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와대사진기자단10월2일 노무현 대통령이 부인 권양숙 여사와 함께 군사분계선을 넘어 북쪽 땅에 발을 디뎠다.
노무현 대통령의 방북 길에서 단연 화제가 된 것은 군사분계선을 걸어서 넘은 일이다. 평양 시민들 사이에서도 이는 큰 화제가 됐다고 한다. 재일본조선인연합회 기관지인 조선신보가 10월3일자에서 전한 바에 따르면 노 대통령의 도보 월경 장면은 노 대통령이 방북한 2일 오후 5시35분께 2분 정도 짧게 방영됐다. 이날 평양 시내 퇴근길 화제는 온통 월경하던 당시의 노 대통령 표정과 모습이었다고 한다. 특히 월경 때 노 대통령이 분리선을 포착하고 잠시 주춤했던 것을 두고 그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이야기꽃이 만발했다. ‘영부인과 함께 넘으려고’라는 해석부터 ‘분리선에서 더욱 예식을 갖추려고’  ‘더욱 의의 있게 넘으려는 의도였을 것’ 따위 분분한 해석이 나왔다고 한다. 조선신보가 전한 바대로라면 평양의 상상력은 비교적 순박한 편이다. 그렇다면 서울에서는? 단연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노 대통령 ‘영접 장면’이 화제가 됐다. 7년 전 김대중 전 대통령을 맞을 때와는 ‘다르다’는 데 초점이 맞춰졌다. 한국 언론에는 얼굴 표정에서부터 영접 장면 하나하나 시시콜콜한 것까지 미주알고주알 별의별 평가가 다 나왔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노 대통령 영접 태도나 모습은 7년 전 김대중 전 대통령 때와는 많이 달랐다. 그 정치적 의미가 적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7년 전과 지금은 만나는 사람도 다르고, 남북 관계나 저간의 사정도 많이 다르다. 다른 것이 정상일 수 있다. 실제로 다음날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행보는 전날의 여러 가지 억측을 무색하게 했다. 서울 언론들은 또 온갖 분석과 해설을 쏟아냈다. 한국의 언론 보도를 의식한 것 아니냐는 풀이에서부터, 협상 주도권을 쥐기 위한 고도의 협상 전략이라는 해석까지 다양했다. 서울의 상상력을 자극할 일은 그밖에도 많았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참석한 환영 행사장에서 보인 김장수 국방장관의 꼿꼿한 ‘인사’도 그 가운데 하나였다. 그것을 두고 별별 평가가 다 나왔다. 3일 두 번째 정상회담에서 회담 일정을 하루 연장하자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돌발 제안은 서울의 상상력을 폭발시켰다. 온갖 추측과 추정이 무성했다.
단연 상상력에서는 ‘평양’보다 ‘서울’ 언론이 한 수 위임을 이번에도 여실하게 보여줬다. 한국 언론의 거침없는 상상력은 바로 자유 언론의 지표라 할 만하다. 그런데 문제는 언론의 본분이 상상력과는 거리가 멀다는 점이다. 언론의 본령은 사실과 진실의 전달에 있지, 마음껏 상상의 날개를 펴는 데 있지 않다. 그런 점에서 언론은 자유로운 공상가들에게는 죽음과 같은 족쇄나 다름없다. 하지만 한국 언론은 그런 ‘상상의 족쇄’에서 아주 자유롭다.

북에선 월경, 남에선 영접 장면이 관심

상상력이 언론에 꼭 나쁜 것만은 아니다. 권력형 비리와 같은 부정부패 사건을 추적할 때 조각조각 난 사실의 편린들을 꿰어 맞추자면 퍼즐을 풀 수 있는 상상력의 발휘가 요구된다. 일상화돼 있거나 구조화된 병폐나 불의를 드러내는 데도 관행과 일상을 뛰어넘는 자유로운 상상력이 필요하다. 그러나 남북 정상회담처럼 주요 의제와 과정에 집중해야 할 때는 다르다. 화젯거리는 화젯거리일 뿐이다. 그런데도 대다수 언론이, 특히 남북 정상회담에 비판적인 보수 신문일수록 지엽적인 화젯거리에 집착해 온갖 상상력을 발휘한 것은 무슨 이유였을까. 아마도 보고 싶은 것만 보려는 심사가 아니었을까. 남북 정상회담은 그런 점에서는 보수 언론의 상상력을 시험하는 무대이기도 했다. 불행하게도 이번 남북 정상회담은 보수 언론의 상상력에 크게 부응하지는 못한 듯하다. 대신 보수 언론의 상상력, 그 수준과 밑천이 비교적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이제 남북 두 정상이 풀어놓은 보따리를 놓고 이번에는 또 어떤 상상력을 발휘할지 그것이 궁금하다.

기자명 백병규 (미디어 평론가)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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