도 제 목숨 하나 부지하기 힘든 세월이었다. 이런 가운데 나선 자들이 바로 민족의용단이다.

민족의용단은 먼저 이주민들이 모인 난민촌에서 구호와 의료 지원을 도맡았다. 물론 기독교 선교사들이 난민 지원에 참여하기도 했다. 그러나 기독교 선교사들의 궁극적 목표는 난민 보호라기보다 개종(기독교로)이었다. 난민들은 인도로 내려오는 과정에서 종교 갈등과 개종을 둘러싸고 돌이킬 수 없는 마음의 상처를 입은 사람들이다. 다시 개종을 종용하는 기독교 선교사들에게 마음을 줄 턱이 없다. 오히려 난민들은, 적어도 겉으로는 아무 대가 없이 봉사하는 민족의용단으로부터 감동을 얻었다. 민족의용단은 난민들을 ‘같은 민족 힌두’의 품으로 데려오기 위해서만 일한다고 강조했던 것이다. 이런 과정에서 힌두 난민들은 서서히 ‘우리’는 ‘인도 민족’이 아니라 ‘힌두 민족’이며, ‘파키스탄과 무슬림은 원수’라는 민족의용단의 사고 프레임에 동조하게 된다. 과연 세력을 불릴 수 있는 수단은, 이념이 아니라 ‘가슴’이었던 것이다.

인도 정부는 제대로 된 행정 체계를 갖추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이미 전국적으로 상당한 조직을 가진 민족의용단에게 난민 관련 업무를 맡기다시피 했다. 당시 가장 중요한 행정 업무는 재산 배분이었다. 인도에서 파키스탄으로 이동한 이주민들과 파키스탄에서 인도로 온 이주민들의 집과 재산을 조사한 뒤 그 규모가 서로 비슷한 것을 골라 배분해주는 작업이었다.

그런데 이 업무를 맡은 조직이 바로 민족의용단이었다. 난민들로서는 민족의용단에 기대는 것이 가장 현명한 처사였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수많은 난민들이 자신들의 이념과 관계없이 민족의용단에 가입했다. 좀 더 넓은 시각으로 보면, 이때부터 수구 보수 집단의 생태계가 형성되기 시작한 것이다. 이 생태계의 내용은 권력과의 유착 및 부패, 그리고 이에 기반을 둔 특정 집단의 세력 확보와 군림이다.

파키스탄에서 인도로 이주한 난민들이 애초부터 민족의용단 스타일의 힌두주의를 신봉하는 사람들은 아니었다. 반(反)이슬람주의자나 힌두 근본주의자도 아니었다. 오히려 대다수가 네루 정부의 세속주의(정교 분리)를 지지했다. 난민들의 피란 동기는, 민족의용단의 거창한 홍보와 달리, 힌두주의에 기초한 새로운 국가를 인도에 건설하는 것이 아니었다. 대다수는 힌두와 무슬림 사이에 벌어지던 유혈 폭력 사태를 잠깐 피하고 싶었을 뿐이다. 그러나 당장 먹고살 일이 막막해서 민족의용단에 가입했던 것이다.

ⓒ이광수 제공1925년 형성된 민족의용단은 지부를 3만여 개나 둔 최대의 극우단체로 성장했다. 위는 민족의용단 집회 모습.

하지만 난민들은 점차 무슬림에 대한 적개심으로 충만한 극우 힌두 민족주의자로 변하기 시작한다. 그럴 만도 했다. 난민 캠프에서부터 하루가 멀다 하고 힌두와 무슬림 사이에 폭력 충돌과 난동이 벌어졌다. 그런데 그 난동을 주도하고 조직한 세력이 바로 민족의용단이었다. 그들은 겉으로는 난동을 부인하면서 자작극 등 온갖 방법을 동원해 폭력 충돌을 사주하고 실행에 옮겼다. 민족의용단은 낮에는 인도주의자, 밤에는 테러 집단이었던 것이다.

한국 서북청년단과 닮은 점·다른 점

극우적 분위기를 조장한 덕분에, 민족의용단은 간디 암살로 활동금지령을 받은 뒤에도 ‘우리 힌두’라는 동류의식으로 국민의 동정심을 이끌어낼 수 있었다. 더욱이 곳곳에서 힌두·무슬림 종교공동체 분쟁이 빈발하고, 카슈미르 분쟁(인도·파키스탄 접경 지역의 귀속 문제를 둘러싸고 지난 50여 년간 양측 간에 무력 충돌이 이어졌다)까지 발발하면서 파키스탄에 대한 적개심과 힌두 민족주의는 함께 성장했다.

하지만 민족의용단의 제도권 진입은 인도 건국 이후 한동안 그리 순조롭지 않았다. 민족의용단과 같은 계열의 정치 조직인 국민단(Jana Sangh: 현재 제1야당인 인도국민당의 전신)이 힌두 쇼비니즘적 정치에만 과도하게 의존하면서 정책 정당으로 성장하는 데 실패했기 때문이다. 반면, 초대 수상인 네루는 자유주의 및 세속주의에 기반한 국가자본주의 노선을 국가 운영의 기본 프레임으로 확립하는 데 성공했다. 이에 따라 종교·카스트·지역·언어 등을 초월한 국민통합의 정치가 확산되면서 협력과 합의의 정치 문화가 널리 조성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런 토양에서 민족의용단 등 힌두 민족주의 정치는 자연스럽게 쇠퇴할 수밖에 없었다.

민족의용단은 얼핏 보면 한국의 분단 과정에서 활동한 우익 단체 서북청년단과 매우 닮았다. 무엇보다 이념적 근본주의를 사상적 기반으로 한다는 점이 같다. 물론 그 사상적 기반으로 보면 인도에서는 힌두교라는 종교이고, 한국에서는 반공주의라는 차이가 있다. 그러나 힌두주의나 반공주의나 특정 집단의 이익을 지키기 위한 이데올로기라는 측면에서 본다면 두 집단은 일란성 쌍생아다. 분단의 시기에 고향을 버리고 다른 곳으로 강제 피란 온 사람들이라는 사실과 상대방에 대한 적개심을 근간으로 한다는 점도 공통점이라 할 만하다. 가장 중요한 공통점은 두 집단 모두 인도주의적 구호와 테러 난동을 동시에 구사하는 전략을 사용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두 집단은 매우 다르다. 먼저 민족의용단은 반(反)영국 민족운동에서 상당한 몫을 담당했지만 서북청년단은 그렇지 않다. 민족의용단은 처음에는 권력에 줄을 대기보다 독자적으로 활동했다. 그러나 서북청년단은 처음부터 친일파와 이승만 독재 정권의 앞잡이였다. 가장 크게 다른 점은, 민족의용단의 경우 독립 이후 40여 년이 지난 1990년대부터는 폭력 테러를 동반한 난동을 주도하면서 새로이 정권을 창출하는 전위대 노릇을 자임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서북청년단은 테러 집단으로 존재하다가 사라져버린다. 이는 결국 민족의용단과 달리 서북청년단은 보수 우익적 정체성과 독립성도 키워가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국에는 인도 민족의용단 수준의 수구 난동 세력도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기자명 이광수 (부산외국어대 러시아·인도통상학부 교수)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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