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의 밥상〉짐 메이슨·피터 싱어 지음산책자 펴냄
미국산 쇠고기 수입 전면개방에 대한 반대 여론이 높아지고 있다. 안전성에 대한 보장이 미흡한 상태에서 성급하게 국민건강권과 검역 주권을 포기했다는 비판이다. 비록 미국 소라 하더라도 광우병 발생 확률은 극히 낮은 수준이라는 반론도 있지만 고기만 먹는 것이 아니라 뼈까지 고아서 먹는 한국 식문화의 특성 때문에 광우병 감염에 대한 염려는 쉽게 해소되지 않을 전망이다. 때문에 “과연 미국산 쇠고기를 먹어도 좋은가?” 하는 것이 우리의 새로운 근심거리가 됐다. 그런 근심의 연장선상에서 아예 이런 질문을 던져볼 수도 있겠다. “도대체 무엇을 먹어야 하는가?” 호주 출신의 세계적인 실천윤리학자 피터 싱어가 농부이자 변호사인 짐 메이슨과 같이 쓴 〈죽음의 밥상〉(산책자 펴냄)에서 던지는 좀더 근본적인 물음이다.  

이미 싱어는 〈동물해방〉(1975)에서 ‘인간 동물(human animal)’이 ‘인간이 아닌 동물들(nonhuman animals)’에 대해 가진 오랜 편견과 독단적인 차별을 비판한 바 있다. 그는 그런 태도를 ‘종차별주의’라고 불렀다. 종차별이라고? 인간의 역사가 인종차별과 성차별의 굴레에서 해방되어온 역사라면 이제는 종차별, 곧 ‘마지막으로 남아 있는 차별’의 철폐와 극복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볼 때라는 것이다. 싱어도 지적하는 것이지만, 사실 영국에서 메리 울스톤크래프트가 〈여성의 권리옹호〉(1792)를 통해서 남성과 동등한 여성의 권리를 요구한 것이 고작 두 세기 전이다. 지금은 너무도 당연한 듯 보이는 이 요구는, 하지만 당시엔 많은 반발과 조롱을 불러일으켰다. 저명한 남성 철학자가 〈짐승의 권리옹호〉라고 패러디했을 정도다.

‘동물의 권리옹호’를 주창하는 싱어는 한때 자연스러운 것으로 간주됐던 여성에 대한 차별이 지금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은 것처럼, 동물에 대한 차별 또한 결코 정당화될 수 없으며 윤리적이지 않다고 말한다. 그가 주된 근거로 내세우는 것은 고통에 대한 감수성이다. 만약 동물도 우리와 똑같이 고통을 느낄 수 있다면, 우리가 그 고통을 무시하는 것은 타인의 고통을 외면하는 것만큼이나 윤리적으로 정당화하기 어렵다는 것이 그의 견해이다.

소·돼지·닭의 ‘권리’와 ‘복지’ 고려하라

‘전형적인 현대식 식단’과 ‘양심적인 잡식주의자’, 그리고 ‘완전 채식주의자’로 분류된 세 가족의 ‘밥상’을 따라가면서 먹을거리의 선택에서 우리가 어떤 윤리적 선택을 할 수 있을지 생각해보는 〈죽음의 밥상〉에서도 저자들의 출발점은 동일하다. 그에 따르면, 우리가 동물성 단백질의 주요 공급원으로 삼는 닭·돼지·소의 ‘권리’와 ‘복지’를 고려해야 할 필요성은 그들의 ‘머리’가 아니라 ‘가슴’에서 나온다. 즉 닭이 우리 생각보다 똑똑한가 아닌가는 문제의 핵심이 아니다. “윤리적으로 정말 중요한 문제는 닭이 얼마나 똑똑한지가 아니라 닭이 고통을 느낄 수 있느냐이다.” 그리고 만약 그들이 고통을 경험할 수 있다면, 불필요한 고통을 주어서는 안 된다는 것, 그것이 우리가 동의할 수 있는 윤리적 태도이다.

피터 싱어는 “윤리적으로 정말 중요한 문제는 닭이 얼마나 똑똑한지가 아니라 닭이 고통을 느낄 수 있느냐이다”라고 강조한다.
하지만 윤리보다는 비용과 편리가 우선 고려되는 현실은 비정하며 잔혹하다. 도살할 때 돼지의 고통을 줄이는 일에 인센티브가 주어지지 않는 한 양돈업자는 돼지의 고통을 던다고 쓸데없는 비용을 낭비하지 않는다. 소는 사육장에 도착하자마자 근육강화제에 해당하는 합성 호르몬 임플란트를 이식받으며, 초식동물이지만 목초 대신에 항생제가 잔뜩 들어간 옥수숫대를 먹는다. 심지어는 광우병을 유발한 양의 골분(骨粉)까지도 먹는다. 그리고 저렴한 육류에 대한 소비자의 선택은 이러한 비인도적 공장식 사육의 논리와 비윤리를 묵인하며 지속시킨다. 먹을거리에 대한 우리의 선택이 우리가 사는 세상을 만드는 것이다.    

남이 무얼 먹거나 말거나 무슨 참견인가 싶겠지만, 무얼 먹느냐에 따라서 우리는 좀더 양심적일 수도 있고 덜 양심적일 수도 있다. 단적으로 말해서, 무엇을 먹느냐는 식성의 문제가 아니라 윤리의 문제다. 저자의 인용에 따르면, 간디는 어떤 나라의 위대함과 도덕적 발전 정도는 그 나라에서 동물을 어떻게 다루느냐에 달렸다고 말했다. 개인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기자명 이현우 (문화 평론가)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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