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쇼크’가 정치권도 강타했다. 민주당의 공세와 새누리당의 수세로 전선이 재편된 가운데, 문재인발 성명서라는 돌발 변수도 등장했다.

새누리당은 ‘대선 불복’ 카드를 다시 뽑았다. 국정원 대선 개입 의혹이 불거진 이후 위기 때마다 되풀이해 꺼내들었던 카드다. 이번에도 효과를 볼까?

민주당은 속도 차를 드러냈다. 당 지도부가 진상규명론과 ‘헌법 불복’ 공세로 여권을 압박하는 가운데, 정세균 전 대표는 지난 대선을 “명백한 부정선거”로 규정하며 한발 더 치고 나갔다.

10월23일에는 문재인 의원도 직접 움직였다. 이날 발표한 성명서에서 문 의원은 “지난 대선이 불공정했다”라고 썼다. 당 지도부와 대선 후보 사이에 미묘한 기류도 읽힌다. 당 핵심으로 분류되는 한 수도권 의원은 “김한길 대표는 문재인 의원의 속도에 맞춰줄 생각이 없다. 어떤 내용이든 대선 주자가 나서는 순간 ‘대선 불복’이라는 덫에 걸린다”라고 말했다. 이를 의식한 듯 문재인 의원과 측근들도 “대선 불공정을 말했을 뿐, 대선 불복이 아니다”라고 되풀이해 강조한다. 불안 요소가 될까?
 

ⓒ연합뉴스이번 조사에서 박근혜 투표층의 상당수가 새누리당의 논리에 호응하지 않고 관망세로 이탈한 것으로 나타났다.

키는 결국 여론이 쥐고 있다. 여야 모두 여론 동향에 촉각을 곤두세운다. 〈시사IN〉은 여론조사 전문기관 리얼미터에 의뢰해 10월24일(목) 긴급 여론조사를 실시했다. 전국 19세 이상 성인 남녀 700명을 대상으로 했다. 조사 결과를 보면, 여야가 보여주는 대응 전략과 고민의 맥락을 이해할 수 있다.

야당 지지층은 분노, 여당 지지층은 곤혹

먼저 사건의 성격을 어떻게 규정하고 있는지, 사건의 심각성을 어떻게 보는지 물었다. ‘국정원 선거 개입 의혹 사건의 본질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느냐’라는 질문에, 44%가 ‘국가기관이 대선에 조직적으로 개입해 민주주의를 훼손한 사건’이라고 응답했다. ‘국가기관 소속 일부가 개인의 정치적 의견을 밝힌 사건’이라는 답은 29.8%였다. 잘 모르겠다는 응답은 26.2%였다. 여론은 선거 개입이 ‘조직적’이었으며, ‘민주주의를 훼손’한 사건이라는 주장에 힘을 실어주었다.

세부 지표는 더 의미심장하다. 지난해 대선에서 문재인 후보에게 투표했던 응답자 중에서는 76.4%가 ‘민주주의 훼손’이라고 답했다. 반면 박근혜 후보에게 투표했던 응답자 중 40.4%가 ‘잘 모름’이라고 답했다. 박근혜 투표층에서도 ‘개인 의견을 밝힌 사건’이라는 답은 절반을 밑돌았다(45.9%).

문재인 투표층은 단단히 결집해 있다. 반면 박근혜 투표층 중 상당수가 의사 표명을 유보하고 있다. 새누리당으로서는 지지층 결집이 쉽지 않은 이슈라는 뜻이다.
 

ⓒ연합뉴스문재인 투표층은 이번 사태 해결책으로 박근혜 대통령 사과와 재발 방지 약속(46.5%)을 가장 많이 꼽았다.

새누리당은 사건의 성격 규정에서 밀린다. 지지층마저 곤혹스러워한다. 새누리당은 전선을 뒤로 물려 ‘댓글 무용론’을 펴기도 한다. 잘못된 일은 맞지만 결과에 큰 영향을 끼치지는 않은, 일종의 해프닝이라는 논리다.

새누리당의 ‘제2 방어선’은 효과가 있을까. ‘국정원 댓글 활동이 대선에 영향을 끼쳤다고 생각하는지’ 물었다. 결과는 팽팽했다. ‘영향을 주었다’ 49.1% 대 ‘영향을 안 줬다’ 46.2%.
 

이 질문에는 박근혜 투표층이 대거 복귀한다. 박근혜 투표층만 보면, 영향을 안 줬다 75%, 영향을 줬다 19.1%, 모름/무응답 5.9%로, 첫 번째 질문보다 결집력이 눈에 띄게 높아진다. 문재인 투표층에서도 21.1%가 영향을 안 줬다는 응답으로 이탈한다. 즉, ‘사건의 본질’을 물을 때보다 ‘사건의 효과’를 물을 때 여권층은 결집하고 야권층은 이완한다.
 

그렇기 때문에 여권은 끊임없이 ‘효과’를 묻는다. 국정원 댓글 사건 초창기 새누리당의 대응을 사실상 예고한 것은 “선거 개입 댓글은 67개에 불과했다”라는 6월14일자 〈조선일보〉 기사였다. 이후 새누리당은 “댓글 67개로 어떻게 선거에 영향을 끼치나”라는 공세를 되풀이했다.

윤석열 쇼크 이후, 댓글 67개는 5만5000개로 늘어났다. 하지만 논리는 바뀌지 않았다. 10월23일 최경환 새누리당 원내대표는 “국정원이 대선에 개입하려 했다는 트윗글 5만5000여 건은 전체 글 중 약 0.02%에 불과하다”라고 말했다.

대선 불복 아니다 44.6%, 불복 맞다 26.2%

국정원 국정조사 기간이던 올해 7월, 민주당이 장외투쟁을 선언했다. 새누리당은 즉각 맞받았다. “대선 불복의 속내를 드러냈다.” 준비된 메시지였다. 야권의 공세를 대선 불복으로 딱지붙이는 것은 새누리당이 여름 내내 국정조사 정국을 넘기는 핵심 전략이었다.

윤석열 여주지청장의 국감 증언으로 새 국면이 전개되자 새누리당은 다시 한번 대선불복론을 꺼내들었다. 3개월째다. 피로도가 누적되었을 법도 하다. 이번에도 먹힐까.

응답자의 44.6%는 ‘대선 불복이 아니다’라고 답했다. ‘대선 불복이다’라는 응답은 26.2%였다. 대선불복론이 중도층을 설득하기는커녕 여당의 고정 지지층조차 완전히 붙들지 못하는 모습이다.

세부 데이터를 보자. 다시 한번 박근혜 투표층의 결집이 흐트러졌다. ‘불복 아니다’ 34%, ‘불복 맞다’ 33.1%, ‘잘 모르겠다’ 32.8%. 대선불복론은 박근혜 투표층 안에서도 합의가 이뤄지지 않았다. 무응답 비중이 다시 치솟았고, 불복은 아니라는 의견도 많았다.

문재인 투표층에서는 59%가 대선 불복이 아니라고 했고, 대선 불복이라는 응답은 19%였다. 문재인 투표층의 주류는 대선불복론으로 역공당하지 않도록 경계하는 가운데, 대선을 무효로 처리해야 한다는 강경파가 민주당의 행보를 ‘대선 불복’으로 규정하고 싶어하는 경향을 보였다.

새누리당의 한 최고위원은 “윤석열 쇼크가 오래갈 것 같다”라고 말했다. 윤석열 지청장이 안희정·강금원 등 친노무현계 핵심 인사들을 구속시킨 검사인 데다, 국정감사장에서 내놓은 증언이 워낙 구체적이어서다. 따라서 이번에는 대선 불복과 같은 정치 공세가 잘 먹혀들지 않는다는 것이 새누리당의 고민이다.
 

그래서 나온 것이 윤석열 항명론이다. ‘수사 지휘체계를 무시한 돈키호테 검사의 일탈’로 공격의 방향을 잡았다. 사실상 쓸 카드가 마땅찮은 새누리당의 궁여지책 성격이 짙다. 이 카드는 어떨까.

안 먹혔다. 검찰 내분 사태를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응답자의 22.8%만이 ‘항명이 문제’라고 답했다. 반면 ‘정치적 외압이 문제’라는 응답은 49.2%였다. ‘잘 모르겠다’는 28%. 문재인 투표층은 최대로 결집했고(정치적 외압 문제 81.1%), 박근혜 투표층은 대거 이탈했다(잘 모름 40.8%).

큰 틀에서 새누리당의 방어논리였던 대선불복론과, 윤석열 국면에서의 원포인트 대응논리였던 항명론이 모두 별 효과를 내지 못했다. 반대 여론을 결집시키는 반면 지지층은 묶어내지 못하는 결과를 냈다.

새누리당 내부에서도 “수를 너무 많이 부렸다”라는 자평이 나온다. 국정원 선거 개입 의혹을 되치기하기 위해 여권이 내놓은 카드가 너무 많았다는 의미다. 바둑 격언에 “묘수 세 번 두면 그 바둑은 진다”라는 말이 있다. 기발한 카드를 여럿 꺼내들어야 하는 상황이라면, 이미 판이 나쁘다는 뜻이다.

복기해보자. 6월에는 국정원이 노무현·김정일 정상회의록을 돌연 공개했다. 7월에는 대선불복론을 들고 나와 장외투쟁에 나선 민주당을 압박했다. 8월에는 청와대 비서실장과 민정수석을 교체했다. 검찰의 국정원 수사를 ‘적절히’ 통제하지 못한 데 대한 문책성이라는 해석이 유력하게 돌았다. 9월에는 채동욱 전 검찰총장의 혼외아들 문제가 터졌다. 채 전 총장이 버티자 법무부는 감찰에 돌입했고, 채 전 총장은 결국 사퇴했다. 10월에는 윤석열 특별수사팀장을 국정원 수사에서 빼버렸다.

거의 반년 동안 매달 한 번꼴로 정국을 뒤흔드는 ‘카드’가 나왔다. 개중에는 먹힌 카드도 있고(7월의 대선불복론은 민주당의 동선을 효과적으로 제약했다), 실패한 카드도 있다(6월의 정상회의록 공개는 국정원의 의도와는 정반대로 흘러갔다).

하지만 개별 카드의 효과 문제를 넘어, 반년 가까이 정부·여당이 너무 자주 국면전환용 카드를 던진 것이 큰 틀에서 역효과를 낸 모습이다. 이번 〈시사IN〉 조사를 보면 박근혜 투표층의 사기와 결집도가 크게 떨어져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새누리당의 대응논리에 쉽게 호응하지 않고 관망세로 이탈해버린 것이다. 따라서 이제는 정공법 외에 다른 길이 없다는 목소리가 새누리당과 보수 언론에서도 나오고 있다. 더는 ‘묘수’를 둘 때가 아니라는 뜻이다.

상황 인식은 엄중하게, 해법은 온건하게

‘정공법’으로는 어떤 것이 있을까. 새누리당의 한 핵심 당직자는 “애초에 대통령이 ‘전 정권에서 그런 일이 있었느냐. 있어서는 안 될 일이다. 발본색원하겠다’라고 했으면 여기까지 올 일도 아니었다. 당에서는 누구나 아는 사실인데…”라며 말끝을 흐렸다. 당과 청와대에서 대통령에게 직언을 할 참모가 없다 보니, ‘싫은 소리’를 할 타이밍을 놓쳐버렸다는 탄식이다.

정공법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서는 먼저 책임 소재부터 확인해야 한다. 여론은 대선 개입 의혹의 최종 책임자를 누구로 지목했을까.

이명박·박근혜 전·현직 대통령의 공동 책임이라는 응답이 29.9%로 가장 많았다. 이명박 전 대통령이 최종 책임자라는 응답은 25.2%, 박근혜 대통령을 지목한 응답자는 10.1%였다. 국정원과 군이 최종 책임자라는 답은 13.7%였다.

박근혜 투표층은 이명박 책임론으로 쏠렸다(33.5%). 국정원·군 책임론(17.1%)보다도 두 배 가까이 높았다. 박근혜 책임론(5%)이나 이·박 공동책임론(10.5%)은 소수였다. 박근혜 대통령을 지킨다는 전제하에, MB 책임론은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는 모습이다. 정부·여당이 지금과 같은 ‘문제없음’ 전략에서 벗어나 전 정권 책임론을 강하게 들고 나온다면 지지층은 호응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뜻으로 읽힌다.

문재인 투표층에서는 이·박 공동책임론이 압도적이다(51.6%). 박근혜 책임론(16.4%)도 이명박 책임론(16.8%)만큼이나 높게 나왔다. 응답자의 68%가 박근혜 대통령을 최종 책임자로 지목한 셈이다. “박근혜 대통령이 불공정 선거의 수혜자”라는 문재인 의원의 성명서와 일치하는 정서다.

야권 지지층 중 강경파 일부에서는 “단호하게 대선 무효를 선언해야 한다”라는 목소리가 있다. 지금까지 드러난 사실만으로도 부정선거였다고 할 근거가 충분하다는 얘기다. 민주당 일각에서도 부정선거론을 더 강력하게 치고 나가자는 의견이 있다. 민주당 지도부는 이런 전략이 대선불복론을 되살려 새누리당을 도와주는 길이라고 보고 거리를 둔다.

여론은 어떨까. 진상 규명이 될 때까지 수사 결과를 지켜봐야 한다는, 청와대와 새누리당이 선호하는 응답이 43.7%로 가장 높았다. 박근혜 대통령이 사과하고 재발방지책을 내놓아야 한다는, 민주당 주류 의견은 26.9%였다. 반(反)새누리당 강경 블록이 들고 나온, 대선 무효처리와 재선거 대안은 14.1% 지지를 받는 데 그쳤다.

박근혜 투표층에서는 ‘수사 결과를 지켜보자’가 63.6%로 압도했다. 문재인 투표층은 박근혜 사과와 재발방지책 대안을 선호했다(46.5%). 대선무효론의 위력은 문재인 투표층에서도 크지 않았다(25%).

여론 동향을 요약하면 이렇다. 이번 사태의 성격을 규정하는 질문에는 단호하고 강경하다. 국가기관의 조직적 선거 개입이라는 공감대가 있고, 이것이 민주주의에 위협이 된다고 생각하며, 대선불복론이나 검찰항명론과 같은 새누리당의 대응논리에는 냉소적이다. 문재인 투표층이 적극 결집한 반면, 박근혜 투표층은 당혹스러워하며 관망세로 빠지는 흐름이 일관되게 나타난다. ‘댓글이 대선에 미치는 효과’ 이슈에서만 박근혜 투표층의 결집력이 복원된다. 새누리당의 운신의 폭이 크지 않다. 지지층의 열정을 동원하기에는 이슈의 성격이 꽤 나쁘다.

하지만 이번 사태의 해법을 묻는 질문에는, 거꾸로 박근혜 투표층이 신중론으로 결집하는 반면 문재인 투표층은 셋으로 갈린다. 따라서 전체 여론 동향은 신중론으로 기울고, 박근혜 대통령 사과 요구도 치고 나가지 못한다. 대선 무효 여론은 야권 지지층에서도 소수파로 고립되어 있다.

민주당의 고민도 이런 맥락에 있다. 새누리당의 대선불복론은 여론의 호응을 얻지 못하지만, 정작 여론은 온건하고 신중한 해법을 선호한다. 성격 규정은 단호하게 하되, 해법에서 ‘과속’하면 역풍을 맞을 수 있는 구도다.

기자명 천관율 기자 다른기사 보기 yul@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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