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국어과 선생님들과 문학 기행을 종종 떠나곤 했다. 마침 내가 좋아하는 작가 김승옥의 〈무진기행〉 배경지를 둘러보는 여행을 갔는데, 가장 인상적인 곳은 단연 순천만이었다. ‘손으로 잡을 수 없으면서도 그것은 뚜렷이 존재했고 사람들을 둘러쌌고 먼 곳에 있는 것으로부터 사람들을 떼어놓았다. 안개, 무진의 안개, 무진의 아침에 사람들이 만나는 안개, 사람들로 하여금 해를, 바람을 간절히 부르게 하는 무진의 안개, 그것이 무진의 명산물이 아닐 수 있을까!’라는 〈무진기행〉의 구절이 내내 뇌리에 맴돌았기 때문이다.

늦가을에 떠난 순천 여행에서 안개는 볼 수 없었지만, 〈무진기행〉의 배경으로서 순천의 모습과 그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정서를 자연스레 느낄 수 있었다. 사실, 순천만에 여러 번 갔지만, 한 번도 안개를 보지는 못했다. 이른 새벽에나 볼 수 있는 안개를 여행자인 내가 볼 기회는 극히 드물었기 때문이다.

 

소설 〈무진기행〉의 배경이 되었던 ‘무진(霧津)’은 순천만 대대포구의 또 다른 이름이지만, 엄밀히 말하면 가상의 공간이다. 일본에서 태어났지만 어릴 때 순천으로 넘어와 고등학교까지 순천에서 마친 김승옥에게 순천은 소설 속에 나오는, ‘붙잡고 싶지만 잡히지 않는 뿌연 안개와 같은’ 청춘의 추억이 서린 곳이었다. 누구에게나 있을 법한 젊은 날의 고민과 방황의 날들,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미래처럼 모든 것이 불확실해 보이고 불안하게 느껴졌던 청춘의 순간들이 내 키를 훌쩍 넘는 갈대 속에서 오히려 점점 더 뚜렷해지는 느낌이었다. 김승옥은 바로 그러한 자신의 경험을 안개 낀 순천만이라는 공간 속에서 되살린 건 아닐까?

소설 속 무진은 뿌연 안개로 상징되지만, 여행자에게 순천만은 아름다운 생태환경의 보고(寶庫)다. 풍경도 아름답지만 생물 다양성도 풍부한 곳이다. 남해안 지역에 발달한 연안습지 중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곳으로, 람사르 총회 공식 방문지로도 선정되었던 순천만은 갯벌에 펼쳐지는 갈대밭과 칠면초 군락, S자형 수로 등이 어우러져 아름다운 해안 생태 경관을 보여준다.

순천만은 갈대가 무성한 늦가을에서 초겨울까지가 가장 아름답다. S자형 수로 위로 붉은 해가 떨어지는 일몰의 장관, 무리지어 날아가는 철새들의 이동 광경 등이 순천만을 더욱 낭만적으로 만들어준다. 순천만을 감상하는 방법 또한 다양하다. 순천만에 형성된 나무데크를 따라 용산 전망대에 올라가 S자형 수로와 함께 순천만을 굽어보는 풍경이 정석이다. 단, 왕복 2시간은 넉넉히 잡아야 하고, 산책이라기보다는 등산에 가까우니 마음을 단단히 먹고 가야 한다.

순천만 생태 탐조 투어 버스나 생태체험선을 타고 순천만을 둘러보는 것도 조금은 편하게 순천만을 여행하는 방법이 된다. 김승옥문학관까지 이어지는 갈대열차를 타면 김승옥 문학의 자취를 엿볼 수 있는데, 11월18일까지는 공사로 인해 운행이 일시 중지된다. 순천만 입구의 천문대와 자연생태관은 꼭 둘러보자. 아이들에게는 살아 있는 자연 학습과 함께 소중한 체험의 시간이 될 것이다. 이 밖에도 시간이 된다면 가을 단풍이 아름다운 선암사와 송광사에도 들러보고, 조선시대 생활상을 고스란히 간직한 낙안읍성을 함께 돌아봐도 좋겠다. 순천에서 유명한 짱뚱어탕을 먹으며 심신의 원기를 회복하는 것도 여행의 또 다른 즐거움이다.

가을의 순천은 쓸쓸하고도 아름다운 청춘의 뒤안길처럼 ‘가을’을 온전히 느낄 수 있는 곳이다. 아직 가을 여행을 떠나지 못했다면, 어른들에게는 문학 기행을, 자녀에게는 체험학습을 동시에 가능하게 해주는 순천으로 떠나보자.

기자명 장은숙 (부산사대부고 국어교사)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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