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 2학년 때였다. 봄이었는지 가을이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다만 딱 요맘때처럼, 덮어놓고 일을 하는 게 죄악으로 느껴질 만큼 날씨가 좋은 어느 날이었다. 이웃 여고에서는 한창 미술전시회가 열리고 있었다. 4교시 수업 시간. 우리는 영어 선생님을 ‘꼬시기’ 시작했다. 어차피 공부도 안 되는데 이럴 바에야 문화생활 겸 그림 구경이나 가는 게 어떻겠습니까. 예상외로 허락은 쉽게 떨어졌다. 절대로 소란을 피우지 않는다는 데 동의하고 우리는 여고 강당으로 향했다. 조금 쑥스러운 고백이지만 나는 그곳에서 자기 그림을 직접 설명해준 어느 여학생에게 반하고 말았다. 미전에서 돌아와 끼니도 거른 채 하루 종일 생각했다. 어떻게 해야 하나. 이윽고 밤이 되었다. 나는 마음을 가다듬고 책상에 앉아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읽은 소설 가운데 그럴듯한 문구는 전부 동원되었다. 참으로 길고 긴 편지였다.

내가 호란이라는 가수에게 관심을 가지게 된 건 비교적 최근이다. 어느 잡지에 기고한 북 리뷰 몇 편을 본 것이 계기가 되었다. 물론 전부터 알고는 있었다. ‘클래지콰이’의 멤버라는 것, 보네거트의 팬이라는 것, 책을 많이 읽는다는 것 등등. 다만 이 정도로 잘 쓸 줄은 몰랐다. 볼 것도 없이 학창시절 성적도 최고였으리라. 관심을 가져서인지 책을 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궁금했다. 책을 구입해서 읽기를 마칠 때까지는 그다지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이는 책과 음악, 그리고 어머니에 대해 도란도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담백하고 솔직했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읽었다.

하지만 나와는 달리 그걸 고깝게 여기는 사람도 있었던 모양이다. 지난 4월18일, ‘디시인사이드’의 코미디 프로그램 갤러리에는 “가수 호란이 소아마비 후유증을 앓는 어머니와 만원의 행복에 출연한다”라는 글과 함께 ‘호란이 엄마를 팔아’ 운운하는 댓글이 올라왔다. 이에 호란은 자신의 미니홈피(사진)에 “인간이 돼서 어떻게 감히 남의 어머니에게 팔리네 마네 말할 수 있는가?…가수가 노래를 못 팔고 사생활이나 퍼올려 팔게 만드는 건 내가 아니라 당신이다”라며 분한 마음을 토로했다. 하지만 부질없다고 느꼈는지 바로 삭제해버렸다.

그다지 궁금해할 사람은 없겠지만 결국 나는 밤새 쓴 편지를 전해주지 못했다. 다음 날 읽어보니 얼마나 가관이던지. 얼굴이 화끈거렸다. 그러고 보면 연애편지와 악플은 비슷한 구석이 있다. 홀로, 닫힌 공간에서, 어둠을 틈타 쓸 거라는 이미지도 그렇지만, 정신을 차리고 다시 보거나 다른 누군가가 읽어보면 그 유치함에 어이가 없어진다는 점이 특히 그렇다. 잘 모르겠다고? 그럼 지금이라도 연애편지를 한번 써보시라. 누구 말마따나 “글을 썼다 하더라도 곧장 인터넷에 올리지 말고 (곧장 상대에게 보이지 말고) 다음 날 밝은 대낮에 다시 한번 읽어봐야 한다”라는 깨달음을 얻을 수 있을 테니. 연애편지를 쓸 상대가 없다면 이참에 연애를 시작해보는 것은 어떨지. 바야흐로 봄 아닌가.

기자명 김홍민 (출판사 북스피어 대표)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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