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이가 이 시대 감성의 위기가 내적인 요인이 아닌 외부 요인에서 비롯했다고 한다. 어떻게 생각하는가? 오늘날 감성의 위기가 초래된 결정적 원인을 외환위기로부터 생각해보았으면 한다. 기존 가치가 일거에 무너지고 단지 먹고사는 문제만이 삶의 화두가 되었던 이 시기에 바로 감성의 위기가 시작되었으며, 이때부터 사람들은 많은 것을 포기하거나 방기한 채 오로지 부의 축적만을 지고의 가치로 인식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는 근본적으로 잘못된 판단이었다. 세계 11위(현재 13위)라는 우리나라의 눈부신 경제성장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먹고사는 문제에만 천착하며 동시에 각자 삶이 불행하다고 여긴다. 끝없는 자본의 축적이 삶을 행복하게 해줄 것이라는 근거 없는 믿음이 초래한 결과다. 좀더 먹을 수 있고 좀더 벌 수 있었지만 그보다 더 많은 걸 잃었다.
하지만 먹고사는 문제만큼 중요한 것도 없지 않을까? 그리고 세계 11위(현재 13위)라는 것은 상위 20%만이 누리는 지위이지 하위 80%가 체감하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바로 그것이 문제다. 양극화가 극단으로 치닫는 현실에서 20%를 제외한 절대다수가 삶에 대한 분명한 가치관을 갖지 못한 채 혼란스러워 한다. 먹고사는 문제, 즉 자본의 축적만이 삶을 행복하게 하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사고는 실용주의라는 고도의 정치 수사로 표현된다. 결국 최근 대중의 절대가치는 실용이다. 물질적 부를 축적하는 것만을 최선이라고 생각하며 바로 그것을 ‘실용’이라 부른다. 엄밀한 의미에서 그것은 실용이 아니다. 실용은 탄탄한 인문학의 기초 위에, 세상과 삶을 따뜻하게 바라보는 시선을 가지고 삶의 구체적인 것을 실천해나가는 것이다. 단지 돈을 많이 벌겠다거나, 더 잘 먹고살자는 의미가 아니다. 오늘날의 실용은 실용이 아니라 속물주의이며 천박한 자본주의 행태일 뿐이다.
그렇다면 외환위기 같은 경제 위기와 함께 인문학의 위기가 감성의 위기를 초래했다고 보는가? 그렇다. 앞서 말한 경제 위기에 흔들리며, 동시에 사람들은 인문학에 대한 관심과 필요성을 상실해버렸다. 인문학이란 무엇인가? 바로 우리 삶의 가장 기본이 되는 ‘입장’을 갖는 것이다. 어떻게 먹을 것인가, 어떻게 벌 것인가, 어떻게 쓸 것인가를 결정짓는 근본에 대한 학문이다. 이러한 인문학에 대해 무지하거나 혹은 애써 무지하려고 노력하는 태도가 인문학의 자리를 속물주의와 천박한 자본주의로 환치했다. 그러나 절망적인 것은 인문학의 위기가 다만 그것으로만 끝나지 않는다는 데 있다. 사람과 나, 사회와 나의 올바른 관계를 정립하지 못하면 결코 아름답거나 따뜻하게 세상을 바라볼 수 없다. 인문학의 위기가 감성의 위기로 연결된다.
그렇다면 자본의 유혹으로부터 벗어나서 인문학 가치를 깨닫고 그를 통해 감성을 회복해야 한다는 말인데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일단 부족을 느끼는 일에 익숙해져야 한다. 뭔가 조금 부족한 듯 사는 것이 행복이라는 마음을 잃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그 부족한 것을 물질이 아닌 영혼으로 채우려는, 지식이 아닌 지혜로 채우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그 과정에서 세상과 나, 나와 다른 사람, 나아가 나와 나의 관계가 올바르게 설정될 것이다. 물론 이러한 순서가 중요하지는 않다. 가치와 지향을 어디에 두느냐가 더 중요하다.
구체적으로 감성 회복에 이르는 기제가 있다면 무엇이 좋겠는가? 광화문이나, 강남 교보문고에 붙어 있는 글판을 본 적이 있는가? 상업광고가 일절 배제된 서너 줄의 시를 보면서 어떤 생각이 들었는가? 광고가 시로 교체되었을 때 그 느낌은 충격이었다. 잊고 있던 가치들을 깨닫는 그런 기분이었다. 요즘 감성경영이니 감성교육이니 하는 것의 구체적 모습은 바로 이런 시도여야 마땅하다. 도시를 시(詩)로 채우는 작업, 광고를 시로 바꾸는 작업은 결코 비현실적이지 않다. 그것은 언제든 마음먹으면 할 수 있고 그렇게 바뀌어갈 때 사람들의 마음이 움직인다. 그리고 그 모든 노력은 고스란히 문화적·감성적 토대가 된다. 토대가 쌓이면? 그것이 바로 국가의 가치가 되며 우리가 진정 원하는 세상이 된다. 그렇게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