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처럼 시중의 예상을 뛰어넘는 ‘기득권 버리기’를 통해 민심을 반전시킨 예로는 1987년 6월의 이른바 ‘6·29 선언’을 들 수 있다. 당시 집권한 민주정의당의 대표 최고위원이자 대통령 후보였던 노태우씨는 6월 민주항쟁이 절정으로 치닫던 상황에서 일련의 시국 수습방안을 발표함으로써 극적으로 수세 국면을 탈출했다.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통한 평화적 정권이양, 대통령선거법 개정을 통한 공정한 경쟁 보장, 김대중씨의 사면복권과 시국 관련 사범의 석방으로 이어졌던 당시 수습방안은 지금 읽어보아도 놀랄 만하다. 심지어 신군부에 의해 사형선고를 받았던 김대중씨마저도 이 발표를 듣고 “인간에 대한 신뢰를 느꼈다”라고 언급할 정도였으니까.
그러나 삼성그룹의 쇄신안 앞에서 우리 모두 자문해야 할 것은 21년 전 6·29 선언 이후 한국 사회가 어떻게 움직였는가 하는 점이다. 군사 쿠데타라는 원죄에 시달리던 집권세력은 다시 고개를 쳐들고 행세했고, ‘작전하듯이’ 표를 확보하기 시작했다. ‘위대한 보통사람’ 운운하는 최병렬씨의 선거구호가 등장했을 때쯤 그들은 정국 주도권을 확실히 되찾아갔다.
이에 비해 시민세력은 표의 논리 앞에서 분열하기 시작했다. 야당파와 재야파가 갈렸고, 후보 단일화파와 비판적 지지파가 나뉘었으며, 나중에는 양김을 따라 영남파와 호남파가 갈렸다. 심지어 끝까지 분열을 거부하던 세력마저 독자후보파로 분열했다. 확신하건대, 그때 노태우씨의 6·29 선언은 ‘군정체제를 끝낼 테니 표의 논리로 한판 붙어보자!’는 일종의 변형된 선전포고였다. 그러나 이를 제대로 알아차리지 못한 시민세력은 ‘감격에 겨워’ 표의 논리에 대응하지 못한 채 우왕좌왕했다.
삼성 재판, 철저히 ‘법에 따라’ 진행해야
이번 쇄신안으로 삼성그룹의 족벌 지배체제가 종식될 수 있다면, 이는 매우 환영할 일이다. 하지만 6·29 선언의 경험에서 배웠듯이, 이것은 오히려 ‘족벌 지배체제를 끝낼 테니 돈의 논리로 한판 붙어보자!’는 또 하나의 변형된 선전포고일 수도 있다. 그런 점에서 곧 시작할 삼성 재판을 이번 쇄신안과 분리해 차분하게 진행하는 지혜가 무엇보다 필요하다. 재판은 과거의 불법 행위를 밝혀 이를 처단하는 것이면 족하고, 그 과정에서 여죄가 발견되면 그 또한 적법한 절차에 따라 처리하면 된다. 6·29 선언의 논리에 말려 과거 청산 재판을 김영삼 정부 때까지 미루었던 전철을 되풀이해서는 안 된다.
아울러 이후 전개 과정에서 ‘돈의 논리’가 작동할 문제를 꼼꼼히 살펴보는 것도 중요하다. 특히 이번 쇄신안이 애써 외면한 경영권의 불법승계 논란이나 순환출자구조의 혁신 등은 매우 중요하다. 그것이야말로 후일 이재용씨가 재등장할 때 ‘족벌의 논리냐, 돈의 논리냐’를 가늠할 핵심 고리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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