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해 여름이었다. 유치원, 어린이집, 학교 밖 교사들과 함께 비석치기를 하고 놀았다. 끝나고 놀았던 시간을 헤아려보니 세 시간이 훌쩍 넘은 것을 알고 모두 놀랐다. 저녁에 하루를 돌아보며 낮에 했던 비석치기가 한 편의 마당극 같고 드라마 같다고 했다. 웃고 떠들고, 마음이 조였다가 풀어지고, 따지고 받아들이고, 이처럼 놀이 속에는 마치 한 편의 영화에서나 볼 수 있는 이야기의 흐름과 매듭과 결말이 고스란히 있다. 그리고 가장 극적인 대목도 있기 마련이다. 이 대목은 놀이 상황에 따라 조금씩 달라지는데 그날의 절정은 ‘똥싸기’를 할 때였다.

〈div align=right〉〈font color=blue〉ⓒ연합뉴스〈/font〉〈/div〉벚나무 동산으로 변한 강원 삼척시 도계읍 고사리 소달초등학교 운동장에서 어린이들이 즐거운 한 때를 보내고 있다. 2008.
ⓒ연합뉴스 벚나무 동산으로 변한 강원 삼척시 도계읍 고사리 소달초등학교 운동장에서 어린이들이 즐거운 한 때를 보내고 있다. 2008.
비석을 가랑이 사이에 끼우고 동무가 세워놓은 비석 가까이 가서 뒤로 돌아 똥 누는 모양으로 엉덩이를 낮추고 어림짐작으로 다리를 벌려 비석을 떨어뜨리는 것 말이다. 비석을 쓰러뜨리려고 다른 친구가 세워놓은 비석 위에서 똥구멍으로 겨누는 모습을 보면 웃음이 절로 나온다. ‘똥싸기’를 하면서 서로 처음 보는 교사들이라 서먹했던 마음이 열리는 것도 느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벽이 허물어지려면 이렇듯 밖으로 나와 함께 움직이고 부대끼고 웃고 떠들고 놀아야 한다. 놀이는 이 모두를 품고 있다.

내 작은 경험으로 비추어보면 이렇게 온몸으로 놀아본 사람만이 아이들과 놀이를 나눌 수 있다. 그리고 교사는 아이들이 왜 놀아야 하는지 또렷한 자기만의 생각을 갖출 필요가 있다. 왜 공부를 안 시키고 아이들을 놀리기만 하느냐는 다그침에 성실히 제대로 답할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만약 교사가 이 질문에 얼버무리며 놀이에 대한 자기 생각을 또렷이 이야기할 수 없다면 아이들의 놀이는 위협받을 것이다. 아이들과 노는 일이 쉽지 않은 세상임을 나 또한 잘 안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우리는 교사이고 부모가 아닌가.

놀이의 차례와 방법을 머리에 넣고 가는 사람은 아이들에게 놀이를 가르칠 뿐이다. 놀이를 가르치다니 말도 안 된다. 감히 말하건대 아이들과 놀이 속으로 들어가 함께 놀지 못하고 가르치려고만 드는 교사는 불행한 사람이다. 이런 사람들이 아이들과 노는 시간은 일하는 시간일 뿐이고 아이들 또한 그 시간을 결코 놀이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것은 ‘놀이수업’일 뿐이다. 놀이는 배우거나 가르칠 수 없다. 이 점이 놀이와 학습이 갈라서는 대목이다. 오직 놂으로써만 놀이는 부모와 교사와 아이들 사이를 흐를 수 있다.

나 역시 놀이하는 방법을 가르치지는 못한다. 다만 교사들이 놀이를 통해 아이들과 어떻게 만나고 나눌 것인지 조금 거들 수 있을 뿐이다. 나아가 교사 스스로 놀이 속으로 들어가 어떻게 재미있게 놀 것인가를 궁리하도록 거든다. 교사는 아이들을 위해 있기에 앞서 자신을 위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교사가 아이들과 노는 시간은 교과의 연속이 되어서는 안 되고, 교사도 쉼이 필요하니 아이들과 함께 교사 자신도 쉬어야 마땅하다.

놀이는 책을 펴놓고 배울 수도 없다. 농사를 책으로 배울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농사짓는 농부와 노는 아이가 같은 점이 있다면 농사나 놀이나 몸으로 익혀야 한다는 점이다. 놀려면 놓여나야 한다. 놀려면 교사와 부모와 아이들이 그들의 일상을 붙잡고 있는 이런저런 것들에서 놓여나야 한다. 아이들을 놓아주어야 한다. 풀어주어야 한다. 아이들의 목줄을 풀고 철창을 열어주어야 놀이는 시작된다.

기자명 편해문 (어린이놀이 운동가·〈아이들은 놀이가 밥이다〉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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