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말의 학원가는 바쁘다. 예비 고1 수업에 대한 문의가 쇄도하기 때문이다. 중3 학생들이 기말고사 대비에 열을 올릴 이 무렵, 그들의 부모는 학원가를 뛰어다니느라 열을 올린다.

그들은 학원의 고교 입학설명회 일정이 빼곡하게 적힌 달력에 O, 혹은 X표를 쳐가며 ‘매의 눈’으로 부지런히 발품을 판다. 그렇게 탐색전이 끝나면, 어머니 손을 잡은 앳된 얼굴의 소년 소녀들이 입시학원에 등장한다.

이들은 고등학교를 입학하기도 전에 많은 지식을 배운다. 그리고 다른 하나를 잃는다. 양으로 비교하자면 손해 날 것 없는 투자다. 그러나 잃어버리는 하나가 다시 얻을 수 없는 가치라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올해 초, 고등학교 입학식 직전이었다. 새벽 두 시가 넘은 시간에 걸려온 한 통의 전화. 평소 지치지 않고 공부를 하던 여학생이었다.

“선생님.”

“응, ○○야.”

단지 이름을 불렀을 뿐인데 학생이 울었다. 아마 전화를 걸면서도 울고 있었을 터였다. 목청껏 ‘공기 반 울음 반’으로 울고 나서 아이는 말을 꺼냈다.
 

ⓒ그림 박해성


“저 내일 입학식인데요, 못 자겠어요. 저 사실은 특목고 떨어져서 엄마가 창피하다고 유학 보내려고 했어요. 내신 한 번만 망해도 이제 대학 못 가는 거 아니에요? 안 그래도 일반고라서 (특목고) 친구들한테 처지는데… 여기서도 못하면 저 인생 망하는 거 아니에요?”

해마다 반복되는 사교육 1번가의 사연이었다. 학생의 불안은 가중되어왔지만, 뾰족한 해결책도 없는 그런 사연.

몇 개월 전만 해도 ‘기말이 끝났는데 놀지도 못하고 이게 뭐예요’라며 볼멘 표정으로 투덜대던 아이들이, 오히려 ‘고등학교에서 낙오하면 인생 끝난다’는 말로 자신을 몰아세우게 된다. 어떤 일을 시작할 때는 설렘과 두려움이 동반되는 법인데, 이들은 입학하기도 전에 설렘을 잃는다. 그리고 그것이 증발된 자리에는 두려움만이 남는다.

“산다는 게 침묵 같다는 거… 뭔지 알겠어요”

두려움은 단기간에 사람을 바꾼다. 고교 3년간 치를 12번의 내신 시험 중, 한 번 실수만으로도 원하는 대학에 갈 수 없을 거라는 상상은 학부모와 학생들을 떨게 만든다. 학부모는 ‘우리 애가 학원에서 출발한 시간을 알려주세요’라며 초 단위로 학생의 일정을 관리한다. 아침에 늦잠 자는 딸아이 때문에 생긴 엄마의 불안감은 강사에게 고스란히 전달된다. 울고 있는 학부모와 그로 인해 다시 울게 되는 학생의 연결고리는 좀처럼 끝나지 않는다.

“선생님, 저 밤에요, 집에 오면 좀 그래요. 좀 막막해요. 학원에 있을 땐 그런 생각 안 하는데, 집에 오면 학교 숙제, 학원 숙제, 해야 할 게 쌓여서…. 자야 내일 수업에 안 조는데 자면 할 거 못하니까 못 자고, 그러면 또 내일 졸 거라서 슬퍼요. 근데 내가 해야 하는 거니까…. 이 시에서 ‘산다는 게 침묵 같다는 거’ 뭔지 알 것 같아요.”

곽재구의 〈사평역에서〉라는 시를 가슴으로 읽어낸 아이가 있었다. 아이들이 이 시를 이해하게 도와준 입시제도에 감사를 표해야 할까? 물론 학생들이 반드시 고되지 않은 삶을 살아야만 하는 건 아니다. 그러나 ‘현실이 원래 그렇다’며 위로하는 것만이 해답은 아닐 것이다. 청소년기는 ‘어떻게 살아남을 것이냐’도 배워야 하지만 ‘어떻게 살아갈 것이냐’ 역시 배워야 하는 시기다.

모든 것을 처음으로 경험하는 10대 시절, 시작의 설렘과 기쁨을 모르고 자라나는 불행한 아이들이 여기 있다.

기자명 해달 (필명·대입 학원 강사)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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