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싱어는 〈동물해방〉(1975)에서 ‘인간 동물(human animal)’이 ‘인간이 아닌 동물들(nonhuman animals)’에 대해 가진 오랜 편견과 독단적인 차별을 비판한 바 있다. 그는 그런 태도를 ‘종차별주의’라고 불렀다. 종차별이라고? 인간의 역사가 인종차별과 성차별의 굴레에서 해방되어온 역사라면 이제는 종차별, 곧 ‘마지막으로 남아 있는 차별’의 철폐와 극복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볼 때라는 것이다. 싱어도 지적하는 것이지만, 사실 영국에서 메리 울스톤크래프트가 〈여성의 권리옹호〉(1792)를 통해서 남성과 동등한 여성의 권리를 요구한 것이 고작 두 세기 전이다. 지금은 너무도 당연한 듯 보이는 이 요구는, 하지만 당시엔 많은 반발과 조롱을 불러일으켰다. 저명한 남성 철학자가 〈짐승의 권리옹호〉라고 패러디했을 정도다.
‘동물의 권리옹호’를 주창하는 싱어는 한때 자연스러운 것으로 간주됐던 여성에 대한 차별이 지금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은 것처럼, 동물에 대한 차별 또한 결코 정당화될 수 없으며 윤리적이지 않다고 말한다. 그가 주된 근거로 내세우는 것은 고통에 대한 감수성이다. 만약 동물도 우리와 똑같이 고통을 느낄 수 있다면, 우리가 그 고통을 무시하는 것은 타인의 고통을 외면하는 것만큼이나 윤리적으로 정당화하기 어렵다는 것이 그의 견해이다.
소·돼지·닭의 ‘권리’와 ‘복지’ 고려하라
‘전형적인 현대식 식단’과 ‘양심적인 잡식주의자’, 그리고 ‘완전 채식주의자’로 분류된 세 가족의 ‘밥상’을 따라가면서 먹을거리의 선택에서 우리가 어떤 윤리적 선택을 할 수 있을지 생각해보는 〈죽음의 밥상〉에서도 저자들의 출발점은 동일하다. 그에 따르면, 우리가 동물성 단백질의 주요 공급원으로 삼는 닭·돼지·소의 ‘권리’와 ‘복지’를 고려해야 할 필요성은 그들의 ‘머리’가 아니라 ‘가슴’에서 나온다. 즉 닭이 우리 생각보다 똑똑한가 아닌가는 문제의 핵심이 아니다. “윤리적으로 정말 중요한 문제는 닭이 얼마나 똑똑한지가 아니라 닭이 고통을 느낄 수 있느냐이다.” 그리고 만약 그들이 고통을 경험할 수 있다면, 불필요한 고통을 주어서는 안 된다는 것, 그것이 우리가 동의할 수 있는 윤리적 태도이다.
남이 무얼 먹거나 말거나 무슨 참견인가 싶겠지만, 무얼 먹느냐에 따라서 우리는 좀더 양심적일 수도 있고 덜 양심적일 수도 있다. 단적으로 말해서, 무엇을 먹느냐는 식성의 문제가 아니라 윤리의 문제다. 저자의 인용에 따르면, 간디는 어떤 나라의 위대함과 도덕적 발전 정도는 그 나라에서 동물을 어떻게 다루느냐에 달렸다고 말했다. 개인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