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선 기간 정치 개입 의혹을 사는 원세훈 전 국정원장에 대한 재판이 반환점을 돌았다. 그동안 이종명 전 3차장, 민병주 심리전단장, 이 아무개 심리전단 기획관, 최 아무개 안보3팀장 등 이번 사건의 지휘선상에 있었던 국정원 관계자들이 줄줄이 증인으로 나섰다. 김하영 직원이 속한 안보3팀 산하 5파트장인 이 아무개, 5파트 소속 이 아무개 직원과 민간인 협력자 이정수씨(가명·이 아무개 파트장과 대학 동기)도 증인석에 앉았다. 이들은 하나같이 정치 개입 의혹을 부인했다. 일부 정치적 의혹을 산 글에 대해서는 방첩을 위한 ‘미끼용 글’이라거나 직무 지시와 무관하게 개인적 ‘소회’를 남긴 글이라고 빠져나갔다.

아고라 글 지난해 2월 이후 모두 삭제

범죄는 부인해도 흔적은 남는다. 사이버상에 남은 댓글과 게시글이 그것이다. 검찰은 지난 1차 공판 때 법정에서 프레젠테이션을 하며 빙산 사진을 보여주었다. 사이버 심리전단 전체 70여 명 가운데 일부 직원 글만 확인했고, 그 글 가운데에서도 삭제되지 않고 남은 글만 찾아냈기 때문에 빙산의 일각이라는 의미다. 다음 아고라의 경우도 2012년 2월 이후에는 모두 삭제되었다(그해 4월 총선이 있었고, 12월 대선이 있었다). 남아 있는 글은 빙산의 일각이지만 경향성은 엿볼 수 있다. 검찰은 삭제되지 않고 남아 있던 정치 관련 게시글 1977개를 범죄일람표로 첨부해 법정에 냈다.

ⓒ시사IN 신선영


〈시사IN〉과 소셜 네트워크 분석 기업 트리움은 바로 이 글을 분석했다. 주로 오늘의 유머나 디씨인사이드, 일간베스트저장소, 다음 아고라 등에 올린 글이다. 트리움은 자체 개발한 프로그램 ‘심플(SimPL)’로 네트워크 분석을 했다. 네트워크 분석을 하면 국정원 직원들이 올린 글이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프레임’을 어떻게 만들어갔는지 알 수 있다. 프레임 이론을 다룬 〈코끼리는 생각하지 마〉의 저자 조지 레이코프에 따르면, 프레임은 ‘머릿속에서 생각한 틀’이다. 언론이나 정치인이 말과 글을 통해 특정 단어를 반복 강조하면 유권자나 뉴스 수용자는 그 프레임 안에서 사고한다. 국정원 직원들이 사이버상에서 누리꾼 머릿속의 생각 틀(프레임)을 어떻게 만들려고 했는지 찾아내기 위해, 단어의 빈도만을 측정하지 않고 그 단어가 주위 네트워크에 미치는 영향력도 계산했다. 전체 텍스트 속에서 언급 빈도 100회 이상만 골라내어 연결 관계를 파악하고, 연결이 끊긴 키워드(isolated node)는 네트워크에 표시하지 않았다.

그렇게 해서 네트워크 지도에 나온 노드(점)의 크기는 중요도, 색상은 의미 덩어리를 뜻한다. 같은 색깔의 노드는 동의어 블록이다. 링크(선)의 화살표 방향은 논리적인 선후 관계다. 이런 네트워크 지도를 보면, 연관이 없는 글처럼 보이는 것도 결국에는 반복적으로 노출되면서 어떤 프레임을 형성하는지 효과적으로 알아낼 수 있다. 시기에 따른 차이를 알아보기 위해 게시글을 두 시기로 나눠 분석했다. 검찰이 찾아낸 가장 오래된 글은 2009년이다. 2009년부터 2012년까지 전체 기간과 지난 대선 과정에 해당하는 2012년 10~12월로 나누어 분석했다.

〈표 1〉은 2009~2012년 전체 기간 댓글과 게시글 1977개를 모두 분석한 것이다. 한눈에 보더라도 빨간색·녹색·노란색·파란색 의미 덩어리가 뚜렷이 나뉜다. 이 가운데 녹색·노란색·파란색 의미 덩어리를 보자. 녹색 의미 덩어리 가운데 노드(점)의 크기가 큰 ‘국민’은 중요도가 크다는 뜻이다. 마찬가지로 ‘대통령’ ‘북한’ ‘이명박 정부’ ‘없음’은 네트워크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다.

야당 대통령 관련 단어는 북한과 연결

녹색 의미 덩어리 안에서 네트워크 선후 관계를 보면, ‘민주당→손학규→대표→집회→참석’이나 ‘정세균→대표→국회→폭력’ 순서로 연결된다. 이 의미망이 형성하는 프레임은 보이는 대로 부정적이다. ‘손학규 대표나 정세균 대표는 집회에 참석하고 국회 폭력과 관련’된다. 이렇게 녹색 의미 덩어리에서 컴퓨터가 읽어낸 프레임은, 민주당은 국민을 현혹하고 선동하는 집단이며, 집회에 참석하고 국회 폭력이나 일삼는 집단인 것이다. 실제 국정원 직원들은 ‘까마귀가 흰 깃털을 몸에 두른들 백로가 될 수 없듯이 독재의 잔당인 민주당이 아무리 민주주의를 외쳐본들 민주당은 청산해야 할 빨간 사상에 오염된 독재의 잔당에 불과할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다음 아고라 2011년 10월30일)’라고 부정적인 내용을 올렸다.

‘대통령’과 ‘북한’의 중요도가 큰 노란색 덩어리는 주로 전직 대통령이 언급되었다. 국정원 직원들은 2009년 5월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뒤 관련 글을 자주 올렸다. ‘대통령’에 연결된 단어는 ‘죽음’ ‘자살’ ‘사과’ ‘비리 척결’ 등이다. 더욱이 전직 대통령과 관련된 단어는 북한과 연결된다. ‘핵 개발’ ‘핵 보유국’ ‘핵무기’ ‘도발’ 등 ‘대통령’과는 따로 떨어진 단어처럼 보이는데, 컴퓨터는 이를 노란색 의미 덩어리로 읽어냈다. 햇볕정책과 연결되기 때문이다. 김대중·노무현 정부로 이어지는 햇볕정책이 북한 핵무기 개발을 초래했다는 일종의 ‘퍼주기 프레임’을 국정원 직원들이 올린 글에서 컴퓨터는 한 덩어리로 읽어냈다. 국정원 직원들은 ‘제2 연평해전으로 아까운 장병이 희생되었음에도 김대중은 헛소리를 지속하고 있다(다음 아고라 2009년 6월28일)’거나 ‘과거 10년간 햇볕정책으로 평화가 찾아왔는가? 북한은 우리가 해준 돈으로 무엇을 했는가? 핵무기를 만들어 협박했고, 서해안에서 무력도발을 감행했다(2012년 1월7일 네이버 블로그)’라는 글을 반복해서 올렸다.

파란색 의미 덩어리에서는 ‘이명박 정부’가 중요하게 잡혔다. 이명박 정부를 중심으로 4대강 사업과 관련된 단어가 자리 잡았다. ‘전문가’들이 하는 ‘(4대강) 이야기’는 ‘과거’이고, ‘4대강 살리기 사업’의 ‘추진’을 중단하거나 ‘반대’할 ‘이유’는 ‘없음’이라는 프레임을 만들었다. 4대강 사업을 비판하는 야권과 시민단체를 반박하는 프레임이다. 여기서 파란색 의미 덩어리와 초록색 의미 덩어리의 연결고리로 등장하는 ‘없음’을 눈여겨보아야 한다. 없음은 ‘대안 부재’ ‘무능’ ‘해법 없음’으로 연결되면서 야당이 비판을 위한 비판만 일삼는다는 이미지를 형성한다. 원세훈 당시 국정원장은 부서장 회의나 원장 지시 말씀을 통해 “4대강 사업, 제주해군기지 건설 등 국책사업과 관련해 좌파 세력 등이 ‘반대를 위한 반대’를 하고 있다(2011년 8월22일)”라거나 “좌파 언론 등에서 유지비용이 많이 든다고 비난하고 있는데, 재해복구 비용·물 확보 등 많은 이점을 감안해 국민에게 적극 홍보하라(2011년 12월16일)”는 식으로 여러 차례 강조했다.

 


분석을 맡은 이종대 트리움 이사는 “〈표 1〉에서 보이는 녹색·노란색·파란색 의미 덩어리는 한마디로 야권 공격 프레임이다”라고 해석했다. 컴퓨터가 분석한 대로라면 국정원 직원들은 인터넷 게시글이나 댓글을 통해 ‘대안 없이 반대하고 국민을 현혹시켜 북한 핵 개발을 방치한 야권’이 ‘4대강 사업도 대안 없이 반대한다’는 논리를 설파하려 했다는 것이다.

반대로 빨간색 의미 덩어리는 네트워크상 여권 프레임이다. 빨간색 의미 덩어리에서 중요한 단어는 ‘핵안보’ ‘한·미 FTA’ ‘대한민국’이다. 영향력을 주고받는 단어는 ‘발전’ ‘경제’ ‘효과’ 따위나 ‘리더십’ ‘신용등급’ ‘발효’ 등 긍정적인 단어가 대부분이다. 이 빨간색 의미 덩어리가 내포한 의미는 ‘대한민국이 핵안보 정상회의를 유치했고 리더십을 발휘해 한·미 FTA도 발효시켰다’라는 국정홍보용 프레임이다. 국정원 직원들은 ‘한·미 FTA가 안 된다면 우리나라 제품 판로는 막힙니다’(2012년 1월5일 네이버 지식IN) 따위 글을 올렸다.

‘제주해군기지’ ‘서해’ 등도 북한으로 귀결

국정원 직원들이 국정홍보처의 구실을 한 것처럼 비치는데, 재판에 나온 국정원 직원들은 국정 폄훼에 대한 대응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원세훈 전 원장은 취임 직후인 2009년 5월15일 첫 부서장 회의에서부터 “그동안 위축되었던 국정 홍보업무를 보다 공격적으로 수행할 필요가 있다”라고 말했다. 원 전 원장은 “종북 세력 척결과 국정 성과 홍보가 별개의 사안이 아니라 연결되는 문제다”라고 말하기도 했다(2012년 6월15일). 분석 결과로만 보면 국정원 직원들이 원세훈 원장의 지시 내용을 충실히 이행한 셈이 된다.

대선이 무르익은 2012년 10월부터 12월까지 올린 글을 대상으로 분석한 〈표 2〉의 결과를 보자. 대선 기간에 국정원 직원들이 올린 글 가운데 컴퓨터가 묶어낸 색깔별 의미 덩어리는 ‘서해’ ‘미사일’ ‘금강산’ ‘제주해군기지’ ‘북한’ 그리고 ‘박근혜’이다. 이 가운데 미사일은 당시 나로호 발사 등과 관련된 가치중립적 단어다. 네트워크 분석이 뽑아낸 의미 덩어리에서 ‘문재인’이나 ‘안철수’ 후보를 직접 거론한 키워드는 중요도가 낮아 뽑히지 않았다. 선거에 개입하지 않았다는 원 전 원장과 국정원 직원들의 주장이 일견 타당한 것처럼 비친다.

하지만 프레임을 형성하는 화살표 방향을 보면 얘기가 달라진다. ‘서해’ ‘금강산’ ‘제주해군기지’가 향하는 곳은 다 ‘북한’이다. 이 주제들은 선거 기간 박근혜·문재인 후보 사이에 차이가 가장 뚜렷한 지점이었다. 제주해군기지 의미 덩어리를 보면, ‘제주해군기지’ ‘반대’ ‘선동’은 ‘북한’으로 귀결된다. ‘중국’ ‘일본’ 때문에 제주해군기지의 필요성을 강조하면서 이를 반대하면 ‘좌빨’ ‘선동’이고 ‘북한’으로 연결되는 것이다. 이때 민주당은 제주해군기지 예산안 처리를 유보하자는 계획이었다.

 


초록색 의미 덩어리로 묶인 금강산 관광과 관련해 문재인 후보는 2012년 11월19일 기자회견을 통해 ‘조건 없는 재개’를 공약화했다. 바로 다음 날인 11월20일 국정원 직원들은 금강산 관광 재개를 비판하는 글을 집중해서 올렸다. ‘금강산 중단 책임은 관광객과 북한에 있으며, 우리 기업의 자산을 보장하고 안전을 강화하는 약속을 하는 데 정부 역할이 중요하다’는 프레임을 형성한다. 문재인을 직접 거명하지는 않았지만 결과적으로 문 후보를 흠집 내는 내용이다.

지난해 10월8일 정문헌 새누리당 의원은 남북정상회담 과정에서 노무현 전 대통령의 NLL 포기 발언 의혹을 처음 제기했다. 새누리당발 NLL 이슈는 이후 대선을 관통했다. 국정원 직원들은 이 기간에 ‘NLL 문제를 두고 정치권이 시끌시끌하다. 이런 논란을 제공한 건 10·4 선언이다’(10월16일 일베)라거나 ‘좌좀들 요즘 NLL 수세에 몰리자 이제 실패한 햇볕정책 계승하자고 선동질이다’(10월17일 일베) 따위 글을 올렸다.

네트워크 분석에 나타난 의미망을 보면 ‘북한’이 ‘협상’을 요구해 ‘서해 공동어로구역’을 설정하자는 식으로 서해 공동어로구역 주장을  종북 프레임으로 묶었다. 새누리당이 NLL 포기 발언을 대선 이슈로 부각했고, 국정원 직원들은 방어심리전이라며 새누리당과 같은 목소리를 낸 것이다.

여권 프레임 글은 박근혜로 집중

이 시기 가장 눈에 띄는 의미 덩어리는 ‘박근혜’이다. 문재인과 안철수 후보는 빠져 있지만, ‘복지 확대’와 함께 박근혜가 등장한 것이다. 이종대 트리움 이사는 “의미 네트워크 분석만으로 결론에 도달하는 컴퓨터 분석에 따르면, 이 시기 국정원 직원들이 쓴 글의 야권 프레임은 북한, 여권 프레임은 박근혜로 모아진 것을 알 수 있다”라고 말했다.

원세훈 전 원장은 “인터넷 자체를 종북 좌파 세력이 다 잡고 있는데 전 직원이 인터넷을 청소한다는 자세로 그런 세력을 끌어내려야 한다”(2011년 10월21일)라며 “정부를 비방하는 개인 세력이 있다면 우리 국민이라도 북한과 다르지 않다”라고 강조했다. 원장의 지시 말씀을 실행한, 김하영씨가 속한 5파트 책임자 이 아무개는 검찰에서 “원장님 지시 강조 말씀 가운데 국내 종북 세력은 문재인·안철수 후보 아니면 이정희 후보를 염두에 둔 것 같다”라고 진술하기도 했다(22~23쪽 기사 참조).

하지만 이 파트장을 비롯해 재판정에 나온 국정원 직원들은 한결같이 게시글들이 북한과 종북 세력에 맞선 방어심리전 차원의 글이며 정당한 업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종북 세력에 대해 국정원 차원의 기준은 없었다. 국정원 직원들은 따로 지시나 가이드라인 없이 ‘이심전심’으로 판단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재판 과정에서 종북 세력에 대한 정의는 증언자마다 달랐다. ‘북한 주의·주장에 동조하는 세력’(이종명 3차장)이나 ‘북한의 지시를 받아 대한민국을 부정하는 세력’(민병주 심리전단장)이라고 증언하는가 하면, ‘대법원에서 이적단체로 판명받은 단체의 구성원’(이 아무개 기획관)으로 한정하기도 했다. 민간인 협력자 이정수씨는 “종북이 누구를 의미하는지 지시받지 못했다. 일베(일간베스트저장소) 사이트를 보면 (종북에 대해) 팩트 위주로 잘 정리가 되어 있다”라며 종북 세력의 판단 근거로 일베를 들기도 했다. 일베는 전라도, 민주당, 일부 연예인까지 무차별적으로 종북 딱지를 붙인다.

재판 과정에서 검사나 변호인이 민주당이나 통진당이 종북 세력이냐고 증인들에게 직접 물으면 이들은 부인했다. 그러나 이 글을 누가 올렸는지 알 리 없는 컴퓨터가 국정원 직원들이 올린 글들을 네트워크 분석한 결과는 ‘야당=종북’이라는 프레임이었다.

기자명 고제규 기자 다른기사 보기 unjusa@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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