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이 밖으로 나가 마음껏 뛰놀면서 자연스럽게 길러지던 생기들이 이제는 따로 시간과 공간 그리고 지도자를 마련해 인위적으로 키워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부모들의 안전 만능주의가 소심하고 결기 없는 아이들을 만들고, 놀이 부족이 비만과 스크린과 게임에 가까워지게 한다는 것은 상식이 되었다. 또한 부모들은 아이들이 놀다가 다칠까 봐 전전긍긍한다. 이런 부모와 교사에게 아이들이 다치지 않는 비결을 하나 이야기해주고 싶다. 아이들이 작게 자주 다치도록 ‘배려’해야 한다. 그렇게 자란 아이들이 크게 다치지 않는다.

또한 흔히 하는 스포츠가 아이들에게 맞는지 따져봐야 한다. 스포츠는 특정 근육만을 반복해서 쓴다. 이 시기 아이들은 고르게 몸을 써야 한다. 따라서 이 아이들한테 권할 것은 놀이이지 스포츠가 아니다. 집단적인 스포츠는 특히 경계해야 한다. 아이들이 놀이의 재미보다 경쟁에 사로잡혀 승패의 노예가 되는 경우가 심심찮게 나타난다. 아이들이 놀면 집중력이 올라가고, 기억력이 좋아지고, 창의력이 생긴다는 함정에 빠지는 것도 경계해야 한다. 이 세 가지가 좋아진다는 것을 부모들은 어떻게 받아들일까. 결국, 공부 잘하게 된다는 것인데 놀이와 몸을 쓰는 것이 이러한 것들을 기르기 위한 수단으로 둔갑하는 순간, 놀이와 운동은 상품이 되고 아이들을 억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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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이는 자유와 해방을 만나는 일이다. 아이들한테 지금 필요한 것은 동무들끼리 함께 몸으로 놀며 자유롭고 거침없고 해방된 세계에서 타인을 속박하지 않는 품성을 일구는 일이다. 이렇듯 몸과 마음과 영혼이 건강한 아이들로 성장하려면 마음껏 뛰어놀게 하는 게 가장 좋지만 그럴 기회가 턱없이 모자란 요즘의 아이들이 선택하는 것이 게임이다. 게임은 게임을 하는 사람보다는 만드는 사람들의 이익을 위해 존재한다. 그러므로 게임하는 사람을 오래도록 붙잡아놓으려는 데 집중할 수밖에 없다. 게임의 해악이 없다고 말할 수 없다. 한 가지만 이야기하면 쏘고 부수고 죽일수록 점수가 올라가는, 다시 말해 부정적인 행동을 하면 할수록 점수가 올라가는 이 세계에 문제가 없다는 주장은 틀렸다. 게임의 유해성은 하는 자에 있지 않고 만드는 자에 기인한다.

‘셧다운제’ 이야기가 다시 들린다. ‘셧다운제’에 반대하는 청소년들의 아우성은 매우 들을 만한 내용이다. 역설적이게도 ‘셧다운제’에 관한 청소년들의 한목소리는 오늘을 사는 아이들이 얼마나 놀 수 없고 놀지 못하고 사는지를 또렷이 보여준다. 여성가족부는 아이들의 수면권과 인권을 위한 제도라 강변하는데, 정작 아이들은 필요 없다고 한다.

‘셧다운제’는 청소년들의 처지에서 보면 삶의 마지막 출구와 숨통을 죄는 폭거나 다름없다. 청소년들이 집으로 돌아오는 시간은 대개 밤 10시에서 늦으면 12시에 가깝다. 이렇게 하루를 사는 청소년들에게 게임은 많은 사람이 설레발치며 단정하듯 만악의 근원도 아니고 그렇게 쉽사리 중독에 빠지는 것도 아니다. 단지 게임을 하며 잠시 쉬고 싶을 뿐이다. 온종일 공부만 하고 아이들이 어찌 견디겠는가.

여성가족부가 청소년들의 수면권과 인권을 진정 생각한다면 ‘셧다운’ 말고 야자를 없애는 운동에 나서라. 놀 시간이 있어야 놀 것이 아닌가. ●

편해문 (어린이놀이 운동가·〈아이들은 놀이가 밥이다〉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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