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고양시 일산구 백석동 주택가. 작은 세탁소를 운영하는 석영인씨(33)는 요즘 정신이 없다. 아이 셋 키우는 일만 해도 버거운데 세탁물 배달하랴, 남편 면회 다니랴 몸이 열 개라도 모자랄 지경이다. 석영인씨 남편 양일석씨(36)는 지난해 11월11일 노동자 대회 때 폭력 혐의로 구속돼 공판 중이다. 1심에서 1년6개월 징역을 선고받고 항소했다. 

“동영상을 봤어요. 행진을 하는데 경찰이 인도를 막았더라고요. 애 아빠는 선두에서 한 네댓 줄 뒤에 서 있었고요. 맨 앞에 있는 사람들이 몸싸움을 하는데 애 아빠가 갑자기 앞으로 나갔어요. 그리곤 다시 뒤로 빠져서 아는 사람과 얘기하고 있었고요. 그때 뒤에서 소리가 나면서 경찰이 어떤 사람을 (전경이 진을 친 쪽으로) 끌고 들어가려고 하는데 애 아빠가 못 끌어가게 그 사람 허리춤을 잡아요. 그리곤 같이 끌려가더라고요.”

경찰에게 끌려간 양일석씨는 경찰 여러 명에게 둘러싸인 채 발길질을 당했다. 그 와중에 점퍼도 벗겨졌다. 그런데 시위 진압 도중 팔이 부러져 10주 진단을 받은 피해 전경이 점퍼가 벗겨진 석씨 남편을 가해자로 지목했다.

석씨는 그야말로 날벼락을 맞았다. 억울하기도 하거니와 초등학교 4학년짜리 큰딸, 그리고 네 살과 세 살짜리 아기를 보살피면서 혼자 세탁소를 운영하는 건 너무 힘들었다. 자동차로 세탁물 배달을 하던 남편이 사라지자 1시간 거리를 걸어서 배달한 적도 있다. 하늘을 원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안건모석영인씨(위)는 남편과 아이들에게 떳떳한 엄마가 되고 싶어한다.

청계피복노조 다니며 어깨 너머로 배운 사회

석씨의 삶은 어릴 때부터 평탄하지 않았다. 아버지가 바람을 피워 어머니로부터 간통죄로 고소당한 뒤 그녀는 여동생과 함께 새엄마와 살았다. 그녀는 어릴 때 기억이 너무 생생한지 어느새 눈물이 그렁그렁하다. “아빠는 그때 사우디로 일을 나가 계셨는데, 새엄마한테 늘 맞고 살았어요. 때리는 이유도 없었어요. 덜 맞으려고 동생 핑계를 많이 댔어요. 동생은 나보다 더 맞았죠. 동생한테 미안해서 그때 이후로 지금도 똑바로 쳐다보지를 못해요.”

석씨는 횡성여고 2학년 때 친구를 따라 서울로 올라왔다. 집에 있던 쌀을 몰래 팔아 차비를 마련했을 정도의 무작정 상경이었다. 다음 날 아버지한테 붙들려 서울 구로동에 사는 이모집에서 모자 공장을 다니기 시작했다. 꿈 많은 10대 소녀에게 공장 생활은 날마다 고통의 연속이었다. 

“거기서 남편을 만났어요. 잠깐 만나다가 서로 연락이 끊어져서 못 봤는데 ‘세광’이라는 와이셔츠 공장에서 연락이 닿았죠. 5년 만에 다시 만나 함께 살기 시작했어요. 그때가 스물한 살 때인가….”
남편 이야기를 하면서 석영인씨의 얼굴이 밝아진다.

“저는 사회에 대해서 아직 많이 알지 못해요. 애 아빠가 가는 길이 늘 옳다고 생각해서 함께 가는 거예요. 어렸을 때는 그저 돈 많이 주는 대기업이 제일 좋은 줄 알았어요. 그런데 남편 따라서 전태일기념사업회랑 청계피복노조를 다니며 어깨 너머로 세상을 배웠죠. 거기 나오는 사람들이 말도 잘하고 연설도 잘하고. 그 중에서도 남편이 가장 멋있더라고요.”

남편 양일석씨는 오랜 세월 평화시장 봉제공장에서 ‘시다’ 생활을 했다. 그러면서 노조와 야학 활동을 하며 사회 참여에 나섰다. 부부는 현재 민주노동당 당원이기도 하다. 양씨가 구속됐지만 석씨는 한 번도 남편이 가는 길이 그르다고 생각한 적이 없다고 말한다.

“그래도 지금 이 순간이 가장 행복해요. 아이들한테 정신을 쏟을 수 있으니까요. 다른 데 정신 팔 겨를이 없어요. 아이들 없으면 하루라도 버티기가 힘들 거 같아요. 남편이 언제 나오나 기다리는 데도 지쳤고…. 그래서 남편에게 그랬어요. 약해지지 말고 애들한테 떳떳한 아빠가 되라고…. 남편도 애들 때문에 버틸 거예요.”

기자명 안건모 (월간 작은책 편집장)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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