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호창1968년 북한 측에 나포됐다가 풀려난 뒤 검찰·경찰의 고문과 날조로 간첩죄를 뒤집어쓴 ‘태영호’ 어부들에 대한 재심이 4월30일 시작됐다. 무력 정치가 지배하던 시절의 이런 황당한 이야기가 과거 일이기만 한 걸까.
10년 전인가요. 전두환의 5·18 쿠데타를 두고 누군가 “성공한 쿠데타는 합법이다”라고 말하는 걸 들었을 때 정말 달려가서 머리를 쥐어박고 싶었어요. 지금이야 그들의 행위가 내란·살인으로 심판받았지만, 사실 10년 넘게 그 쿠데타는 ‘합법’이었습니다.

무력 정치 앞에서 법은 화장실 휴지조각보다 못한 것이었습니다. 불행히도 법은 권력자가 법을 지키고자 하는 의사를 갖고 있을 때만 유효합니다. 권력자의 의지에 따라 어제까지 적법하던 일이 내일부터는 위법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서민은 고단한 일상을 챙기느라 권력자의 의지가 어떻게 바뀌는지 살필 여유가 없습니다.

저는 생업에 종사하다가 갑자기 범법자·간첩이 되었던 사람들의 재심 재판을 위해 전북 정읍으로 갑니다. 법이 정지되고 권력자에게 준법 의지가 없었던 시절의 억울한 사건을 회복하기 위해서입니다.

사건은 1968년 연평도 인근에서 조업 중이던 태영호 어부들이 납북되면서 시작됩니다. 당시 어선 수십 척이 지근거리에서 조업 중이었고, 그 북쪽에는 해군 경비정이 경계 근무를 했습니다. 어로저지선이나 군사분계선을 넘지 않았지요. 나중에 북한 경비정 군인들은 ‘대양호’를 납치하려고 했는데 ‘태영호’를 잘못 알아봤다며 미안하다고 했다니 기가 막힐 노릇이었습니다. 당시에는 워낙 그런 일이 많았고 정부 당국도 사정을 알기에 대부분 무혐의로 사건을 종결했습니다.

그러나 불운하게도 그들이 귀환해 조사를 받는 도중에 무장공비 사건이 터지면서 납북 어부에 대한 정책이 돌변합니다. 자의가 아니었더라도 미필적 고의가 있는 것으로 봐서 탈북죄로 처벌한 겁니다. 권력자의 의지가 묘한 시점에 뒤바뀐 것이지요. 이때부터 어부들에게는 물고문, 전기고문 등 온갖 가혹 행위가 가해지고, 없던 사실이 하나씩 만들어졌습니다.

그렇지만 태영호 어부들은 처벌을 피할 방도가 있었습니다. 해군본부가 정읍지청에 태영호 어부들은 납치되었다는 취지의 공문을 보냈으니 미필적 고의가 없었다는 것을 입증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담당 검사는 그 공문을 법정에 제출하지 않았습니다. 만약 의도된 행동이라면 무죄의 증거도 법정에 제출해야 하는 검사가 준법 의지가 없었고, 공익의 대변자이기를 포기한 것입니다.

친목계가 위장 지하망으로 둔갑

ⓒ연합뉴스2007년 12월 ‘진실과 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위)는 태영호 납북 사건 당사자들에 대한 재심을 권고했다.
어민들은 처벌받고 곧 석방되었지만 이미 몸은 만신창이가 되었고, 육체와 정신이 심각한 훼손을 입은 채 시름시름 앓았습니다. 일부는 사망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불행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어부들은 억울하게 당한 이유를 그저 못 배우고, 무식한 탓으로 돌렸습니다. 그래서 자식이나마 가르치겠다고 교육계를 시작했는데 그 친목계가 자기들을 또다시 죄인으로 몰고 갈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어민들은 1979년에 다시 체포되었고 고문을 당했습니다. 친목계는 위장 지하망으로 둔갑했고 간첩죄와 불고지죄로 처벌됩니다. 간첩이 아니라고 증언한 이웃에게는 위증죄가 덧씌워졌습니다. 또다시 10년 동안 징역살이를 해야만 했습니다. 그 덕에 그들을 조사한 수사관은 승진과 상금을 챙길 수 있었다지요. 이번에는 담당 경찰들이 법을 지킬 의사가 없었습니다.

이제 재심 재판 과정에서 어부들(4명 생존, 4명 사망)의 억울함은 입증될 것입니다. 모두가 법이 정지되고 사리사욕과 무력 정치가 지배하던 시절의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이런 황당한 이야기가 과거의 일이기만 한 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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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명 송호창 (변호사)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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